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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하시는 일 (2017.8.20.)

2017.08.20 12:32

홍목사 조회 수:76

하느님이 하시는 일

 

본문: 창세기 45:1-15; 마태복음 15:21-28

설교: 홍정호 목사 (2017.8.20. 성령강림 후 제11)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제 곧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하는 말이라고 하시고, 이렇게 말씀을 드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체하지 마시고, 저에게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는 고센 지역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여러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더 계속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께 딸린 모든 식구가 아쉬운 것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하고 여쭈십시오. 지금 형님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요셉임을 형님들이 직접 보고 계시고, 나의 아우 베냐민도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형님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누리고 있는 이 영화와 형님들이 보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다 말씀드리고, 빨리 모시고 내려오십시오.” 요셉이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얼싸안고 우니, 베냐민도 울면서 요셉의 목에 매달렸다. 요셉이 형들과도 하나하나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제야 요셉의 형들이 요셉과 말을 주고받았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저 멀리 시에라리온의 산사태로 속절없는 죽음을 당한 이들, 스페인 바르셀로나 테러로 희생당한 이들, 철원 포병부대 사고로 목숨을 잃고 다친 장병들과 그 가족에게도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번 주 교회력에 따라 창세기 말씀을 앞에 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널리 퍼진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다라는 말을 한바 있습니다. 삶에서 당하는 고통은 제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결되기도 하고 잊혀 지기도 합니다. 때로, 느닷없이 다가오는 고통은, 그 고통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뜻밖의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성공은 적을 얻지만, 실패는 친구를 얻는다.”는 말이 있지요? 뜻하지 않은 시련과 고난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선물을 가져오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열 수 없었던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전 10:13)

 

2.

 

성경은 의미로 충만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의미의 원천을 통해 삶의 고통을 설명하고,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용기 있게 넘어서기 위한 의지로 충만한 책입니다. 성경은 성공한 사람들, 높은 도덕성을 지닌 이들, 그리고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선별적으로 전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는 책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가져간다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삶을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끊임없이 결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삶을 닮은 책입니다. 아름답지만도, 기쁘지만도,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도 않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기쁘고, 여전히 열정으로 넘치는 삶의 이야기가 담긴 책,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언약의 말씀을 믿는 이들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한 자기 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급진적인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온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런 주장은, 사람들을 죄와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할 율법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가져다주고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한 상황에서 유대교의 구원론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나 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에서 제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이들도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멸망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시는 분,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의 여러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믿음은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바라시는 분이라는 더 큰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3.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형들의 미움을 사 이집트로 팔려온 요셉은, 인고의 시간을 거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가족에게 버림받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요셉이 형들과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보고서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참 동안을 울었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바깥에 있는 이들도 다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셉이 지난 시간 얼마나 큰 설움을 겪으며 살아왔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곧이어 요셉은 형제들에게 다가가 말합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형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합니다. 그 가운데 요셉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눈치 빠른 형제가 있었다면, 두려움에 사색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잊지는 않고 있지만, 그들의 잘못을 탓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 안에 그들의 과오를 포함시키는 길을 택합니다.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 인고의 세월을 겪은 후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형들 앞에 선 요셉의 말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하는 표현입니다. 창세기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야곱의 가족 이야기 후반부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누구인가요?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28:15)는 약속을 축복의 언약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의 언약은 그의 아버지 이삭과,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의 언약을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지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12:2-3) 야곱의 가족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언약, 곧 그들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축복을 받는, 만백성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축복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의 가족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한 축복의 언약을 실현하기는커녕, 형제간에 반목하고, 급기야 시기심에 동생을 이국땅으로 팔아넘기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나온 얘기는 아닙니다만, 야곱의 가족은 아마 가족 내에서 정통성 경쟁을 벌이지 않았을까요? 누가 아브라함의 적통이냐, 누가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갈 약속의 자손인지를 두고 내적인 권력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일수록,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금송아지가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수록 정통성 논쟁을 벌이며 제살 깎아먹기를 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야곱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신 이유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축복하신 이유는, 그들의 가문이 융성해져서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라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만백성의 종이 되라는 것, 그들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문을 지켜주시는 이유입니다. 그 이유를 망각하고 자기 가족의 좁은 울타리에 안주하는 삶을 택했을 때 그들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는 요셉의 고백은, 표면적으로는 흉년에 먹을 곡식이 없을 것을 대비해 자기를 여기에 보내셨다는 뜻이겠지만, 그 깊은 뜻에서는, 야곱 가문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일로 부름 받은 이들인지를 다른 가족에 앞서 일깨우기 위해서 여기에 보내셨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요셉은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이들을 위한 축복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만백성을 위한 복음, 그것이 성경이 초지일관 말하고 있는 대의(大意)입니다. 이렇게 만백성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문을 축복하신 것처럼, , 우리가족, 우리고향, 우리학교, 우리교회, 우리나라, 우리민족이라는 테두리가 주는 자기만족적 안락함에 머물지 말고, 만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길에 나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시대에는 어떻게 부르나요? 자기중심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학벌주의, 교파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자민족중심주의입니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할 테두리를 만들고 벽을 쌓는데 골몰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성경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 우리는, 이런 배타적 테두리들이 복음적 가르침에 앞서는 것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를 축복하셨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요셉의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4.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일 당신이 그분을 이해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si enim comprehendis non est deus)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고 싶은 것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삶이라면, 믿음 안에 사는 삶은 이 이치를 얼마간 거슬러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쓴 것을 다 삼키면 탈이 나겠죠. 지혜롭게 분별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당장에 이해할 수 없고, 당장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 인생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미우나 고우나, 달거나 쓰거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인고의 세월 동안 자기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이들을 탓하거나, 그들을 원망하며 복수의 칼을 가는 대신, 자기의 미움과 원망을 더 큰 인내와 사랑으로 극복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찬송가 436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3절 가사가 꼭 요셉의 고백 같습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주님은 좋으신 분,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그분으로부터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이 한 주간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