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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나무 (2017.12.31. 송년주일)

2017.12.31 13:44

홍목사 조회 수:35

의의 나무

 

본문: 이사야 61:1-7; 갈라디아서 4:1-7

설교: 홍정호 목사 (2017.12.31. 송년주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바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나서서 너희 양떼를 먹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너희의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너희를 주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일컬을 것이다. 열방의 재물이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마음껏 쓸 것이고, 그들의 부귀영화가 바로 너의 것임을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 너희가 받은 수치를 갑절이나 보상 받으며, 부끄러움을 당한 대가로 받은 몫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땅에서 갑절의 상속을 받으며, 영원한 기쁨을 차지할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긴 시간을 지나 이제 올 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연초에 어떤 다짐으로 출발하셨습니까, 그리고 오늘은 그 다짐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혹은 멀리 와 계십니까. 송년주일 말씀을 묵상하며 한 해를 돌아보니, 올 한 해도 참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를 믿음 가운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신앙의 정도(正道)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은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와 같이 잠잠치 못했던 때가 많았고, 부침을 거듭하며 휘청거렸던 순간도 적지 않았습니다.

 

뿌리가 든든하다면 흔들리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리면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던 오규원 선생님의 시구처럼, 흔들린다는 것은 오히려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뿌리내릴 곳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 바람을 견디며 든든히 뿌리를 내릴 영혼의 대지를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가족도 좋고 친구도 좋습니다. 교회도 좋습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 가운데 날마다 든든히 뿌리내리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깊고 든든한 믿음의 뿌리가 저와 여러분 삶의 근본(根本)이 되기를 다시금 기도합니다.

 

1.

 

오늘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셨던 그 말씀입니다. 갈 바를 잃어버리고 살던 백성들을 향해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61:1-2)하는 것, 그것이 예언자 이사야의 일이었고, 공생애 초기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원하는 이들이 목표로 삼아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습니다. 그것도 인생의 근본을 뒤엎는, 뿌리까지 잘근잘근 씹어 허무만 남도록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책들을 너무 많이, 너무 오랫동안 읽어 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올바로보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바른 말이라는 말들이 유치하고 시시하게 들릴 때가 참 많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도록 만드는 힘에, 들리는 말보다 들리도록 만드는 효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아주 피곤한 삶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바깥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홍 목사님은 어떻게 목회를 하세요?” 입니다. 질문의 뜻인 즉, 하는 말을 보아하니, 전형적인 목사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어떻게 목사를, 그것도 담임목사 노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제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를 잘 못합니다. 좋은 교인들 만나서 그나마 하고 있어요.” 요새 학생들 쓰는 급식체로 말하면, “인정? 어 인정이겁니다.

 

느닷없이 제 얘기를 드린 건 송년주일을 맞아, 우리 신앙의 근본 자리를 돌아보자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도 책 많이 읽으시는 줄 압니다. 아마 저보다 복잡하면 복잡했지, 덜 복잡한 삶을 살고 계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진다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는 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지는 만큼 몸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니, 대개는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많이 알고,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힘듭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선생님보다 알고 경험한 게 많은데, 예수님께 한 수 가르쳐 드려야지 뭘 배우겠습니까? 지식이 쉬이 교만이 되는 것은, ‘내가 안다는 바로 그 생각이 자기 눈을 가려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전 8:1).

 

2.

 

속회 모임을 하다가 우리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안나의 집이라는 곳이 운영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사제인 김하종 신부님이 올해로 25년째 운영하고 있는 무료급식소입니다. ‘안나의 집은 거리에 있는 노숙인 뿐 아니라, 가정으로부터 상처를 입고 거리로 나온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아지트라는 심야 상담소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하종 신부님과 봉사자들은 무엇보다 그들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고, 그들이 사람대접을 받는다고 느낄 수 있도록 섬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김하종 신부님은 말합니다. “여기 계신 분, 복음 말씀대로 한 명씩 한 명씩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라고 믿기 때문에 이런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복지사 아닙니다. 사제입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밥을 주고, 마음이 상한 사람은 싸매어 주고, 무언가에 혹은 어딘가에 포로가 된 이들에게는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자는 해방시켜 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희년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울한 이들에게는 정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하루나 이틀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면 일평생에 걸쳐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25년을 하루같이 제자리를 지킨 김하종 신부님의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오늘 이겨내기 위해서 도와주세요. 오늘만. 내일은 모르겠고, 오늘만 도와주세요.”

