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주님을 모시는 사람 (2017.7.2.)

2017.07.02 12:53

홍목사 조회 수:30

주님을 모시는 사람

 

본문: 시편 13:1-6; 마태복음 10:40-42

설교: 홍정호 목사 (2017.7.2. 성령강림 후 제4)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17년 절반이 지나고, 7월의 첫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스치듯 지나가버리고 맙니다만, 그렇게 스쳐간 시간들이 쌓여 나와 우리의 오늘이 됩니다. 그냥 흘러가는 것 같지만, 시간은 결코 그냥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은 삶의 흔적을 남기고, 때로 뚜렷한 자국을 새기며 인생을 가로지릅니다.

 

경험이 반복되면서 쌓인 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그런 고정관념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먼지가 내려앉듯 쌓인 시간의 흔적을 한두 번의 예외적 경험으로 지워버리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일의 충실함,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지금 이 순간의 충실함이 중요한 건 그 때문입니다. 지금 하지 않는 실천은 대개 나중에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일은 나중에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귀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존중과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쌓여야 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 같은 시간이 쌓여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13:24-31)를 들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농부는 자기 밭에 밀알이 자라도록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햇빛과 비의 은총을 누리며 자랍니다. 종들은 밀밭에서 가라지가 자라는 것이 이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뽑아버릴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은 그냥 놔두라고 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주인의 관심은 가라지가 자라지 않는 데 있지 않고, 밀이 잘 자라는 데 있습니다. 추수할 날에 이르면 밀알은 익어 농부의 곡간에 거둬들이겠지만, 가라지는 뽑혀 불태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타인을 존중과 연민의 태도로 대하는 아름다운 존재의 씨앗을 우리 안에 심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원수가 와서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헛된 욕망의 씨앗을 우리 안에 뿌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두 본성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하느님 심어주신 사랑의 싹도 자라고, 원수가 뿌리고 간 미움과 부정의 싹도 자랍니다. 우리는 밀알과 같은 사랑의 싹만 자라게 하고, 가라지와 같은 미움과 시기와 부정적 감정의 싹은 깨끗이 뽑아버리고 싶어 합니다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인은 밀과 가라지 모두를 그냥 놔두라고 말합니다.

 

가라지를 예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은 밀알이 풍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라지와 같은 온갖 부정적 요소들이 우리 삶에서 말끔히 뿌리 뽑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은 그런 것들대로 놓아둔 채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추수 날 주인의 관심은 가라지가 아닌 알곡에 있습니다. 가라지가 얼마나 크게 자랐느냐는 주인의 관심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어차피 잘라서 태워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관심은 오직 밀알이 어떻게 익었는지, 알곡이 어떻게 자랐는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입니다만, 대개 사랑이 클수록 미움도 커지고,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커집니다. 미움이 자랄까 두려워 사랑하지 않고, 실망할까 두려워 기대하지 않는 건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게으른 종이나 하는 일이고, 훗날 주님께 꾸중을 들을 일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우리는 미움을 피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사랑을 키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만큼 미움도 자라고,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자라겠지요. 그러나 부정적 감정들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됩니다. 가라지와 같은 것들은 자라든 말든 일단은 그냥 둬 보십시오. 가라지를 어떻게 뽑아버릴지를 고심하는 대신 더 많이, 더 진실하게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좋은 씨앗을 잘 자라도록 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사랑의 완성을 향한 경주에서 낙심을 이기고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람들에게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40)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오늘의 성직자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성직자를 맞아들이는 건 때로 영광스러운 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제나, 개신교로 하면 큰 교회 목회자를 자기 집에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건 초대하는 사람의 지위를 상징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제자들은 정말 보잘것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맞이한다고 해서 초대하는 이에게 돌아올 것이 별로 없는, 아니 때로는 그 맞아들임으로 인해 심각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대접(待接)과 접대(接待)라는 낱말의 뉘앙스가 좀 다르지요? 대접한다는 말과 잘 접대한다는 말의 용례도 다릅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두 낱말이 같은 한자를 앞뒤만 바꿔 사용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귈 ’(), 기다릴 ’()입니다. 사귐이 앞서서, 먼저 사귀고 뭔가를 기다리면 접대이고, 기다림이 앞서서, 먼저 기다리며 사귐이 깊어지기를 바라면 대접이 됩니다. 이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좀 더 의미부여를 해 보자면, 접대는 무언가 돌려받기를 기대하는 환대입니다. 말이 환대이지 실상은 교환입니다.

 

그러나 대접은 다릅니다. 대접은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환대입니다. 돌려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환대, 그것이 예언자와 의인을 맞아들이는 대접의 의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접은 기다리는 것이 앞서고 사귐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며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시간이 오는 이와 맞아들이는 이 사이의 사귐을 무르익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대접입니다. 그런데, 접대는 사귐이 앞서고 기다림이 뒤따릅니다. 사귐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 없이, 곧장 상대와 합니다. 접대는 대개 바깥에서 이루어지죠. 한두 번 만나 형님, 아우, 동생, 선배님, 후배님 하면서 모종의 실리를 추구하는 관계, 그런 관계에서는 진실한 사귐이나 우정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42) 그럼에도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을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만 받아들이려 합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맞아들이라고 한 사람은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받을 몫을 받으며 살아가는 있는 이들, 그래서 나에게 뭔가 돌려줄 것이 있는 그런 이들을 접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주는 사람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사시던 세상에서는 존귀하다 칭함 받는 이들이 온갖 풍요를 누렸음에도, 작은 자들은 대접은커녕 냉수 한 그릇도 얻어 마시기 힘들었습니다. 대접은커녕 그들을 집으로 맞아들인다는 것만으로도 유대인들과 로마인들로부터 너희도 한 패거리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감벤이라는 철학자는 이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일컬어 호모 사케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해 아무 때나 죽일 수 있지만, 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는 존재가 호모 사케르입니다.

