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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04)

2010.01.31 12:39

김유동 조회 수:2494


죽음의 수용소


유대인 가운데는 방바닥 밑이나 지하실에 몸을 숨긴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수류탄으로 폭살되고, 어떤 사람은 불을 질러 산 채로 불태워졌다. 유대인 여성 중에는 목숨 대신에 살인자에게 몸을 준 자도 있었다. 그녀들은 밤 동안의 놀이갯감이 되고서, 아침이 되면 똑같이 죽음을 당했다. 총을 맞고도 금방 죽지 않고, 몇 시간, 때로는 며칠씩 고통스러워하며 숨진 유대인들도 있다. 숱한 잔학 행위가 벌어졌다. 죽이는 쪽에서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는 자도 있었다. 엄선된 특별 행동대원들이었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이처럼 많은 사람을 살육하는 일에 진저리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어쨌든 살인자 쪽에서 살육 작전 중에 목숨을 잃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히믈러는 꼭 한 번 처형 작전을 시찰한 일이 있었다. 1941년 8월 중순 100 명의 유대인이 사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차례차례로 일제사격 소리가 울리고, 유대인들이 사살되는 것을 도저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현장의 지휘관이 히믈러를 힐난한다.


‘각하, 이건 단 100 명 아닙니까’


‘무슨 뜻인가, 그건’


‘특별 행동대의 눈을 보아 주십시오. 얼마나 떨고 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양성하고 있는 것이 어떤 인간인지 아십니까. 이 사람들의 나머지 인생은 끝장난 인생이란 말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양성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지독한 신경장애자 아니면, 타고난 야만인, 이 둘 중 하나입니다’.


히믈러는 시찰을 하고 나서, 대원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당의 최고 도덕률’을 준수하라고 호소했다.


사살을 하면서, 처형자와 희생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접촉과 감정 이입을 피하기 위해, 특별 행동대는 다른 살해 방법도 시도해 본다. 다이너마이트의 사용은 전적으로 불성공으로 끝났다. 그래서 다음으로 가스실을 갖춘 유개 트럭이 도입되었다. 이윽고 2 대씩이 각 대대로 보내진다. 그러는 사이 특별 행동대에서 하던 일이, 고정 살육 시설, 이른바 절멸 수용소에서의 대량 처형으로 보강되기 시작한다. 절멸 수용소는 여섯 군데에 건설되고 그 시설들이 갖추어졌다. 독일에 합병된 폴란드 영내의 헤움노(Chełmno: l에 선 하나를 더한 ł은 폴란드어에 나오는 특유한 알파벳. 발음은 w)와 아우슈비츠, 그리고 폴란드의 총독부 관할 지구에 있는 트리블링카, 소비보르, 마이다네크와 벨제츠가 그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절멸 수용소’라는 호칭을 따로 사용하면서 다른 수용소와 구별하다가는 오해를 부르기 십상이다. 당시 보조 수용소를 포함하는 강제 수용소가 1634 곳, 그 지소가 또 있었고, 이 밖에도 노동 수용소가 900 곳 이상 있었다. 이들 수용소에서도, 매우 많은 유대인이 기아, 과로가 원인이 되어 죽어 갔고, 사소한 규칙 위반으로 처형되었으며, 어떤 때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음을 당한 일을 생각한다면, 모두가 절멸 수용소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다만, 앞에서 말한 6 개 수용소는 마치 공장이라도 되듯이 기계적인 대량 살육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건설되었거나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수용소와는 달랐다.


히틀러가 고정 시설에서의 대량 살육 개시를 명령한 것은 1941년 6월, 특별 행동대가 도입된 것과 같은 시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독가스를 사용한 대규모 살육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41년 3월 히믈러는 아우슈비츠의 소장 회스에게 대량 살육 실행을 위해 시설을 확장하라고 명령한다. 아우슈비츠는 철도편이 좋고, 인구 밀집 지역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히믈러는 회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믈러는 루블린 친위대 경찰 사령관인 오딜로 글로보츠니크에게 마이다네크 수용소 건설에 착수하라고 명했다. 이 사나이는 벨제츠와 소비보르를 합친 3 개 절멸 수용소 운영의 총책임자가 된다. 지휘 계통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의 명령은 히믈러를 통해 각 수용소장에게 전달된다. 여기에 4 개년 계획국의 국장 헤르만 괴링(원수)이 정부 여러 관청의 이해를 조정하고 협력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실행 부대는 친위대였지만, 가공할 범죄가 독일 정부의 모든 관청, 군대, 산업계, 당을 휘말아들여 국가 규모로 실행되었음을 보여 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힐버그(홀로코스트 연구로 유명한 역사가)가 말한 것처럼 ‘이런 협력 체제는 완벽했으며, 절멸 작전은 모든 조직이 한 몸을 이룬 거대한 기구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생각해도 좋다’는 것이다.


