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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길 (2018.1.7. 신년주일)

2018.01.07 15:50

홍목사 조회 수:24

창조의 길

 

본문: 창세기 1:1-5; 마가복음 1:4-11

설교: 홍정호 목사 (2018.1.7. 주현 후 제1, 신년주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새해 첫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에게 새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교회력으로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매년 16일은 주현절(主顯節, Epiphany)입니다. 주현절이란, 주님()께서 나타나신() , 세상에 당신을 환히 드러내 보이신 날입니다. 동방교회 전통에 따르면, 주현절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날입니다. 감리교회에서는 그래서 오늘, 주현 후 첫 번째 주일을 세례주일로 정해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와 더불어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옛 존재는 죽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새해 첫 주일이자, 주현 후 첫 번째 주일인 오늘, 감출 수 없는 주님의 밝은 빛이 여러분 각 사람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다시금 기원합니다.

 

1.

 

오늘 본문은 창세기 1장 천지창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11절의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자연과학의 언어로 읽으면, 오늘날 이 위대한 선언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누차 말씀드렸습니다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일종의 시적 선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선언, 내가,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가 어떤 장소인지에 관한 선언입니다. 그분은 혼돈공허’, ‘어둠이 깊은 세계에서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과 해와 달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고대 근동 신화를 연구하는 구약성서학자 주원준에 따르면, 하늘과 땅, 해와 달은 수메르 시대부터 대 제국의 주신들이었습니다. 수메르의 만신전에서 하늘’, ‘바람’, ‘’, ‘’, ‘’, ‘태양’, ‘금성은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신들로 여겨졌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이 일곱 신의 이름을 따라 날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태양신의 날’, ‘달신의 날하는 식으로 부르면서, 일곱 날을 한 주기로 큰 신들의 이름을 반복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일주일의 체계는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로마인들은 수메르인들이 체계를 가져다 로마 신들의 이름을 붙여 토착화했습니다. 그래서 화금수목월일토’(Mars, Venus, Mercury, Jupiter, Moon, Sun, Saturn)의 체계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유럽에 정착되었고, 일본인들의 번역을 거쳐 우리나라의 월화수목금토일체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고대 근동 신들의 이름으로 날을 지칭하며 살고 있습니다. (주원준,구약성경과 신들, 2012, 88-89)

 

그런데 창세기의 천지창조 선언은 대 제국 수메르의 주신들을 야훼 하나님의 한낱 창조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메르 신화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권능을 갖는 신으로 받아들이는 하늘, , , 달이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그것도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피조물의 지위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야훼 하나님께서는 만물에 깃든 어떤 신보다도 크고 위대하신 분, 세상의 어떤 위엄도 그분의 권능에 견줄 수 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라는 선언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고백은, 그래서 반()제국의 선언인 동시에, 강력한 우상 타파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야훼 신앙의 근본 토대인 것입니다.

 

2.

 

왜 유대인들은 히브리성서의 첫 구절에 반제국의 선언과 더불어 우상 타파의 메시지를 담았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 종살이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창세기가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생활 중에 기록된 텍스트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 바벨론의 그발 강가로 그들을 끌고 갔을 무렵 창세기가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자신들이 누구인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지금 자신들을 포로로 삼은 바벨론의 왕에 비할 바 없이 크신 분, 수메르의 신들도 한낱 피조물로 창조하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고백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비웃었을지 모릅니다. 포로로 끌려 온 주제에, 생각은 자유니 생각이라도 그렇게 하라고 냉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철저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야훼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데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십계명도 가톨릭, 개신교와 다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십계명에서는 서언으로 보고, 그냥 넘어가는 구절이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제일가는 계명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20:2)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에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이 제1계명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제 1의 계명으로 삼아, 이를 회당에서, 가정에서, 일터 곳곳에서 가르치고 생활에 녹아들어 가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간단한 한 문장 안에는, 히브리민족이 경험한 고난의 역사와, 그 가운데에서 개개인이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을 이기시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경외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열 때 마다, 이 첫 구절을 대할 때마다 히브리인들의 이 고백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당신의 권능으로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말끝마다 믿습니다’, ‘아멘하는 것이 참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처럼, 삶의 한 가운데에서, 비록 그것이 고난의 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세상 그 어떤 권세보다 높은 권세를 지니신 분임을 믿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것,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3.

 

미국의 영성신학자 메튜 폭스(Matthew Fox)라는 분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학의 원죄(original sin)의 개념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원죄를 뒤집어 원복(original blessing)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네 개의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 살아계신 분, 자비로우신 분 등 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언어적 긍정을 통해 영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둘째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누구이시다하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누구가 아니시다라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다, 하는 식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언어 그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방식을 취하는 영성의 태도입니다. 셋째는 창조의 길(Via Creativa)입니다. 창조의 길은 긍정과 부정의 길이 동시에 존재하는 삶의 길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생겨라말씀하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길, 삶의 모든 조건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사는 길이 바로 창조의 길입니다. 마지막은 변모의 길(Via Transformativa)입니다. 창조의 길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지향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닮고, 그분처럼 변화되어,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뜻을 우리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서로 다른 길이 각각의 길로, 때로는 교차하면서 우리를 영적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는 창조의 길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창조의 길은 긍정과 부정의 길이 일상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해야, 비로소 보이는 그런 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는 데 주목하지만,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에는 좀처럼 주목하지 않습니다. 먼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일상이었습니다. 늘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낼 수 있었던 것들, 그것이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 일상이었던 세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에서 빛이 생겨라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창조하시며 혼돈과 공허,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에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창조의 길은 우리의 일상이 혼돈에 둘러싸여있다는 사실, 어찌할 수 없는 어둠에 의해 그늘져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기며, 거기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삶을 지향합니다. 창조의 길은 긍정과 부정의 길이 동시에 공존하는 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일상을 닮았습니다. 우리 안에도 긍정과 부정의 길이 늘 공존합니다. 때로 긍정의 길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 되기도 하고, 부정의 길이 그런 역할을 대신할 때도 있습니다. 창조의 길은, 이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창조의 길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서도 긍정과 부정의 길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타인과 내가 함께 변모의 길(Via Transformativa)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어느 사회학자는 우리사회를 모멸사회라고 정의하면서, 스스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줄어든 이 사회에서,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좌절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깎아내림으로써 상승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힘만이, 사랑의 힘만이 한 존재를 변화의 길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느리고 때로는 먼 길을 돌아가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할지라도, 사랑의 힘이 아니면 변화는 꿈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길을 통해 변모를 지향하는 기독교 영성의 길입니다.

 

4.

 

올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신년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의 결단이 올 한해 우리의 결단이 되면 좋겠습니다. 꽃길만 걸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없다는 걸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올 한 해 우리의 길은 창조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모든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삶을 선물로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 많은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크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