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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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낮추는 훈련

 

본문: 시편 127:1-5; 마태복음 23:1-15

신반포감리교회 홍정호 목사 (2015.11.8.)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시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없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가을비가 내리는 주말입니다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같아도, 비를 맞는 사람의 삶의 자리는 모두 다릅니다. 비가 반가운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비를 맞는 사람의 일상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비가 내리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의 단비역시 그런 게 아닐까요. 어쩌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은혜의 단비보다, 그 단비를 맞이하는 사람이 딛고 있는 삶의 자리가 더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의 단비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귀한 선물로 여기는 마음을 우리 모두가 가지면 참 좋겠습니다.

 

1.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척 불편합니다. 예수님께서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대상으로부터 제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의 이 비판을 가장 직접적으로 맞아들여야 하는 사람이 바로 제 자신일지 모르겠습니다.

 

팔레스타인 유대교에는 크게 네 개의 분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젤롯파, 그리고 에세네파입니다. 각각의 분파의 강조점은 달랐지만,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근본정신을 계승한다는 데 있어 이들 네 분파는 공동의 기반 위에 있었습니다. 먼저, 바리새파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강조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이끈 정신적 지도자 그룹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존경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율법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 가능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가 이들의 관심이었고, 특히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법률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두개파는 성전제의에 초점을 둔 이들입니다. 이들은 제례의 형식을 통해 율법의 정신이 계승되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제사장의 권위를 중심으로 한 성전제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성직자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로마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사상적, 정치적,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개혁적인 바리새파와는 갈등관계에 있었습니다. 반면, 젤롯파는 로마에 대한 무력항쟁을 주장한 이들이고, 에세네파는 탈정치적이고 내면적인 종교성을 추구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각 분파의 이런 특징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을 이렇듯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이 과연 적절한 비판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옳다 치더라도, 그 말씀을 기록하고 전달한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의 진의가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이미워하시고 저주하신 것 같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공동체가 유대교와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관계를 전제하고 이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2.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예수님의 비판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는 다른 세 분파의 사람들을 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친로마적인 사두개파, 무력항쟁을 주장하는 젤롯파, 그리고 현실이야 어떻든 내면성만을 추구하는 에세네파와 달리, 개혁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서를 지닌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지할 수도 있는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비슷한 길을 갈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른 세 분파가 아니라, 유독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날선 비판을 하고 계신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언자가 아니라, 그 나라를 실현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정치가였다면, 그분은 무엇보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당신 으로 만들어 든든한 지지기반으로 삼으셨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타협하기보다는 그들 속에 있는 위선과 탐욕을 만천하에 드러내시고,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저는 때로 만약 예수님께서 동양의 현자들처럼 장수하시면서 통치의 지속가능성을 고심한 분이었다면 어땠을까?’ ‘저항과 대립대신 타협과 화해를 택하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런 상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이지만, 매순간 현실과 적절한 타협점을 찾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의 맥락을 다소 벗어나는 말씀입니다만, 어떨 때는 가롯 유다의 마음도 이해가 될 듯합니다. 유다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하느님, 저 선생님 예수를 보아하니, 이상은 높고 현실에는 어둡습니다. 자기 뜻을 실현할 능력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각을 세우면 도대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저들을 우리 편으로 삼아야지요. 계속 선생님을 따라 다니다가는 죄 없는 다른 제자들까지 몰살을 당할 게 뻔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쯤에서 선생님을 팔아넘겨 다른 제자들이라도 구하는 게 당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쯤에서 끝을 내야지요. , 전능하신 하느님, 제가 하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지금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 눈 뜬 제가 그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하느님, 예수를 팔아넘길 용기를 주소서!” 유다가 이렇게 기도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제 상상입니다.

 

유다도 선생님을 배반하기 싫었겠지요. 유다도 고통스럽지만, 모두를 위해 선생님을 배반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죠. 유다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유다야말로, 예수를 내어줌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 이상하게 생각이 되시지요?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게 바리새파 사람들의 화법입니다. 유다를 이렇게 변호하고 나면, 예수보다 가롯 유다를 위대한 인물로 그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팔아넘긴 죄는 묻지 않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조하면서 유다를 부각시키는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겠죠.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예수 중심의 해석을 떠날 수 없습니다.

 

3.

 

예수께서 왜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립하셨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이른바 진보연하는 이들의 위선을 떠올리곤 합니다.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보수주의의 편을 들자는 게 아닙니다. 말과 삶이 어긋나는 모든 파벌화 된 집단의 위선을 경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진보연하는 이들 가운데는 약자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가짜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두개파 같은 극우 보수주의자들이나, 젤롯파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앞세우는 사람들, 세월아 될 때로 되라는 무책임한 방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쩌면 그들의 명암은 너무 선명해서 굳이 별도의 비판이 필요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개혁적인 성향의 지도자 집단인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날선 비판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바리새파와 같은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스스로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책임 있는 말이 없습니다. 발은 땅을 딛고 있는데, 말은 허공을 맴돌곤 합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이 딛고 선 자리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왜 유독 바리새파 사람들을 미워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 있는 깊은 곳,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듯 들리는 언사의 중심에는 여전히 변함없는 자기중심성과 이기심, 그리고 탐욕이 살아 꿈틀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소리를 밥 먹듯이 하는 그들 자신의 삶에 가려 좀처럼 반성과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회칠한 무덤이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자리란 권위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겠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이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다 행하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영혼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의 삶이 그 말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자리에서 말을 할 때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죠. “음식조절하시고, 술 담배 하지 마시고, 스트레스 관리 잘 하시고, 운동 꼭 하세요.” 그런데 그런 옳은 말씀을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하느라, “끼니를 거르고, 스트레스 받고, 운동도 못 하고, 술 담배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의사 선생님들도 적지 않습니다.

