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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본문: 시편 98:1-9; 요한복음 1:1-14

설교: 홍정호 (2017.12.24. 대림절 제4, 성탄주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니,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성탄주일 아침 여기에 모인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비탄에 찬 시간을 보내고 있을 제천 화재 참사 유가족들에게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물리적인 시간도 그렇지만, 개인이 체감하는 시간은 더욱 그러합니다. 남들이 기뻐하는 때에 그 기쁨의 행렬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남들이 슬퍼할 때 홀로 기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며 사느냐, 어떤 가치를 삶의 궁극적 지향으로 삼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이때는 갈립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예수 나심의 소식이 어떤 이들에게는 기쁨과 희망의 소식이었는가 하면, 어떤 이들에게는 위협으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아니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예수 나심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테고,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 평범한 일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2.

 

요한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태초에 계신 말씀’(logos)으로 소개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전합니다. 여기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우리말의 헬라어 원어는 로고스입니다. 요한은 만물의 생성 원리를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철학의 개념인 로고스를 가지고 그 세계에 속한 이들에게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중국어성경에는 이 로고스로 번역했습니다. 太初有道道与神同在道就是神. 태초에 가 있었다. 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는 하나님이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노자 <도덕경> 1장은 道可道 非常道 라는 간결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를 말로 하면 말로 된 그 자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 내가 이제부터 에 대해 몇 마디 말을 할 텐데, 에 대한 내 말 자체에 얽매이지는 마십시오, 그보다는 내가 말을 통해 전해주려고 하는 그 뭔가가 있으니까, 그 뭔가에 가 닿도록 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입니다.

 

요한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소개한 것을 두고,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요한의 선언에서, 세계 창조에 관한 자연과학적 법칙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다른 분야에 전문지식이 있는 이들 가운데 유독 종교언어에 어두운 이들이 있습니다. 신앙 세계에 입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를 십 수 년 다니면서도 성서가 말하는 방식에 눈 뜨지 못한 이들을 만나면, 참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방식은 역설입니다. 성서는 다른 종교언어와 마찬가지로 역설을 통해 진리를 전달합니다. 역설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틀린 말인데, 깊이 생각해 보면 진실에 닿아 있는 말입니다. 노자의 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말에 매이면, 말 너머에 있는 진실에 닿을 수 없는, 그러나 말을 통하지 않고는 이르기 어려운 세계의 어떤 진실을 담아내는 말, 그것이 역설의 언어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9:48),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

 

어떻습니까? 제가 몇 구절만 인용했습니다만, 이 말씀들 가운데 단번에 이해되는 말씀이 있습니까?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는다니, 이해가 안 됩니다. 작은 자면 작은 자지, 어떻게 큰 자가 되나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니, 이 말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면 사이비 종교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듯 성서 언어에 눈 뜬다는 것, 종교언어에 눈 뜬다는 것은, 삶의 역설에 눈 뜬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말, 들리는 말, 스스로 경험했다고 확신하는 어떤 이들의 어리석은 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말이 지향하는 세계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추는 것, 그런 사람이라야 참으로 진리에 눈 뜬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3.

 

요한은 진리에 눈 뜬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어둠을 비추는 참 빛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참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으나,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분을 맞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의를 전하고, 거짓의 망령에 사로잡힌 이들을 종교지도자라며 추켜세우고, 예언자라며 추앙했습니다. 소수의 눈 뜬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시대, 그 세계 속에 살던 이들 다수는 예수께서 사람의 살과 피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존귀하신 분께서 그토록 초라한 곳에, 사람들의 관심과 발길이 미치지 않는 세계의 한 구석에서 새날을 열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있다면 그이는 누구보다 로마 황제일 것이요, 그가 아니라면 유대교의 높은 고위성직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시대의 통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계에 살면서 구유에 나신 보잘 것 없는 아기 예수가 세상의 구원자라는 고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식과 교양을 갖춘 자로서의 태도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스스로를 통치자로 여기는 자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세계의 질서를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1:12) 예수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는 눈 뜬 사람들, 예수라는 이름통하여드러나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보고, 그 나라를 위해 자기를 헌신하는 이들,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무조건 아멘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길거리 전도용 전단지의 한 구절이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통하여, 작고 연약한 이들 가운데에서, 그들과 더불어 새롭게 열리는 하나님나라의 새 역사를 보는 이들, 이름을 믿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야말로, 만물 생성의 근본이 되시는 로고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기뻐하고 축하한다는 것은, 이 역설에 눈 뜬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는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절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성탄절이야말로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새 역사가 이 땅에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곳에서 새날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펼쳐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참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이 역설에 눈 떠야 합니다. 복음이 진리를 말하는 방식에 눈 떠야 합니다. 그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 이긴다는 사실에 눈 뜨는 것입니다. 권력이 아니라 진실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로 이룬 왕국에 임하시는 분이 아니라, 정의를 굳게 붙잡는 이들,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들 가운데 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또 한 해의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올 해 성탄은, 우리 각 사람이 이러한 복음의 역설, 복음의 진리에 눈 뜨는 귀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눈 뜬 이들은 교만함을 버리고 진리이신 분 안에 더욱 굳게 뿌리내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 사람을, 그리고 우리의 작은 이 교회를 당신의 거룩한 일을 위한 귀한 일꾼으로 날로 든든히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각 사람과 가정, 그리고 교회 가운데 함께 하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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