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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람 (2017.6.18.)

2017.06.18 13:56

홍목사 조회 수:85

희망의 사람

 

본문: 창세기 18:1-15; 로마서 5:1-8

설교: 홍정호 목사 (2017.6.18. 성령강림 후 제2)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로마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저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지난 한 주도 뉴스 보기가 괴로웠습니다. 잠자는 데 방해가 된다고 아파트 도색 작업을 하는 인부의 밧줄을 끊고, 대학원 학생이 폭탄을 만들어 담당교수에게 테러를 일으키고, 태어나 곧 죽은 아기를 두 명이나 집안 냉동실에 보관하는 등 끔찍한 영화가 일상이 된 듯한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또 멀리 런던에서는 가난한 이민자 등 서민들이 주로 살던 그렌펠타워 화재로 50명 넘는 이들이 사망했습니다. 현장을 방문한 메이 총리의 태도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빌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끔찍하고 안타까운 소식들을 일상에서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은 오히려 둔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체념한 듯 원래 세상은 그런 곳이다라는 일반론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들은 안전이 아닌 위험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길들어 버린 이들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 대부분의 사건사고는 사람이 원인이거나, 사람에 의해 그 피해가 확산된 인재(人災)의 성격을 지닌 것입니다. 범죄를 일으킨 이들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만, 그렇게 해서는 반복되는 피해를 막을 수 없고, 무엇보다 성서가 말하는 정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비난받던 이들의 편에서, 남들이 다 손가락질 하는 이들의 곁으로 다가가 그들에게 말을 거시고, 그들의 깨지고 상처 입은 삶을 치유하심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주체로 세우셨습니다.

 

지난 주 교수에게 테러를 일으킨 대학원생이 학점 때문에 그랬다는 신문보도가 나온 걸 읽다가 혼자 실소를 했습니다. 기사의 성격상 복잡한 현실의 맥락을 다 살피기는 힘들다하더라도, 너무 일방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부를 잘 다니던 학생이 왜 대학원에 와서 저런 악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구조적인 원인분석 없이 그의 행위만을 비난하는 건 정당하지 않습니다. 테러행위 그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 교수는 피해자이고 약자이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할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대학원이라는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약자는 대체로 학생들입니다. 몇몇 양심적인 교수들 가운데에서 대학원의 억압적 구조를 성찰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2.

 

자크 데리다라는 철학자는 법과 정의, 폭력에 대해 논하는 법의 힘이라는 책에서 정의는 항상 아마도의 영역에 머물러야한다고 말합니다. 한편에서 확정적으로 정의를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데리다는 강조합니다. 낯설게 들리시나요? 이런 모호함은 때에 따라 체제옹호적인 입장이 될 수도 있고, 역으로 급진적인 반체제성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반대하는 일에 대해 옹호적일 수도 있고, 모두가 옹호하는 일에 대해 외롭게 반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체의 입장에서 동떨어진 채 자기주장만을 펼치라는 말은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반대할 때와 힘을 실어줄 때,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이라야 저 말의 의미에 근접할 수 있을 겁니다.

 

논어위령공편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여러 사람이 그를 미워한다고 해도 반드시 그를 잘 살펴보아야 하고, 여러 사람이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반드시 그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衆惡之, 必察之. 衆好之, 必察焉)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좋아한다고 반드시 그가 좋은 사람은 아니고, 사람들이 다 비난하고 손가락질한다고 반드시 그가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이런 중오필찰의 태도가 성서에서 정의를 말하는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확정적으로 편을 딱 갈라서 너는 내 편, 너는 저쪽 편이라고 말하는 건 유대교의 방식인지는 몰라도 예수님의 방식은 분명 아닙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이런 편 가르기에 저항하시다가 자기들의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는 저 무지하고 굳어진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23:34)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이들, 주님은 그 어찌할 수 없는 한심한 무리를 십자가 위에서도 불쌍히 여기시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어찌 하느님의 아들이시라 아니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3.

 

바울이 당한 고난은 또 어떻습니까. 어떤 이들은 바울의 선교를 지중해 크루즈여행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바울의 선교는 실상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투쟁의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사도행전 23장에는 40명이 넘는 유대 사람들이 모여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23:12-14) 그들은 바울을 가리켜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24:5)라고 칭하면서 그를 잡아 죽이는 일을 자기들의 종교적 순결을 지키기 위한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교 여행 내내 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절 이하에서 바울은 자기가 당한 고난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도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함과 이방 사람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린도후서 11:23b-29)

 