괴링은 조정 실무를 하이드리히에게 맡겼다. 제국 보안본부 장관이며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던 하이드리히는 정부와 당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괴링은 그에게 1941년 7월 31일, 다음과 같은 명령을 서면으로 내린다.



‘1939년 1월 24일자 조례에 따라, 유대인 문제는 가능한 한 바람직한 방식으로 이주와 배제를 통해 해결하기를 이전부터 귀하에게 의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유럽 내의 독일 세력권에서 유대인 문제를 어찌하면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조직면, 실태면, 재정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귀하에게 다시 의뢰하는 바이다. 다른 중앙 조직의 조력이 필요할 경우에는 이에 응할 것이다’.



이 지령을 받은 하이드리히는 이어서 ‘유대인’ 담당의 제국 보안본부 관료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K. Eichmann 1906~1962년 : 종전 후 아르헨티나에 도피, 전범으로 붙잡혀 이스라엘에서 처형)에게 명령을 내린다. 히믈러는 각 수용소 소장을 통해 실행 부대를 통괄하고 있었지만, 아이히만이야말로, 홀로코스트의 행정면에서의 총책임자이다. 괴링이 서명한 1941년 7월 31일의 명령서를 기초한 것은 이 사나이였다. 동시에 히틀러의 명령은 구두로 하이드리히를 통해 아이히만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방금 총통 각하를 뵙고 왔는데, 총통은 유대인을 섬멸하라고 명령을 내리셨다’ 하는 식이다.


대량 살육을 위한 시설 건설은 1941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진행되었다. 함부르크에서 민간인 둘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해, 살해 방법으로서 가장 좋은 것으로 결론이 난 치클론 B의 취급 방법을 요원에게 가르치고 있다. 9월, 가스에 의한 최초의 처형이 아우슈비츠 제2 블록에서 실행되어, 유대인 입원 환자 250 명과 러시아인 포로 600 명이 살해되었다. 다음으로 아우슈비츠의 주된 처형장 비르케나우에서 작업이 시작된다. 최초로 완성한 절멸 수용소는 우치(Łódź : 폴란드 중부 제2의 도시) 근처에 있는 헤움노(Chełmno)인데, 1941년 12월 8일, 유개 트럭의 배기 가스를 사용한 제1 회 처형이 진행되었다.


한편, 제국 보안본부 주최의 유대인 문제에 관한 회의가, 다음날 베를린 교외 반 호수가의 관저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지만, 마침 같은 날에 일어난 진주만 공격 때문에 1942년 1월 20일까지 연기된다. 나치 고위층 사이에서는 점차로 일종의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러시아의 죽기살기식 저항과,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의 궁극적 승리가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그들 다수가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회의에서는 ‘최종 해결’ 달성 방침이 다시 확인되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시설 조정을 했다. 점심 회식 자리에서 보이가 브랜디를 따르고 다니는 동안, 출석자들 중에서 좀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이 시점을 고비로, 홀로코스트의 완수를, 다른 모든 목표, 그 중에서도 전쟁 목적 그 자체보다도 우선시하게 된다. 그것은 전쟁의 결과야 어찌되든, 유럽의 유대인은 하나도 남김 없이 섬멸한다는 히틀러의 굳은 결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반 호수 회의가 있은 다음,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다음달, 벨제츠에서 처형 준비가 갖추어졌다.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 건설이 3월에 시작되었다. 동시에 마이다네크와 트레블링카의 강제 수용소가 절멸 수용소로 바뀌었다. 총독부 관할 지구 총책임자인 글로보츠니크로부터 보고를 받은 괴벨스는 1942년 3월 27일, 다음과 같이 써 놓고 있다. ‘야만스러운 유대인에게 심판이 내려지려 하고 있다. 세계 대전을 다시 일으킨 유대인의 범죄에 대한 총통의 예언이 이제 가장 가공스러운 형태로 실현되어 가고 있다’.


