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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성사(聖事)

 

본문: 출애굽기 17:1-7; 빌립보서 2:1-13

설교: 홍정호 목사 (2017.10.1. 세계성찬주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세계교회가 성만찬을 나눔으로 주님의 한 몸임을 기억하는 세계성찬주일입니다. 기독교신앙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원하는 이들의 스승이시요, 또한 그들의 길동무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유린당한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는 예언자이시며,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상처 입은 이들의 치유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들을 포괄하는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중요한 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신 분이라는 고백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은 화해의 성사(聖事)가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신 분입니다. 화해의 성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여기에 동참할 것을 반복적으로 다짐하며 행하는 의례가 바로 성만찬입니다. 세계성만찬주일을 맞아 한 달에 두 번 거행하는 우리의 성찬의례를 돌아보며, 성찬의 의미를 되새기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을 내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핵심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님의 여러 모습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철저히 내어 놓는 순종하는 종의 모습으로 집약됩니다. 그분은 자기를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자 힘쓰셨고, 그렇게 자기를 비워내고 내려놓으신 만큼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개인자유권리를 주장하는 데 익숙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보전을 위한 무한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들, 집단화된 개인들이 각축을 벌이는 세계,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늑대인 그런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성취되는 예수님의 이 수동성(passivity)의 의미를,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도덕적 선함이나 주체성의 상실, 곧 나약함의 표지로 인식될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 시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묵상하고 새겨야 할 삶의 주제라고 저는 믿습니다.

 

자기를 내어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교회가 행해 온 두 가지 의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요, 다른 하나는 성만찬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삶을 새롭게 규정하고, 또 규정받습니다. ‘자기를 따라, 즉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바람을 따라 살아온 삶에서 돌이켜,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바깥에서 자기를 이끄는 어떤 힘을 의지하여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전환의 사건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는 참다운 시작입니다. 이전의 내 생명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시작이 바로 세례입니다.

 

종교는 무엇보다 정신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제도와 규율로 짜여있다 하더라도, 종교의 본질은 그 추구하는 정신에 있습니다. 세례의 본질도 그 제도나 규율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례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려는 의지 없이 의례적으로받는 세례에 만족하는 것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의 축적이나 성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6:3).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의 옛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고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우리 개신교가 세례명을 없애버린 것을 참 아쉽게 생각합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옛 이름으로 계속 불린다는 것은, 일상과 신앙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지만, 세례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세속화해 버릴 우려가 큽니다. 또한 세례 받을 때에 받은 새 이름(세례명)에 따라 영명축일을 지키지 않고, 그냥 생일을 축하하는 것도 아쉽습니다. 육신의 부모님께서 낳아주신 날을 귀히 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명축일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좀 더 분명히 새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리교회가 지키는 교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시공간을 살아가면서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시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교회력을 따릅니다. 세례명과 영명축일도 교회력을 따른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개신교와 가톨릭이 그리스도교의 한 형제로서 좋은 점을 서로 많이 배우고 있는데, 100년쯤 더 지나면, 개신교가 교회력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듯. 세례명과 영명축일의 중요성도 재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참다운 시작이요,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에 입문하는 의례로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3.

 

자기를 내어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교회가 행해 온 또 하나의 의례는 바로 성만찬입니다. 세례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삶의 출발을 상징하는 의례라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놓인 가치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며 그렇게 살기를 반복적으로 다짐하는 의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셨듯이,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 이들이 그분처럼 자기를 내어주는 삶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는 의례가 바로 성만찬인 것입니다.

 

성만찬에 관한 오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만찬을 자기의 허물을 씻는 대속의 의례로만 여기는 태도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써 자기의 죄를 사함 받고, 깨끗해진다는 믿음입니다. 만약 이렇게 자기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성만찬의 목적이라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가르치는 개신교에 있어 성만찬은 이단적인 게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성만찬에 참여해서 죄 사함을 받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의 의미는 자기의 허물을 씻는 대속신앙 너머에 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만찬은 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믿음으로! - ‘을 의롭게 여기는 길에 동참하고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일갈은 성만찬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흰 손>이라는 극시의 한 구절입니다.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이야,/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뱃을 것 아니냐? (중략)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도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함석헌, “흰 손,” 함석헌전집23, 431.) 성만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이는 주님의 몸입니다. 이는 주님의 피입니다.” 하는 선언에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 우리의 손이 흰 손이 아니기를, 주님의 못 박힌 손이 우리의 손이 되겠다는 다짐에 아멘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관한 또 다른 오해는, 그것이 친교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있어 친교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더욱이 이 때 말하는 친교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 생각과 형편이 같고, 그래서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이들과의 친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원수와의 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듯이, 그분의 찢긴 몸과 피를 받아 모신 이들은, 원수를 위해 그분이 하신 일을 우리고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세우신 예수님의 사랑의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이란, 단지 친교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와 이웃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의 성사를 이루겠다는 다짐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하고,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은총을 나누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통해서만 성만찬의 친교는 완성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례를 받지 않은 이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해 왔습니다. 세례 받지 않은 분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는 까닭은, 그들을 차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이 단지 교회의 이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안에서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세례의 중요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채 성찬에 참여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경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여하면서도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세례에서부터 그 본뜻이 사라지고 의례와 제도만이 남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세례를 통해 거듭난 삶을 다짐한 이들은, 성만찬을 통해 예수께서 이루신 화해의 성사를 일상에서 거듭해서 반복함으로, 주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책임이 배제된 자유, 신앙인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자유의 무한한 확대는 신앙 공동체의 병을 깊게 만들 뿐입니다.

 

4.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신 분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분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런 마음을 품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죽기까지 순종해서, 그래서 무얼 어쩌자는 것일까요? 삶이 화해의 성사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화해의 성사가 우리 삶에서 일어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냥은 안 되겠으니, 육신과 정욕으로 물든 우리의 옛 사람 가지고서는 이 일이 안 되겠으니, 십자가에서 죽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야겠다는 것입니다. 거듭날 뿐만 아니라, 성만찬을 통해 이것을 늘 기념하면서 화해의 성사를 이루는 삶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와 성만찬을 교회가 지속해 온 이유이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신앙의 근본으로 삼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화해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요, 화해의 성사를 이루라고 보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화해가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으로 압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지혜도 필요하고, 때로는 전략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화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화해를 사명으로 부여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미션(mission)입니다. 화해가 우리의 사명이고, 화해가 우리의 선교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도록 애쓰시면서 예수님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토록 씨름하셨던 것일까요? 그분은 자기를 내어줌으로 화평을 이루는 길의 막바지에 이르러 심히 괴로워하며 흔들리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이내 그분은 자기를 택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이 택하신 길이요, 우리가 택하기를 사모해야 할 길입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줌 없이, 화해의 성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밟히지 않고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는 것처럼, 자기를 내어줌 없이 나와 너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높이 쌓아올린 담장이 깨지고 무너져야 담장 너머에 있는 이웃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얼굴로부터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화해의 성사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며,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 안에 모실 때마다, 주의 길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그래서 온 인류를 한 가족으로 부르시는 화해의 성사를 이루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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