 

앞으로 몇 년 계획을 세워서 이 일을 이렇게 해야지, 그런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저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에 있어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주님의 뜻대로 살아낼 힘을 주세요, 주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으면 오늘 하루 잘 살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하는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잊지 말아야 할 삶의 근본입니다. 저는 김하종 신부님과 봉사자들의 삶을 엿보면서, 다시금 근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너무 멀리 보느라, 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느라, 바로 앞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남들이 소소하게 누리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6:33-34) 내일의 걱정까지 미리 끌어다 하느라 오늘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놓치는 우리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일에만 힘쓰십시오.

 

3.

 

오늘은 성찬식이 있는 주일입니다. 성찬은, 복음적인 삶의 지향을 축소한 의례입니다. 성찬에는 네 가지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첫째, 빵을 듭니다. 둘째,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셋째, 빵을 쪼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쪼개진 빵을 나눕니다. , 즉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것을 쪼개어 배고픈 이들과 나눔으로써 더욱 풍성한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신비는 빵을 들고 감사하고, 그것을 쪼개어 배고픈 이들과 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 안에 모시는 매순간, 우리는 복음적인 삶을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처럼, 주님을 모신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다짐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나무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받는 자임을 자각하게 될 때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을 나누는 자비의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를 뜻하는 라틴어 미세리코르디아misericordia’는 영어로 컴패션compassion’으로 번역됩니다. ‘미세리코르디아는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느끼면서, 고통을 공감하는 걸 뜻하는 낱말입니다.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자비입니다. 나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면서, 상대방이 계속 고통을 당하는 것을 모른 채 하는 건 성서가 말하는 자비가 아닙니다. 더 구체적으로, ‘미세리코르디아마음cor을 가난한 이들miseri에게 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마음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두고, 그들로부터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것, 그것이 미세리코르디아를 간직한 이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 지레 질려버리지 않습니까? 저만 하더라도, 매순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면 포기가 앞서지,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방안에 들어온 벌레를 살려주려고 쓰레받기에 담아 조심스럽게 창밖으로 보내주다가도, 그 틈으로 들어온 나방은 빗자루로 때려잡는 게 우리의 모습인데 말이죠. 자비를 실천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폭력의 일부가 되어, 거기에 동참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적으로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한계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자비를 향한 실천을 그쳐야 합니까? 아닙니다. 자기의 한계를 자각하고, 나의 약함을 고백하며, 오늘 해야 할 주님의 뜻 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주님의 자비를 전하며 사람으로 살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며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4.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을 사람들은 의의 나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씌워주는 이들,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는 이들, 괴로운 마음 대신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는 이들이 의의 나무로 서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이들입니다. 황폐한 성읍을 새로 세우고, 무너진 채로 버려진 땅을 희망의 땅, 약속의 땅으로 바꾸어 나가는 이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주님의 제사장’,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부릅니다. 남들에게 대접 받고, 스스로 높아지기 위해 안간 힘을 쓸 때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에서 추악함을 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삶의 지향을 꼭 붙들고 근본에서 떠나지 않는 이들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들은 의의 나무로 선 이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나무일까요? 나무는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위를 향합니다. 땅을 딛고 있지만, 땅의 중력에 매여 살지 않고, 하늘을 향해 줄기와 가지를 뻗쳐갑니다. 그래서 땅에 든든히 뿌리 내린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심겨진 자리에서 좀처럼 뽑히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심겨진 자리가 어디든, 바위틈에 홀로 심겨졌든, 다른 나무와 더불어 숲에 심겨졌든, 불평불만 없이 심겨진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 냅니다. 때에 알맞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갑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을 나무에 비유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5.

 

송년주일을 보내며, 저와 여러분 모두 의의 나무로 든든히 세워져 나가길 바랍니다. 연초에 다짐했던 길에서 벗어났다면, 우리 삶이 신앙의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이 되시거든 속히 제자리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제자리란 어디입니까?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새 힘을 주시기를, 비록 흔들리고 때로 낙심할지라도, 당신의 나라를 향한 인생의 여정을 그치지 않도록,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그 자리가, 우리가 돌아와야 할 제자리입니다. 2017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의의 나무로 우뚝 서기를 다시금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그리하여 황폐해진 땅 곳곳에서 생명의 싹을 틔우는 은총의 통로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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