괴벨스는 일기에만큼은 솔직한 감상을 기록해 놓았지만, 극히 소수에게만 회람된 비밀 명령서에서는 언제나 대학살이 완곡한 말투로밖에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반 호수 회의에서도 하이드리히는 완곡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 ‘모든 유대인은 동방으로 배제하고’ 노동 부대로서 편제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연 소멸로 탈락’시키지만, 유대 민족 재건을 시도할 우려가 있는 생명력이 강한 자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처’를 한다는 식이다. 이 마지막의 ‘적절한 대처’란 살육을 뜻하며, 이는 이미 특별 행동대의 보고서에서 자주 사용된 용어였다. 살육을 완곡하게 표현한 용어의 예도 숱하게 많았다. 이들 용어는, 실제로 살인을 하는 쪽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주변에 있는 몇천이나 되는 사람들도,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보안경찰식 방식’, ‘보안경찰식으로 처치하다’, ‘행동’, ‘특수 행동’, ‘특수 처치’, ‘동방으로의 이송’, ‘이주’, ‘적절한 처치’, ‘청산’, ‘대규모 청소 업무’, ‘특별 조처를 강구하다’, ‘제거’, ‘해결’, ‘청소’, ‘해방’, ‘종료’, ‘이동’, ‘유랑’, ‘유랑민화’, ‘소멸’ 등이다.


완곡한 표현은 프로 살인 집단에서도 사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거대한 악행을 앞두고 가책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당시, 직접이 되었건 간접이 되었건 나치 지배하에 있었던 유럽에는 886만1800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나치는 이 중 593만3900 명, 즉 전체의 67 퍼센트를 살해한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330만 명이라는 가장 많은 유대 인구를 가지고 있던 폴란드에서는 90 퍼센트 이상이 살해되었다. 발트 제국,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도 이 비율은 같다. 보헤미아 보호령, 슬로바키아, 그리스, 네덜란드에서는 70 퍼센트가 죽었다.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그리고 노르웨이에서는 50 퍼센트 이상이 죽음을 당했다. 살해는 주로 절멸 수용소에서 벌어졌다. 아우슈비츠에서는 200만 명 이상, 마이다네크에서 138만 명, 트레블링카에서는 80만 명, 벨제츠에서 60만 명, 헤움노에서 34만 명, 소비보르에서 25만 명이 처형되었다. 이들 시설에서, 가스실은 놀라울 만큼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 트레블링카에는 가스실이 10 개 있었고, 각각 한 번에 200 명을 처리할 능력이 있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2000 명을 죽일 능력이 있다는 것이 소장 회스의 자랑거리였다. 치클론 B 가스의 결정체를 사용해서 아우슈비츠의 5 개의 가스실에서는 24 시간에 6만 명의 남녀노소를 살해할 수 있었다. 1944년의 여름에만 해도, 헝가리계 유대인을 40만 명 죽였고, 모든 기간을 통산해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합쳐 ‘적게 보아도’ 250만 명의 인간을 가스로 죽이고 소각했으며(다른 시설도 그랬지만), 이에 더해 50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고 회스는 증언하고 있다. 1942년, 43년, 44년의 각각 한 시기, 나치는 매주 10만 명 이상을 냉혹하게 죽였는데, 그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


비록 전시이기도 했고, 독일 육군의 비밀의 베일에 감싸여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잔혹한 행위가 이처럼 거대한 규모로, 문명의 기수를 자임하는 유럽에서 저질러졌다. 이 사실은 독일 국민, 독일의 동맹국, 우호국, 피정복국, 그리고 영국, 미국, 그리고 유대인 자신의 대응에 대해 숱한 의문을 제기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각각의 대응을 하나씩 검토해 보기로 하자.



