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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05)

2010.02.07 01:46

김유동 조회 수:1792


히틀러의 기대에 가장 어긋난 것은 동맹국 이탈리아다. 교황청 통치 시대가 끝난(19세기 중반) 이래로, 유럽에서 이탈리아만큼 유대인이 몰려든 나라는 없다. 1904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 3세는 시오니즘의 지도자 헤르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대인은 어떤 직업을 가져도 무방하고, 실제로 온갖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우리에게 유대인은 의심할 바 없는 이탈리아인이다’.


이탈리아계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집단이기도 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고대 이탈리아에 살던 사비네의 여인이 습격을 받았을 때, 의복을 가져다준 것은 유대인이라니까’ 하고 농담하기를 즐겼다. 사비네인은 로마 시대 초기의 민족이었다(이탈리아의 등줄기격인 아페닌 산맥에 살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에 전복당한 원주민). 그럴 정도의 예전부터 이탈리아에는 유대인이 살고 있었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총리가 2 명, 국방부 장관이 한 명 나왔고, 대학 교수, 장군, 제독 중에서도 유대인 출신의 비율은 매우 높았다. 무솔리니 자신 평생을 통해, 친유대와 반유대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이 사나이에게 제1 차 대전에 참전하도록 도와주고,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주의에서 국가 사회주의로, 인생에서도 가장 중대한 침로 전환을 하도록 도와 준 것은 한 유대인 그룹이다. 1919년 ‘전투자 파쇼(fasci di combattimento)’ 결성에 관여한 자 중에도 5 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파시스트 운동의 온갖 분야에서 유대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파시스트 백과사전>의 안티세미티즘 항목에 나오는 예리한 분석은, 유대인 학자가 쓴 것이다. 무솔리니의 전기 작가 마르가리타 사르파티와 재무 장관을 지낸 구이도 융 두 사람 모두 유대인이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획득하고 나자, 무솔리니는 전유럽의 유대인 보호자임을 스스로 인정해서,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년 :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소설가, 극작가)가 ‘멋지다, 무솔리니’라고 상찬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러던 무솔리니였건만 일단 히틀러의 주술에 넘어간다 싶더니 그의 반유대적 경향이 심화되고 만다. 하지만, 어차피 그 뿌리는 깊은 것이 아니었다. 파시스트당과 이탈리아 정부 내부에는 분명 반유대 과격분자가 있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비시 정권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반유대파와 비교해 본다면 훨씬 입장이 약했고, 민중으로부터 광범한 지지를 받은 흔적도 전혀 없다. 1938년 독일의 압력을 받아 이 나라에도 인종법을 도입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유대인을 수용소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국토의 반이 독일 군정하에 놓이고 나서야, 비로소 히믈러는 반도에서의 최종 해결에 착수할 수 있었다. 9월 24일, 히믈러는 로마의 친위대장 헤르베르트 카플러에게 연령과 성별을 물을 것 없이, 모든 유대인을 붙잡아서 독일로 보내라고 명했다. 그러나 자택에다 이탈리아인 애인이 유대인 가족을 감추는 것을 허용하고 있던 로마 주재 독일 대사는 이에 전혀 협력하려 하지 않았고, 군 사령관 케셀링 원수도, 진지 구축을 위해 유대인이 필요하다고 뻗대었다.


카플러는 명령을 내려, 유대인에게 겁을 준다. 독일 대사관에서 2 명의 유대인 지도자, 단테 알만시와 우고 포아를 만나, 마치 암흑 시대를 재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50 킬로의 금괴를 36 시간 이내에 건네 주지 않는다면, 200 명의 유대인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지도자들이 리라로 지불해도 상관 없겠느냐고 묻자, 카플러는 ‘리라라면 필요한 만큼 내가 찍어낼 수 있다’고 비웃으며 상대도 하지 않았다. 금괴는 4일 후 게슈타포에게 전해졌다. 로마 교황 피우스 12세가 필요한 만큼 금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비유대인, 특히 사교구의 신부들이 충분한 양을 기부했으므로, 교황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때 입은 심각한 손실은, 유대인 공동체의 도서관에 있던 유대교 관계의 고문서 다수를 가져가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년 : 독일 정치가, 나치의 이론가)의 개인 장서로 삼아진 일이었다.


