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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共生)의 길 (2017.7.23.)

2017.07.23 17:39

홍목사 조회 수:76

공생(共生)의 길

 

본문: 시편 139:1-12; 마태복음 13:24-30

설교: 홍정호 목사 (2017.7.23. 성령강림 후 제7)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붙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은 밭에다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 원수가 몰래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가라지는 마태복음에만 단 한 번 등장하는 식물입니다. 가라지가 어떤 식물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을 뽑아 버릴까요?” 하는 일꾼들의 말로 미루어 볼 때, 밀 수확에 도움이 안 되는 식물이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은 가라지를 그냥 잡초(weeds)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가라지가 독보리(darnel)라는 화본과식물의 일종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독보리라고 해서 독이 있는 식물은 아니랍니다. 다만 곰팡이 균에 취약해서, 감염된 독보리를 먹으면 구토와 설사, 현기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 맛도 쓰기 때문에 밀에 섞이면 밀가루의 맛도 떨어뜨린다지요. 그렇기 때문에 농부는 이런 독보리가 밀에 섞여 수확되는 걸 막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 가라지 독보리가 자라나는 동안에는 밀과 생김새가 유사하여 분간이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능숙한 농부라 하더라도 밀 속에 섞여 자라는 가라지를 분간하여 뽑아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비유 속 주인의 염려에도 이런 어려움이 배어있습니다. 그러나 다 자란 가라지는 밀과 그 모양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가라지는 곡식이 다 익어도 열매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기 때문에 식별이 더 쉽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가라지 독보리가 밀 가운데 자라게 된 것은,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주인의 뜻이 아닌, 원수가 한 일입니다.

 

2.

 

이 비유의 목적은 추수 때 뽑혀 불에 던져질 가라지의 운명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비유의 초점은 가라지가 마지막 날에 뽑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비유의 초점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같은 밭에서 함께 자라도록 놓아두신다는 데 있습니다. 같은 비유이지만, 강조점을 어디에 두고 읽느냐에 따라 메시지는 전혀 달라집니다. 좀 더 얘기를 해 볼까요.

 

여러분, 야생 조류의 습성 가운데 탁란(Brood Parasitism)이라는 게 있습니다. 알을 자기 둥지에 낳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낳아서 다른 새로 하여금 자기 새끼를 기르게 하는 방식입니다. 일전에 KBS환경스페셜에서 <야생의 번식 전략, 탁란>이라는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탁란을 하는 대표적 조류로 뻐꾸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어미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습니다. 둥지의 어미새는 그 알이 뻐꾸기가 몰래 낳고 간 알인 줄 모르고 정성을 다해 알을 부화시킵니다. 그런데 시청자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남의 둥지에서 태어난 뻐꾸기 새끼는, 그 둥지의 다른 새끼들, 그러니까 진짜 어미의 알에서 갓 부화한 진짜 새끼들을 온 힘을 다해 둥지 바깥으로 밀어내 모두 죽입니다. 어미새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있는 건가요? ,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뻐꾸기의 본성이고, 뻐꾸기가 생존을 지속해 나가는 자연스러운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뻐꾹 소리가 듣기 싫어지시지요?

 

그런가하면, 야생에는 다른 생존의 방식도 있습니다. 남극에 서식하는 황제 펭귄의 방식입니다. 영하 40도를 밑도는 맹렬한 추위 속에서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황제 펭귄은 65일간 수천 마리가 꼼짝 않고 힘을 합쳐 서로에게 바람막이가 되어 줍니다. 맨 바깥에서 칼바람을 맞는 펭귄들의 위치를 바꿔가면서, 황제 펭귄은 남극의 혹독한 추위를 함께 이겨 나갑니다. 만약 황제 펭귄이 뻐꾸기처럼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습성을 지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찍이 멸종되었을 겁니다. 그것은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길이죠. 그런데 황제 펭귄은 남극의 추위 속에서 생존해 나가는 방식으로 공존(共存)을 택한 것입니다. 나 하나 살겠다고 무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곧 모두의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먹이를 두고 다투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는 적이라 하더라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 살을 맞대고 설뿐만 아니라, 극한의 고통을 분담해 나가는 방식을 상호간 익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원수라고 해서, 가라지 독보리와 같은 존재라고 해서 미련 없이 잘라내 버리면,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생명의 결실이 여물기 전에 함께 망해버리고 맙니다.

 

3.

 

논어 자로(子路) 편에서는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 했습니다. 군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다르지만 ()하는 사람이랍니다. 서로 다른 음이 겹쳐져 화음(和音)이 되고 조화(調和)를 이뤄내는 것처럼, 군자는 같지 않다고 해서 잘라내고 쳐 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르지만 조화를 이뤄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소인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같은 것을 두고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랍니다. 결국에는 다 같은 것인데도 자꾸만 다르다고 하고, 이편저편을 가르면서 불화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소인이라는 겁니다.

 

뻐꾸기나 황제펭귄이나 다 하나님창조의 본성에 맞게 살아가는 게 아닙니까? 뻐꾸기가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황제 펭귄의 방식은 감동을 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도덕과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이 존재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때로는 견디기도 하면서, 공생을 위해 노력해야 할 뿐이라고 봅니다.