독일 국민의 역할


독일 국민은, 나치에 의한 대학살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해서 묵인하고 말았다. 친위대만 해도 90만 명의 대원이 있었고, 철도에 관련된 사람들이 120만 명이나 되었다. 철도를 통해 독일인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꾸역꾸역 쟁여넣어진 열차가 몇 량씩이나 연결되어 한밤중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웬만한 독일인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염병할 유대놈들 같으니라구. 놈들은 우리를 잠도 못 자게 방해하고 있지 않냐구’ 이렇게 어떤 사나이가 뇌까렸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독일인은 학살로부터 이익을 얻는 입장에 있었다. 희생자에게서 수탈된 수만 개나 되는 남자와 여자의 손목시계, 만년필, 샤프펜슬이 군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어떤 6 주간 동안에만도, 22만 2269 벌의 신사복 상하와 내복, 19만 2652 벌의 부인용 의상, 9만 9922 벌의 아동복이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보내진 희생자로부터 긁어 모아져, 독일 본국에서 분배되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받아 든 사람들은 대체로 짐작이 갔다.


독일이 유대인에게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 항의하거나, 도피를 도와 준 흔적은 거의 없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히틀러 제국의 심장부 베를린에서 16만 명의 유대인 시민 중에서 수천 명이 도피해서 지하로 잠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U보트라고 불렸다. 비유대계 독일인의 협력 혹은 묵인이 없어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1942년 U보트가 된 학자 한스 히르셸은 그 한 예다. 그는 애인이었던 마리아 폰 말찬 백작 부인의 아파트로 도피했다. 열렬한 나치 당원이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의 동생뻘 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을 낸 상자침대를 만들어, 히르셸을 이 안에 넣어 보호했다. 그리고 매일처럼 물과 기침 방지용 약을 주었다. 어느 날 그녀가 집에 돌아와 보니, 히르셸과 또 하나의 U보트인 빌리 부쇼프가 목청을 다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들어라, 이스라엘아. 주는 나의 하느님. 주님은 오직 하나’.



오스트리아인, 루마니아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보다도 질이 나빴던 것은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인구가 적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은 독일인보다도 지독한 짓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뿐 아니라, 아이히만도 게슈타포 총책임자 에른스트 칼텐브룬너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아르투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한스 라우터, 이렇게 2 명의 오스트리아인이 유대인 살육을 지휘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5090 명의 전쟁 범죄자 중 2499 명이 오스트리아인이었다. 특별 행동대에서도 오스트리아인은 현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친위대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특별 행동대의 3분의 1이 오스트리아인으로 되어 있었다. 6 개의 절멸 수용소 중, 자그마치 4 곳에서 오스트리아인이 소장으로 있었고, 유대인 희생자 600만 명의 거의 절반은 그들이 죽인 것이다. 오스트리아인은 독일인보다도 훨씬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였다. 메나셰 마우트너라는 이름의, 제1 차 세계 대전 때문에 의족을 하고 있던 상이군인이 어느 겨울날 빈 시내의 빙판길에서 넘어졌을 때, 그 자리에서 3 시간 동안이나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통행인 가운데 어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들은 유대의 별 표시를 보고서 도와주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인만큼 몰인정했던 것은 루마니아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좀더 질이 고약했다. 전쟁 전 루마니아에는 75만 7000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학대받은 유대인 집단의 하나였다. 루마니아 정부는 히틀러의 반유대 정책을 충실하게 한 발짝씩 모방해서 실천해 나갔다. 효율 면에서는 독일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증오만큼은 한층 더했다. 1940년 8월 이후, 유대인은 법률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직장을 쫓겨났으며, 무보수 강제 노동에 내몰렸다. 전통적인 포그롬이라고 불리는 집단 폭력 행위도 사방에서 일어났다. 1941년 1월에는 부카레스트에서 170 명의 유대인이 참살당했다. 루마니아인은 대소련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로서는 이는 유대인에 대한 싸움이기도 했다. 베사라비아에서 그들은 2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유대인은 가축용 트럭에 실려서 먹을 것도 물도 얻지 못하고 목적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내쫓겼다. 혹은 옷을 홀랑 벗겨서 행진시키기도 했다. 벌거벗겨진 사람도 있었고 신문지만으로 알몸을 가린 사람도 있었다. 특별 행동대 D대대와 러시아 남부에서 행동을 같이한 루마니아의 병사는, 독일인조차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잔혹했고, 죽인 자의 시체를 묻어 주는 일까지도 게을리했다. 1941년 10월 23일, 오데사에서 육군 사령부가 지뢰로 폭파되자, 루마니아 병사들은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사건 다음날, 유대인 군중을 4 개의 커다란 창고 안으로 몰아 넣더니, 석유를 그들의 몸에 뿌리고 불을 붙였다. 2만 내지 3만 명이 이렇게 산 채로 타 죽어 갔다.