재물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유대인을 원하고 있던 히믈러는 카플러의 조처에 불같이 노해서, ‘대유대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납치 전문가 테오도르 다네커와 44 명의 친위대 살인 팀을 파견한다. 이 사나이는 파리와 소피아에서 같은 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주바티칸 독일 대사는 교황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고했고, 교황은 로마의 성직자들에게, 유대인을 교회 내부의 성역에 감추라고 지시한다. 바티칸은 모두 477 명의 유대인을 보호했으며, 다시 4238 명이 수도원으로 도피했다. 습격은 실패로 끝났다. 카플러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작전 수행 중, 유대인을 우리에게 내밀려는 자는 아무 곳에도 없었습니다. 그 곳에 있었던 것은 경찰로부터 유대인을 지켜 주려는 많은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체포 작전으로 1007 명의 유대인이 붙잡혀서 곧장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이 중 죽지 않은 사람은 16 명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에서도 유대인 포획작전이 벌어졌지만, 주민들의 방해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살아난 사람 중에는 버나드 베렌슨이 있다. 이 사람은 리투아니아의 유대교 성직자 라비의 집안에 태어난 극단적인 책벌레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繪畫)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였다. 어느 날 그는 그 고장 경찰로부터 나치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귀띔을 받는다.


‘선생님, 독일인이 선생님 댁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주소를 우리가 잘 모르거든요. 내일 아침에라도 갈 수 있게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독일 점령이 계속되는 동안 이탈리아인들은 이 학자를 줄곧 숨겨 주었다.


그 밖의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도, 친위대는 거의 그 고장 주민들의 조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 잡아들이기가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점령하의 그리스에서는, 주민들의 협력을 얻지 못한 채로, 살로니카의 유대인 약 6만 명을 거의 모두 죽였고, 살아 남은 것은 겨우 2000 명이었다. 벨기에에서는 주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6만 5000 명 가운데 4만 명을 살해해서, 앤트워프의 유명한 보석상인 지구를 자칫 괴멸로 빠뜨릴 뻔했다. 네덜란드에서의 친위대의 활동은 특히 가열하고 용서가 없었다. 네덜란드 국민은 유대인을 지키기 위해 총파업까지 벌였지만, 14만 명 가운데 10만 5000 명이 죽음을 당했다. 독일의 동맹국 핀란드의 국민은 유대인 주민 2000 명을 독일의 손에 넘기기를 거부했다. 덴마크는 5000 명의 유대인 주민 거의 모두를 재빨리 페리에 실어 스웨덴에 도피시켰다. 한편 전통 있는 헝가리의 유대인은 전쟁 말기,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2만 1747명이 헝가리 국내에서 죽어 갔다. 그리고 다시 59만 6260 명이 추방되었는데, 그 중 살아 남은 것은 11만 6500 명에 지나지 않는다.


헝가리에서 유대인 대량 살육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연합군은 완전히 제공권을 장악해서 쾌조의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리하고도 실제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연합군은 유럽의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어떤 효과적인 수단을 강구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러시아군은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최단거리에 위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구출을 위한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시도한 스웨덴의 인도주의적인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가, 붉은 군대 도착과 동시에 행방불명되고 만다. 스웨덴 정부에 ‘소비에트군 당국에 의해 라울 발렌베리씨의 신병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한 조처가 강구되었다’는 뜻의 통지가 왔었지만, 이 인물의 행방은 그 후 묘연한 채로 있다.