바울의 고난은 단순히 모험에 따른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여행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이유에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바울의 선교는 로마제국과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질서를 해치는 반란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박해한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과 똑같이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잡아 가두고 때리고 박해하는 일이 로마제국과 유대종교를 위한 일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예수와 바울을 박해한 이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자기종교중심주의 등의 이념에 함몰되어 그 가치를 고수하는 일을 신앙보다 우위에 두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철저한 사람이었느냐 하면, 바울을 때릴 때도 율법에 맞게 때렸습니다. 기왕에 때릴 거 왜 마흔 대를 채워 때리지, 왜 마흔에서 하나를 감한 서른아홉 대를 때리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율법에 매를 마흔 대가 넘도록 때려서는 안 된다”(25:3)고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악행을 하면서도 율법대로악행을 하는 것이죠. 일단 율법을 준수하면 정의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더라도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나아가 유대인만이 아닌 모든 민족을 하느님께 구원하신다는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바울을 죽이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직무태만으로 여겨질 법도 합니다.

 

4.

 

바울도 회심 이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여겨 그들을 박해하고 잡아들이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고, 헬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자기 열심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신의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사울은 이제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일에 일생을 바치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저 위에서 바울이 열거한 고난은 시대의 편견과 사람들의 자기중심성이라는 거대한 우상과의 맞서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랑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위대한 정신 승리의 흔적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온갖 고난을 이기고 예수의 길, 사랑의 한길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위로와 능력에 힘입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는 능력, 곧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음을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중략)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린도후서 4:1, 7-10)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인 로마서 5장의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바울의 자기고백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니 웬일입니까? 다른 이들의 인정이 아닌 하느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 더 크신 분의 인정에 자기를 의탁했기에 가능한 말이 아닙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바울의 고백은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와 깔뱅과 웨슬리, 그리고 20세기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에 이르는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 의해 계속 재해석되면서 신앙의 핵심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 교리의 핵심인 즉 인간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다른 이들의 인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히 지금 지배질서의 혜택을 누리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기득권을 지닌 이들의 인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롭다 칭하심에 의한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아마 바울이 당대에 로마제국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박해를 받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바란 사람이었기에 그의 의화론은 의미가 있습니다.

 

5.

 

나아가 바울은 환난의 의미를 재해석합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환난은 신의 징벌을 의미했습니다. 율법을 잘 따르고 섬기면 야훼께 축복을 받고, 율법을 위반하고 경시하면 야훼께 저주를 받되 자손 대대로 그러하다는 신념을 그들은 오랫동안 간직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환난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이른바 계몽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말을 인생의 교훈이자 당연한 말로 받아들이지만, 실상 바울의 이 말은 삶의 고난과 고통을 대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해석의 산물입니다. 오늘날에도 타락한 종교는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미성숙한 이들을 여전히 교회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으로 인과응보의 믿음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거짓 신앙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랍시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오늘의 현실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바울의 때에 환난을 하느님의 징벌이 아닌 희망을 잉태하는 씨앗으로 본 것은 분명 전복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포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5:32)는 예수님의 말씀과 통하는 선언입니다. 여러분,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이들이 누구입니까? 자기신념에 충실한 이들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신념보다 더 큰 사랑의 법 앞에서 그동안 자기가 목숨처럼 여겨 온 그 신념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라야 하느님나라에 들어갑니다바울처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그런 새로 봄의 체험 없이, 백날 믿습니다.’를 외쳐봐야 헛수고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로 저처럼 목사가 되거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의 직분을 맡아 교회의 외적 권위를 덧입으면 덧입을수록 구원받은 삶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직분을 맡아 주의 일에 충성해야 할 사명을 받은 이들은 사랑을 향해 눈 떠야 합니다. 율법이 아닌 더 큰 사랑의 법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시대이념에 사로잡힌 가치판단의 벽을 넘어, 하나 되게 하시는 하느님을 향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6.

 

바울은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이 드문 현실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곱씹을수록 참 위대한 정신의 승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남들이 다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막상 내가 편들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남들이 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을 향해, 그의 편에 설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확고한 가치판단이 흐릿해진 이 시대 진리와 정의를 위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까요. 저는 중오필찰의 신중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여전히 정의의 편에, 진리의 편에 서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길에 나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정의이고, 저것은 불의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나는 정의고 너는 불의라는 이분법의 특을 과감히 벗어던지면서도, 여전히 정의의 편에, 여전히 진리의 편에 서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편의 온전한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길야말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요, 사도 바울이 간 길이요, 예수와 바울을 따라 진리의 길에 나선 사도들과 성도들의 길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 길은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붙잡는 길,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난 앞에서 움츠러들거나 도망치지 않고, 그것을 희망의 씨앗으로 담대히 받아들이는 사람의 길입니다. 이 위대한 정신의 길이 바로 예수사랑의 길, 너와 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복음을 안고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으로 우뚝 서길 바랍니다. 우리 가는 길에 때로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다 하더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갈 길을 포기하지 않고 나서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나설 때에 성령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언제나 우리와 동행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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