독일의 승인을 얻어,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현을 할양받아, 이 곳에서 ‘최후 해결’에 가담했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 출신의 약 13만 명과 루마니아 출신의 8만 7757 명, 도합 21만 7757 명의 유대인이 살육된다. 그 중 13만 8957 명은 루마니아인 자신이 죽인 것이다. 루마니아인은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 다음으로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들은 툭하면 때리고, 고문을 하고, 부녀자를 범했다. 장교들은 병사들보다 질이 나빴다. 가장 아름다운 유대인 여성을 골라 저희들 마음대로 능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전에도 다라웠다. 유대인을 사살한 다음, 시체를 그 고장 농민에게 팔았다. 농민은 시체에서 의류를 벗겼다. 만약에 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유대인을 산 채로 파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4년 이후, 연합국의 승리가 확정적으로 되어 감에 따라 그들의 태도도 조금 누그러졌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히틀러의 ‘최종 해결’에 자진해서 협력하려던 유력한 층이 존재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1906년에 패소한 일을, 그들 프랑스의 반유대주의자들은 결코 잊지 않았고, 유대인을 증오하는 기분은 1936년의 블륌(Léon Blum 1872~1950년 : 사회주의 정치가, 비평가, 인민전선 내각 수상) 인민전선 정부의 출현으로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반유대의 진영에는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지식인층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셀린이라는 펜 네임으로 작품을 발표한 F. L. 데투슈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가 실명으로 발표한, 유대인을 비방하는 작품, <버러지들을 꿰뜨려 죽여라>(1937년)는 전쟁 직전부터 전쟁 시기까지도 매우 광범한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 의하면, 프랑스란 나라는 이미 유대인에게 점령되고, 부녀자가 능욕당한 나라이므로, 히틀러가 프랑스로 침공하면, 프랑스는 해방된다는 것이다. 이 극단적인 책은, 영국인과 유대인이 한 패거리가 되어 프랑스를 때려잡으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오래고도 뿌리 깊은 음모설을 되살려 놓았다. 드레퓌스 사건이 한창 벌어져 있을 때, 액센트가 과장된 영어로 ‘오우 예스’라고 발언하는 것은, 반유대의 함성이었다. 이를 본받아 세린은 <버러지들…> 속에서 영국과 유대의 음모를 야유하는 슬로건으로서 ‘타라붐, 디, 이이, 하느님을 걸고, 임금님 만세, 로이드 만세, 타위르 만세, 시테 만세, 심프슨 부인 만세, 성서 만세, 신의 매음굴, 이 세상은 유대인의 매음굴이다’ 등을 내걸었다.


프랑스에는 반유대 정치 조직이 10 개 이상 있었으며, 그 중 몇은 나치의 자금 원조를 받아, 유대인 섬멸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들이 공동 정책을 채택할 수 없었던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비시 정부가 반유대 정책을 채택하는 바람에, 이 반유대주의자들은 때를 만난 꼴이 되었다. 프랑스 반유대 동맹을 1938년에 조직한 다르퀴에 드 펠르푸아라는 남자는 1942년 5월, 비시 정권의 유대인 문제 담당 장관으로 임명된다. 대다수의 프랑스인은 히틀러의 ‘최종 결정’ 정책에 협력하려 하지 않았지만, 일부 국민은 독일인보다도 더 열심이었다. 이렇게 해서 히틀러는 프랑스의 유대인 9만 명(전체의 26 퍼센트)를 살육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프랑스 당국의 힘을 빌려 국외로 추방한 7만 5000 명 중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겨우 2500 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시 중 프랑스에서 볼 수 있었던 안티세미티즘에는 개인 레벨에서의 증오감이 강하다는 특징을 볼 수 있었다. 1940년, 비시 정권과 독일 당국은 특정 개인(그 모두가 유대인인 것은 아니었지만)이 비방 중상하는 서한을 약 300만에서 500만 통이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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