 

생태계에서 생명이 군집을 이루는 방식이 크게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경쟁(competition)입니다. 비슷비슷한 개체들끼리 먹이를 두고 다투고 싸우면서 살아가는 방식이죠. 둘째는 포식(predation)입니다. 먹고 먹히는 관계죠. 힘 센 놈이 약한 놈 잡아먹고, 약한 놈은 잡아먹히는 걸 자연의 이치나 운명으로 여기며 사는, 그런 군집 내 상호작용의 방식입니다. 세 번째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방식입니다. 바로 공생(symbiosis)입니다. 공생하면, 함께 사는 거니까 좋겠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공생의 방식도 하나가 아닙니다.

 

생물이 다른 생물과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방식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답니다. 첫째는 상리공생(相利共生, mutualism)입니다. 말 그대로 공생하는 것이 서로 이익이 되는 관계입니다. 인간과 장내 유산균의 관계,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가 상리공생의 예입니다. 둘째는 편리공생(片利共生, commensalism)입니다. 한쪽은 이익이 되지만, 다른 한쪽은 이익도 손해도 없는 경우에 이를 편리공생이라고 부른답니다. 해삼과 바닷게의 관계가 대표적이라고 하죠? 바닷게는 해삼의 등에 올라붙어 손쉽게 이동할 수 있고, 때로 적으로부터 보호도 받지만, 해삼은 별다른 이익도 손해도 없는 그런 관계가 편리공생 관계입니다. 셋째는 기생(寄生, parasitism)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한쪽 생물이 다른 생물의 양분을 뺏는 등의 해를 입히며 살아가는 관계가 기생입니다. 그래서 기생하는 생물 뒤에는 벌레의 혐오감을 나타내는 ()이라는 낱말이 따라붙곤 합니다. 기생충. 마지막은 편해공생(片害共生, amensalism)입니다. 이것은 편리공생과 반대의 경우로서 생태계에서 매우 드문 공생의 방식이라고 합니다. 한쪽은 명백한 피해를 보지만, 다른 한쪽은 피해도 이익도 없는 관계의 경우가 편해공생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밭에서 자라는 밀과 가라지의 경우에는 생태계의 군집방식 가운데 어떤 관계에 해당될까요? 같은 밭에서 양분을 두고 다투니 경쟁관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공생관계라고 한다면 밀의 입장에서는 상리공생이라기보다는 편리공생이나 기생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비유 속 주인은 가라지를 발견하고 당장에 뽑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눈 밝은 농부들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존재방식을 경쟁이나 포식이 아닌, 공생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비유 속 주인이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의 공존을 택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나중에 가라지가 불타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게 이 비유의 핵심이 아니라, 가라지 같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들과도 공생을 통해 하나님창조의 질서를 더욱 풍성하게 해야 할 사명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사명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위해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이라고, 저는 읽습니다.

 

4.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의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라는 책에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은 이성도 아니고, ‘지능도 아니고, 심지어 마음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도구를 제작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아닌 침팬지도 갖고 있는 능력입니다. 지능은 이제 곧 AI에게 추월당할 겁니다. 마음도 일종의 호르몬의 화학작용이라고 할 때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말할 여지는 점점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은 무엇인가? 유발 하라리는 이야기를 통해 무수한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 내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실재가 아닌 허구, 곧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주제에 걸맞게 말씀을 드린다면, 인간만이 다른 존재와 이야기를 통해 공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생태계의 다른 종은 경쟁과 포식을 알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다른 존재와 공생하는 법을 익혀 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 이후(Post-Human) 시대에도 여전히 가치 있게 만들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격언, 군에 다녀온 남자 분들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겁니다.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생각할 때 더욱 절실히 다가오는 격언입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힘에 힘으로 맞서는 능력 말고, 타자를 경쟁이나 포식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능력 말고, 다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공존하는 능력입니다. 독일의 평화학자 디터 쟁하스(Dieter Senhaas)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의 오랜 격언을 우리시대의 금과옥조로 되새기는 대신,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pacem)는 격언을 우리시대의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준비해야 합니다.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통해, 평화를 평화적 수단으로(peace by peaceful means) 이루는 방식을 고민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평화를 원해서 평화를 준비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두는 세상입니다. 가라지를 뽑아버리면 시원하고 좋습니다. 도움도 안 되고 해악만 끼치는 가라지는 뽑아 버리는 것이 마땅한 일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주인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가라지가 좋아서 그냥 두는 건 아닙니다. 가라지의 본성을 몰라서 놓아두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두는 공생의 길이,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린 주인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5.

 

함께 사는 법을 익히고, 손해보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타자를 귀한 존재로 여길 줄 아는 평화의 연습을 위해 가라지가 가라지로 다 자랄 때까지 그냥 두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우리가 미리 뽑아내지 않아도 다 자라면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붙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고 말합니다. 가라지를 그냥 두는 것은 가라지가 아닌 밀과 같은 주님의 자녀들을 위함입니다. 그들로, 공생의 기쁨과 보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타자와 더불어 사는 삶이 어려운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비록 그가 나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일지언정, 그 가시와 더불어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기쁨과 감사로 채워나가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가라지는 가라지로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길은 경쟁과 포식이 아닌 공생의 길입니다. 비록 상리공생이 아닌 편리공생, 편해공생, 심지어 기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경쟁과 포식이 아닌, 공생의 길을 우리 신앙의 길로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줄 믿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구분은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린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일꾼들에게 맡겨 두십시오. 가라지는 뽑아내지 않아도 마지막 날에 뽑혀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한 연습, 공생의 길을 진실하게 모색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