 

예언자와 의인은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홀대받기 일쑤입니다. 일전에 같은 본문으로 설교할 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도 흑인 민권운동을 할 때는 동료들과 양심적인 백인 지성인 성직자 그룹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지만, 그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평화와 사랑의 가치를 말하는 데 이르렀을 때 그는 논쟁에 휘말리며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비난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예언자와 의인을 맞아들이는 것, 그것은 여전히 논쟁 가운데 있는 일에서 정의의 편에 함께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당면한 어려움에 공감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건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은 예언자와 의인을 맞아들이는 대신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 그들의 훌륭한 행적을 기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을 존경하고, 그분을 기념하고, 설교단이나 대학 강단에서 그분의 업적을 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의 정신을 계승하는 이들, 아직 살아 있는 예언자와 의인, 지금 약자들의 편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 세상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이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사시던 세상, 그리고 오늘 우리가 제자로 파송 받은 세계의 현실입니다.

 

4.

 

여러분,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이미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는데,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모실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을 모시기 원한다면 주님의 뜻 행하는 이를 주님 모시듯 하십시오. 주님을 모시는 건 지금 여기에서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처럼 섬기고, 주님처럼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위해 힘쓰는 이들의 소중함을 알아주고, 그들을 격려하고, 마음과 물질로 지원하는 일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냉수 한 잔을 건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모시는 길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중계하기 위해 있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예언자와 의인에게 냉수 한 잔을 건네는 일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촉구하고, 힘을 모아 작은 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기 위해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한 도덕 가운데 주의 종을 잘 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말이고, 때로는 목사 대접을 잘 하라는 식의 윽박지르기 용으로 오용된 말이라 어떤 이들에게는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강조해 온 주의 종을 잘 섬기라는 말은 목사를 잘 섬겨야 한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의 뜻 행하는 이들을 잘 섬기라는 말입니다. 거친 세상에서 생업도 미뤄두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투신한 이들의 존재가 귀한 줄 알고, 그들을 정성껏 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하는 것처럼 그들을 박해하고 쫓아내는 공간이 아니라, 극진히 모셔 더불어 하나님 뜻을 이루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뜻입니다. 그것이 주의 종을 잘 섬기라는 교회의 도덕 속에 새겨진 본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웃에 대한 접대(接待)’를 넘어 이웃을 진정으로 대접(待接)’하는 공동체로, 그리고 마지못해 대접하는 것을 넘어 기뻐하며 대접하는환대(歡待)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일상에서 연습하고 실천하기 위해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환대를 연습하는 정신의 도장, 환대가 생각과 몸과 마음의 습관이 되도록 훈련하는 삶의 각축장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나도 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나도 가기 위해 힘쓸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 우리 영혼의 밀알이 영글어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는 대신 밀알이 잘 자라도록 힘쓰십시오. 주의 일에 힘쓰는 주의 종들을 성심껏 섬기고 맞아들임으로써 예언자와 의인에 길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의 한 주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43 공생(共生)의 길 (2017.7.23.) 홍목사 2017.07.23 5
742 순례자의 길 (2017.7.16.) 이원로 2017.07.17 9
741 문화종교를 넘어서 (2017.7.9.) 홍목사 2017.07.09 98
» 주님을 모시는 사람 (2017.7.2.) 홍목사 2017.07.02 30
739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017.6.25. 청년헌신예배) 이원로 2017.06.26 29
738 희망의 사람 (2017.6.18.) 홍목사 2017.06.18 45
737 주님의 대사 (2017.6.11. 삼위일체주일) 홍목사 2017.06.12 23
736 성령으로 충만하게 (2017.6.4. 성령강림절) 홍목사 2017.06.04 35
735 그들도 하나 되게 (2017.5.28. 승천주일) 홍목사 2017.05.28 36
734 사탄을 이기는 사랑 (2017.5.21.) 이원로 2017.05.22 36
733 누구의 자녀인가 (2017.5.14. 어버이주일) 홍목사 2017.05.15 38
732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2017.5.7.어린이주일) 홍목사 2017.05.08 34
731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2017.4.30.야외예배) 홍목사 2017.05.01 50
730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교회의 중심 (2017.4.23. 창립 35주년 기념주일) 이원로 2017.04.23 49
729 갈릴리로 가자 (2017.4.16. 부활절) 홍목사 2017.04.17 38
728 망하는 은혜 (2017.4.14. 성금요일) 홍목사 2017.04.17 26
727 겟세마네의 기도 (2017.4.9.) 홍목사 2017.04.10 39
726 참사람의 길 (2017.4.2.) 홍목사 2017.04.02 43
725 참으로 눈 뜬 사람이고자 (2017.3.26.) 홍목사 2017.03.26 65
724 빌라도의 판결 (2017.3.19.) 이원로 2017.03.21 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