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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본분 (2017.12.10.)

2017.12.10 13:35

홍목사 조회 수:49

예언자의 본분

 

본문: 이사야 40:1-11; 마가복음 1:1-8

설교: 홍정호 목사 (2017.12.10. 대림절 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와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고 외친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11:7-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이 요한에게 가르침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

 

마가복음이 묘사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1:6)는 요한의 복장과 생활에 대한 모습은 열왕기하(1:8)에 묘사된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마가는 이를 통해 요한이 엘리야만큼 위대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예수님의 시대에도 잘 알려진 존경 받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북 왕국 아합 왕(기원전 869-850)과 그의 아들 아하시야 왕(기원전 850-849)의 통치 기간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시기는 아합 왕의 집안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내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던 때라고 어떤 학자들은 말합니다.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의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국제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서게 됩니다. 수십 년에 걸친 군사 및 경제정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아버지 오므리 왕 덕에 아합은 비교적 평화롭고 번창하던 시기에 왕좌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번영과 군사적 평화를 누리던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내적 취약성을 드러냅니다. 곳곳에서 바알숭배와 관련된 우상숭배가 횡행했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적 정책이 강화되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이야기, 아합과 이세벨이 거짓 증언을 통해 나봇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의 삶의 터전인 포도원을 강탈하여 그들의 정원으로 만든 이야기는 그 한 예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역사의 시기에 엘리야는 왕실에 대한 비판자로 나섭니다.

 

2.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구약의 예언자는 앞날을 예견하는 사람도, 사회정의만을 부르짖는 사람도 아닙니다. 권력을 무조건 비판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시대의 평형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역사의 어떤 시기에 예언자는 왕의 임명을 정당화하고, 왕의 상담자이자 양심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왕실의 관료(官僚)와 예언자의 이미지가 잘 중첩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예언자는 권좌에 앉은 사람이라고 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는 권력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 특별히 체제안정과 번영을 이유로 약자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 나갈 때 비판자로 나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덕이 많고 품이 넓은 왕들에게 예언자는 그들의 영적인 스승이자 상담자였고, 그들의 양심을 대변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민심을 거스르는 어리석고 악한 왕들에게 예언자는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또한 같은 왕이라 할지라도 어떤 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양심의 대변자가 되기도 하고, 가시 같은 비판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는 권력자의 부름을 받은 자로서가 아닌,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로서 자기의 정체성과 역할에 충실한 이들이었습니다.

 

물론 타락한 예언자, 거짓 예언자들도 있습니다. 예언자는 평형추이자 시대의 온도계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언자가 타락하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문제는 예언자를 자처하는, 이른바 주의 종을 자처하는 한 무리의 어리석은 성직자들의 타락에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언자가 타락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자기 본분을 잃어버리고 권력에 종노릇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무조건 하는 것만 종노릇이 아닙니다. 무조건 아니오하는 것도 종노릇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지 않고, 구미에 맞는 정권이나 인물에 따라 찬양일색이 되거나 비판일색이 되어버리는 것은, 부름 받은 사람의 본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아합에게 엘리야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요?” 아합에게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는 한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에 불과했습니다. 엘리야가 대답이 자못 서늘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아버지의 가문이 괴롭히는 것입니다.”(왕상 18:17-18a) 이 이야기가 나오는 열왕기상 18장의 바로 앞장인 17장에서, 엘리야는 가난한 사르밧 과부와 그 아들을 위로하며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이름이 마르지 않을 것”(왕상 17:14)이라며 축복했습니다. 그랬던 엘리야의 따뜻함을 바로 뒷장에 나오는 아합 왕 앞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왕 앞에서 선 그의 말은 서늘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아버지의 가문이 괴롭히는 것입니다.”

 

3.

 

이야기가 길게 돌아왔습니다만, 마가는 복음서를 읽는 그의 독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유대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을 보기 바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11:14)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을 닮은 세례자 요한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7-8)였습니다.

