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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에 눈뜬 사람

 

본문: 시편 65:9-13; 누가복음 17:11-19

설교: 홍정호 목사 (2017.10.8. 추수감사주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그런 다음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살림살이를 통해 얻은 수확을 하느님께 가지고 나오며 은혜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땀은 정직합니다. 그러나 땀을 흘린다고 모두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농부의 땀이 때에 알맞은 햇빛과 비바람을 만나야 결실을 맺듯, 우리가 흘린 땀도 때에 알맞은 은총이 아니면 결실이 될 수 없었음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던 생명운동가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은 과장이 아닙니다. 쌀 한 톨이 익어 우리의 밥상 위로 올라오기까지는 씨를 뿌리고 돌보는 이의 수고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여러 보이지 않는 수고들이 조화를 이루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가 거둔 결실이, 남들이 보기에는 비록 쌀 한 톨에 불과한 초라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은총을 보며 감사드리는 눈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과 일행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사이에 위치한 그 어떤 마을은 사마리아이기도 갈릴리이기도 한 곳이자, 사마리아도 갈릴리도 아닌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사마리아인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주님께 소리 높여 말했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마리아 접경 지역의 나병환자였던 그들은 지극히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는 이방인이요, 육체적으로는 병자요, 종교적으로는 부정한 자요, 사회적으로는 채무자였습니다(박노훈, 神學思想 170, 149). 그들 사마리아의 나병환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던 약자 중의 약자였던 것입니다. 그런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그들은 감히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했습니다. 자신들을 향한 사람들의 폭력적인 시선에 짓눌리고 길들어, 이제 그들 스스로는 그 시선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약해진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보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한센병의 확진이나 치유의 판정이 제사장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입니다(13-14). 그들이 제사장에게 보내진 이유는, 당시에 나병환자는 단순히 아픈 사람이 아니라 부정한 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 의학적 이유가 아니라 종교적 이유에서 그들은 제사장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야 했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나병으로 확정된 이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반면, 치유되었음이 선포된 이들은 속죄의 제물을 바쳐 자신의 부정을 씻은 후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듯 제사장이 절대적 역할을 하는 시대를 사셨기에 그들 사마리아 나병환자들에게도 제사장에게 가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로 간 나병환자들은, 가는 동안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로 되돌아 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멸시 받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의 관습에 따르면, 은혜를 입은 자가 돌아와 은혜를 베푼 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1세기 로마 사회를 연구하는 이들에 따르면, 당시 사회는 크게 두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로마는 제국 전체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엘리트 계층과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비엘리트 계층으로 양분된 사회였습니다. 중산층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트 그룹 안에는 독특한 경쟁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누가 더 많은 기부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공건물의 건축이나 만찬, 공연 등을 위한 기부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이들 엘리트 그룹의 기부는, 사회적 지위와 명예, 특권 등의 다양한 형태로 다시 기부자에게 돌아와 그들의 사회적 계급을 더욱 공공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후원과 보호의 관계였습니다. 평민들은 소수 엘리트의 후원에 의존했고, 엘리트 보호자는 그 대가로 자신에 대한 충성을 받아들였습니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이라 할지라도 이전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이 당시의 당연한 문화였던 것입니다(박노훈, 앞의 논문, 자유롭게 인용, 특히 148).

 

이런 사회 문화 속에서 병의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 병자는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표했습니다. 여기서 감사는 경제적 보상이기도 하고, 충성을 표하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치유라는 행위에 이렇듯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것은, 당시 문화 속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신 건 이러한 문화를 전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게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나머지 아홉 사람에게도 감사를 받아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시 문화가 그러했으니, 나머지 아홉 사람에게도 마땅히 감사를 받아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사마리아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의 믿음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문화를 따라 마땅히 표해야 할 감사를 표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왔지만, 주님은 그를 다시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감사를 받을 사람은 당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당신은 은총의 도구로 계실 뿐임을 그에게 알려주시며, 마음에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돌아가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3.

 

병에서 고침 받은 이 나병환자는 주님께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주님이 나에게 충성하라고 하셨다면, 그는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며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고침 받은 그를 당신의 심복으로 만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당신의 몸에 손을 대고 고침받았을 때에도 그 여인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8:48) 또 여리고에 이르셨을 때에 눈먼 거치를 만나 그를 고치시고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42) 주님은 이렇듯 당신을 통해 일어난 일들의 영광을 당신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오롯이 하나님께 돌리셨습니다. 영광 받으실 분은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일평생 잊지 말고 살 것을 그의 가슴에 새겨 주셨습니다.

 

신학생 시절 어려운 신학생들에게 도서비를 준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저도 여러 번 그 장로님에게 도서비를 받아 책을 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그분이 누구이신지 모릅니다. 목사님을 통해 은밀히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에게 여러 차례 간곡히 부탁하셨답니다. 당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가난한 신학생들이 혹여 마음에 상처를 입지는 않을까, 그 장로님만 특별히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는 않을까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저는 그때 배웠습니다. 저는 지금껏 그 장로님이 누구이신지 모릅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장로님과 가정을 축복의 가문으로 삼아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런 장로님을 보며 자란 가정의 아이들이 잘못되겠습니까? 그런 장로님의 기도로 세워진 가문이 망하겠습니까? 작은 공로 하나도 자기에게 돌리는 데 익숙한 세상에서 큰 믿음의 모범을 본 것에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너를 고쳤다. 내가 너를 도와줬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니 너는 나에게 감사를 바쳐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서 가거라.” 하셨습니다. 돌아 온 그이에게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받은 만큼 무언가 돌려주어야 한다는 문화적 압박에 시달리는 가난한 나병환자에게 주님은, 그가 입은 은혜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베푼 이에게 돌아와 감사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갚을 수 있는 은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은혜는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그분의 크신 은혜를 갚을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갚을 수는 없어도, 감사의 마음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은총의 통로가 되는 삶을 택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당신의 영광으로 돌리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과 이웃을 돌보는 일에 나서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누가 지켜보면서 내 행위를 알아주고, 칭찬하고, 그래서 내가 명예를 덧입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를 얻든 못 얻든지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돌보아주신다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으로 족하다고 믿고, 우리는 받은바 은혜를 나누는 것으로 우리 몫을 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며 저와 여러분 모두 은총에 눈뜬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락 한 알에 온 우주가 깃들어 있음을 보는 눈이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돌아와 감사의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우리의 일을 다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얼마를 바치든, 얼마나 큰 열심을 가지고 헌신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만이, 오직 그것만이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의 길입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시면서, 은총에 눈뜬 삶을 향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의 순례의 길에 나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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