 

자기 지식과 삶의 일치는 근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요청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지식과 삶은 철저히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분리를 강요받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삶과 일치되면 그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어 수행이 불가능한 일도 있습니다. 감정노동의 경우가 대표적이지요. 그런 일은 자기의 일과 감정을 철저히 분리하는 게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길입니다. 말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말, 그 옳은 말조차도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이들을 두고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쩌면 이렇게 적나라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강단에 설 때마다 큰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설교가 자칫 그런 일이 되지는 않을까 늘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에는 힘이 없죠. 목소리도 좀 높이고, 강력하게 선포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저는 도무지 그럴 마음이 안 생깁니다. 너나 잘해하는 목소리가 이명증처럼 언제나 제 귀를 맴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설교자로 부름받은 이의 곤란은 그렇다고 설교를 안 할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설교 안 하면 우리야 고맙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래도 저는 형식이 내용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보수적인목사가 아니겠습니까? 기왕에 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잘 하는 게 방법이죠.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설교를 더 잘 해야겠다, 예배를 정말 전심으로, 정성껏 잘 드려야겠다,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4.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꾸짖고 계시지만, 그것은 실상 우리를 향한 꾸짖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 순간 깨어 옳은 길이 어디인지, 무엇이 더 나은 해석인지, 어떤 길이 더욱 우리를 인간적인 삶으로 이끌어 가는지를 고민하며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앞세워, 가장 반()예수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엊그제 미국의 시카고대 연구팀이 한 의학저널에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종교 있는 집 아이가 더 이기적이고 베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에 앞서 2012년에는 종교가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이 덜하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고 하지요? 놀라셨나요? 저는 하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입니다.

 

종교적 신념이란 기본적으로 배타적입니다. ‘배타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라서 그렇지, 실은 자기 정신에 충실한 이들은 얼마간 배타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믿는 진리가 참되다고 여겨야만, 그리고 진리를 집요하게 추구할 수 있는 자기중심적 의지가 있어야만, 진리에 대한 헌신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타성과 이기심만으로는 건강한 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종교적 믿음에 대한 배타적 헌신이 바탕이 되는 토대에서 자기 성찰이 가능한 신앙인이라야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서적 믿음을 바탕으로 그것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이성과 열정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는 이들이 근본주의적 신앙을 지닌 이들보다 대체로 열정이 부족한 듯 여겨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이성과 신앙적 열정의 조화를 추구하기에 그렇습니다.

 

둘 사이에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더 쉽습니다. 믿거나 안 믿거나, 이성을 선택하거나 열정을 선택하거나, 진리의 다원성을 주장하거나 진리는 하나뿐이라고 주장하거나, 사람들은 명확한 걸 선호하지, 가능성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 질수록, 사람들은 종교에서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요구할 겁니다. 생각하고, 성찰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도록 요청하는 복잡한 종교보다는 단순한 진리, 자기 대신 생각해주고 할 일을 딱 정해주는 종교의 권위에 의탁하기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죠. IS같은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이 공격적 선교를 펼치는 상황에서, 게다가 기독교 교세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서 단순하고 명쾌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조화와 균형, 성찰의 중요성을 말하기는 여러 모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5.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배움과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앎의 목적은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의 그럴 듯한 말과 달리, 바리새파의 앎의 목적이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근본정신에서 멀어졌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지식이라도 파벌화의 길을 걷는 순간, 그 지식의 사람을 살리는 앎의 본래 목적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보수주의는 물론이고, 진보를 표방하는 이들이라고 해도 그것은 변함없는 진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앎에 앞서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명심보감을 읽힙니다. 큰 배움을 향해 나아가기에 앞서 유교적인 심성과 덕성을 먼저 키우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런 인간됨의 바탕이 없는 지식은 결국 자기와 이웃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선조들이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경험한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푯대로 삼아 큰 배움에 길로 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인간됨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신앙적인 지식과 열정은 무익하거나, 남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늘 의식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인간됨의 길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훈련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랍비라는 오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심지어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을 중심으로 삼고 그분을 높이는 삶의 훈련을 철저히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훈련이 철저하게 되지 않은 사람, 하느님의 절대성 앞에 인간의 상대성에 대한 성찰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믿음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 오히려 독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식에 앞서 마음 바탕을 가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6.

 

하느님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보다는 마음 바탕이 좋은 사람을 평화의 도구로 삼으시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능력이 뛰어나기만 하면 믿지 못할 사람에게도 중요한 일을 맡기시나요? 그렇지 않으실 겁니다. 능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일을 맡길 때에는 먼저 그 사람의 인간됨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능력은 좀 부족해도, 그것은 일을 하면 늘기 마련입니다. 부족함을 알고, 배울 마음만 있다면, 능력이 더 나은 사람이 곁에서 도와주면 됩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사람, 신뢰가 없는 사람과는 일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의 능력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훌륭한 성취를 이룬 사람인지가 그분의 제일가는 관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겸손한 사람인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분을 높이며, 그분의 일을 기쁨으로,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인가,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우리를 믿고 계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 하느님 보시기에 만족할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믿고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분의 일을 수행할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보다는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믿음에 겸손함과 성실함으로 응답하는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믿고 계시니, 용기를 내어 평화의 길로 나서십시오.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모쪼록,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삶을 통해 하느님께 더욱 인정받고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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