 

엘리야도, 세례자 요한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무리가 그들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언자로서의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산으로 광야로 자기의 몸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었습니다. 엘리야와 요한이 훌륭한 예언자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렇듯 본분을 떠난 자리에 곁눈질하지 않고, 외롭고 힘들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한길과 한뜻으로 살아간 때문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눈길을 주어야 할 곳에 눈길을 주고, 눈길을 거두어야 할 곳에는 눈길을 거두며 살 수 있었다고, 또한 믿습니다. 그러나 부름 받은 이로 살아가면서도 뜻을 쫒지 못하고, 이리 저리 자기 이익을 쫓아 살아가기에 삶이 때로 비루함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주님 오시는 대림절을 보내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4.

 

종종 언급드린 바 있는 미국의 교육가겸 사회운동가인 파커 팔머는, 민주주의는 갈등을 제도하는 마음의 습관이라고 줄곧 주장해 왔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제도이기에 앞서 자기와 입장이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때로 견디기도 하면서 갈등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일종의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이런 생각을 참 좋아하고, 생활 곳곳에서 참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민주주의가 마음의 습관이라고 말하는 파커 팔머가 경고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마음의 습관을 기르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포기하고 지레 좌절해 버리고 마는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 어느 집단에서나 절대로 변하지 않는 10~15%의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라고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도 이 10~15%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가 스스로 알고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주의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제도가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뜻이 있는 70~80% 사람들과 더불어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대신 그들을 넓은 품으로 품어 안고, 그 에너지와 열정으로 세상을 더 나은 장소로 바꾸기 열망하는 이들과 협력하라고 말합니다. 변화를 꿈꾸는 그들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꿈을 실현시켜 나가야 할 사명이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분의 전망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예언자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어떤 제도와도 동일시 될 수 없는 궁극의 지향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이 땅에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성질의 유토피아이기도 합니다. 유토피아라는 낱말 자체가 없는'(u) '장소'(topos)라는 뜻임을 알고 계실 겁니다. 유토피아와 같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어떤 체제와 결합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바람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 없는 장소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기도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를 통하여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기도하나, 예수님을 통하여기도하나 핵심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통치야말로 참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이고, 그분의 이름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에게도 인도하시는 참 이정표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좌절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앞에서 좌절하셨고, 견고한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세력들 앞에서 좌절하셨습니다. 공평과 정의의 세상을 향한 갈릴리 민중들의 열망을 비웃으며 그래 봐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를 보내는 이들 앞에서 좌절하셨고, 변화의 열망을 받아 안는 대신 구태(舊態)를 답습하는 이들의 견고함 앞에서 좌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사명을 다할 새 힘을 얻으셨습니다. 고뇌에 찬 기도를 통해, 그분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이들의 견고함에 좌절하여 하나님 나라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변화를 열망하는 이들의 꿈과 더불어 느리지만 한 걸음씩,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언자,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이들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5.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의 절기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절망은 새 희망의 꿈을 꺾지 못합니다. 이런 마음을 담아, 우리가 매년 대림절기에 부르는 결단찬송이 있습니다. 이계준 목사님 작사하신 임마누엘 주님입니다. 익숙한 가사입니다만,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예수 세상에 오시네

가난한 우리에게 새 기쁨 주시려

우리의 임마누엘 아기로 오시네

사랑의 기쁜 소식 우리 맘 넘치리

 

자비의 주님 예수 세상에 오시네

눈이 먼 우리에게 새 빛을 주시려

우리의 임마누엘 인자로 오시네

자비의 귀한 손길 우리 맘 넘치리

 

정의의 주님 예수 세상에 오시네

포로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

우리의 임마누엘 왕으로 오시네

정의의 선한 싸움 우리 몸 구하리

 

은혜의 주님 예수 세상에 오시네

주님의 크신 은혜 우리게 주시려

우리의 임마누엘 왕으로 오시네

은혜의 놀라운 힘 우리를 살리리

 

가난한 마음에 새 기쁨이 되시는 주님, 눈이 먼 이들에게 새 빛을 주시는 주님, 그리고 포로 된 이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대림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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