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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대사(大使)

 

본문: 시편 8:1-9; 마태복음 28:16-20

설교: 홍정호 목사 (2017.6.11. 성령강림 후 제1/삼위일체주일)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이며,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켜 왔습니다. 교회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성령강림절기를 삼위일체주일로부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란 곧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믿음을 굳게 새기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시라는 교회의 고백은 형이상학적 신학의 언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의 신앙실천을 통해 경험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또한 성령과 하나이신 분입니다. 삼위일체주일은 이렇듯 하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사명을 감당케 해 주심을 믿고 새기는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성령강림절 신앙의 순례길에 나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대위임을 주제로 한 말씀입니다. 열한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기 위해 갈릴리로 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보다 먼저 고난의 땅 갈릴리에 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장과 서기관들과 통치자들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주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거기에 있던 이들은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나라의 진실과 대면할 용기가 없었고,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고, 무엇보다 진리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들 예루살렘의 권세자들은 자기들의 일천한 경험과 지식을 고수하면서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 앞에서도 변화되기를 거부했고, 그들의 살아온 방식을 따라 예수를 처형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과 제자들의 여정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끝났습니다. 그들의 꿈은 좌절됐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소식은 좌절된 꿈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 계셨습니다. 가난한 어부와 세리들, 세상에서 찢기고 고난당한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삶의 새 희망과 용기를 가졌던 그곳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가 계셨습니다. 이제 갈릴리는 특정한 지역명칭이 아닙니다. 그곳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삶이 변화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인생의 새 희망과 용기를 얻고 변화의 한길로 나아가는 역사가 시작되는 곳, 그곳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의 갈릴리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 예수를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마태는 전합니다. 우리말로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라고 번역된 문장에서 뵙고’(having seen)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의 원형은 호라오’(ὁράω)입니다. ‘호라오는 보통 영어의 ‘see’로 번역이 됩니다. 눈으로 보는 ‘look’이 아니라, 중의적 의미를 지닌 ‘see’로 번역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에 보다는 말은 더 많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죠. 눈으로 볼 때도 본다고 하지만, 사람을 알아본다고 할 때도 본다고 하고, 결과를 지켜본다고 할 때도 본다고 합니다. 마태가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고 했을 때 그들이 본 예수님 역시 눈으로 본다는 의미만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보다’(to see with the mind)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어떤 제자들은 예수를 뵙고서도 여전히 의심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안목이 없었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난 제자들, 그분을 뵌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명령을 위임받았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는 말을 종종 오해합니다. 주님이 받으신 권세는 세상을 호령하는 권력이 아닙니다. 말 한 마디로 누군가를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하는 그런 주권자의 권세가 아닙니다. 주님의 권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권세, 섬김과 돌봄과 배려를 통해 세워지는 목자의 권세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권세는 어떠한 사회적 지위에 기댄 권세가 아니라, 복음적 삶에 대한 충실함에서 흘러나오는 권세입니다. 자기를 위해 다른 이를 언제든 희생시킬 수 있는 그런 권세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어주는 권세입니다. 작은 일, 작은 손해 하나 감수하지 못하고 끝끝내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고야 마는 그런 능력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내려놓고,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의 권세야말로 주님께서 받으신 권세인 것입니다. 이렇듯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내면의 힘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사람,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세상과 다른 권세를 받으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을 지배하고, 너희의 가르침을 받드는 아랫사람으로 만들라는 지배의 명령이 아닙니다. 식민주의 시대의 선교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서양의 우월한 물질적 지위를 바탕으로 비서구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선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교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은 그들 열한 제자가 주님으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바를 전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배운 섬김과 돌봄과 사랑을 전하여,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그분의 제자가 되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도 같은 맥락입니다. 군대 훈련병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고된 훈련에 몸과 마음이 지친 병사들이 기독교신앙에 대한 진지한 숙고 없이 초코파이 한두 개에 세례받기로 마음먹는 것을 지켜보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상대방의 약함을 이용해서, 저들의 곤고함을 이용해서 일생에 한 번 뿐인 세례식을 저렇듯 아무 의미 없는 집단예식으로 치러도 되는 것인가? 세례를 주는 군목들의 마음이야 순수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집단 예식이 성경적이라고만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 때 인용되곤 했던 구절이 바로 예수님의 저 명령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은 배고픈 이들의 약함을 이용해서 등록교인 하나를 늘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례가 상징하는 바, 옛 생명이 죽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기 이전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죽고, 세례를 받음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옛 생명을 조금 고치고, 교양을 덧입히고, 교육을 통해 개선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옛 생명은 완전히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온전히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세례는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의 삶을 돌이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의 시작이 세례입니다.

 

3.

 

그렇게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주님의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보냄 받은 이들의 사명입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제자, 성도로 살아간다는 건 주님의 이 사명을 붙들고 사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향해 친히 파송하신 주님의 대사(大使)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삶이 선물이기는커녕 하루하루 버텨내야 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특히 지나친 경쟁과 효율성 위주의 삶을 어려서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생활하는 한국사회에서 삶이 선물이라는 말은 현실을 외면한 한가한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삶을 선물로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굳게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삶을 선물로 여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세상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풍성한 삶,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자신이 돌보는 양떼가 상처입고 죽기를 바라는 목자가 없는 것처럼,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덧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기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멈춰서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0) 우리가 세상에 걸려 넘어지고,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주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언제까지 그러합니까? “세상 끝 날까지그러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주님의 이 약속을 굳게 붙잡고, 갈 길을 가는 삶이라고 믿습니다. 올림픽 대회 기간마다 주 경기장에 타 오르는 성화를 기억하시지요? 작년 브라질올림픽 성화는 53일에 채화되어서 개막일인 85일까지 95일간 12,000명의 주자가 20,000km를 달려 리우 시대 주 경기장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처음 불을 밝힌 사람이 마지막까지 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화 봉송의식의 영광은 맨 마지막 주자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불은 12,000명의 주자가 손에 횃불을 들고 자기에게 맡겨진 구간을 뛰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횃불을 손에 들고 뛰는 봉송주자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불을 밝혀 우리 손에 들려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최후승리를 믿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구간 동안 불을 꺼뜨리지 않고 뛰다가 다음 사람에게도 그 불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더 힘든 구간도 있고, 좀 더 수월한 구간도 있겠지요. 누구는 좀 더 어려운 코스를 뛰고, 누구는 좀 더 수월해 보이는 코스를 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손에 성령의 불이 들려있는 한, 우리가 주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인 한 우리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하는 주님의 약속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보냄 받은 이들입니다. 섬김의 권세, 사랑의 권세, 배려와 나눔의 권세로 세상을 깨우라는 사명을 받아 세상에 파송된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의 대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일로 우리가 부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또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말씀 의지하여, 맡겨주신 바 사명 감당하는 데 있어 부족함 없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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