영국과 미국의 역할


영미 양국은 대의명분상으로는 유대인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나치게 친유대적인 정책을 채용하다가는 히틀러가 유대인 대량 추방으로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의상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될 터이므로 이를 극단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치로서는 국외 추방은 언제나 ‘최종 해결’의 한 요소였다. 남아 있는 증거에 비추어 볼 때, 히틀러가 추방보다는 살육을 결심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러나 일단 히틀러가 그럴 마음을 먹기만 한다면, 연합국측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정책을 수정하는 일은 손쉬운 일이었다. 괴벨스는 1942년 12월 13일자 일기에 이렇게 써 놓고 있다.


‘영미 양국 역시, 우리가 너절한 유대인 놈들을 섬멸해 가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대량 난민을 받아들여 이들의 생명을 구할 준비는 되어 있지는 않았다. 1930년대, 유럽 주요국 가운데서 반유대 감정이 가장 희박했던 것은 영국이다. 오즈월드 모즐리 경이 1930년대에 창설한 검은 셔츠대의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는 유대인에 대한 공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만약에 대량의 유대인 난민이 영국으로 흘러 들어오는 경우, 반유대 감정이 광범하게 발생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영국은 걱정했다. 1939년 발표한 백서에서 채용된 팔레스티나로의 이민 제한책을 철회할 생각도 없었다.


언제나 시오니스트 편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유대인 이민을 좀더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고 있었지만, 당시의 외무 앤소니 이든은 팔레스티나를 유대인에게 개방하다가는 영국의 아랍 동맹국 모두와 반목하게 되고, 중동에서의 영국군의 입장이 손상된다고 주장했다. 뉴욕의 유대인 지도자인 라비 스티븐 와이즈는 1943년 3월 27일, 워싱턴에서 이든과 만난 자리에서, 독일 점령하에 있는 유럽의 유대인에게 탈출을 허용하도록 영미 공동으로 독일에 교섭해 보도록 요청했다. 이든은 그런 생각은 ‘황당무계하고 불가능하다’고 답변했지만, ‘히틀러는 그런 제의를 수락할지도 모른다’고 다른 자리에서 은근히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다. 외무부는 유대인 받아들이는 일에 소극적이었고, 그들로부터의 요청 그 자체를 싫어했다. ‘비탄에 잠긴 유대인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부서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한 고관이 기록에 남겨 놓고 있다.


유대인 난민을 많이 받아들일 능력이 있었던 것은 미국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 중 겨우 2만 1000 명밖에는 유대인 이민을 입국시키지 않았다. 이는 법률로 정해진 전체 이민 할당 인원의 10 퍼센트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는 일반 대중의 반감 때문이었다. 미국 재향군인회로부터 외국 전쟁 퇴역 군인회에 이르기까지, 애국적 단체는 모두 이민의 전면적 금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 역사상, 제2 차 대전 때만큼 반유대 감정이 높아진 시기는 없었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1938년부터 45년까지 인구의 35~40 퍼센트가 반유대적 입법을 지지하고 있었다. 1942년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으로서는 유대인이 일본인과 독일인의 뒤를 잇는 커다란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1942년부터 44년에 걸치는 기간에, 뉴욕의 워싱턴 하이츠 지구에서 모든 시나고그가 모독당한 일이 있는데, 이 배경에는 광범한 반유대 감정이 있었다.


유대인 도태 계획의 존재는 영미에도 1942년 5월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폴란드의 유대인 노동자 총동맹이 런던에 있는 폴란드 국민위원회의 유대인 멤버 2 명에게,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를 보내 왔기 때문이다. 이 보고에는 폴란드 헤움노의 이동식 가스실을 갖춘 트럭 이야기와, 70만 명이 이미 학살당했다는 시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스턴 글로브>지는 ‘폴란드에서의 유대인 대량 살육, 70만 명이 넘어’라는 기사를 게재했는데, 제12 면이라는 대단치 않은 기사 취급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아마도 역사상 최대의 대량 학살’이라고 논평했지만, 지면 한 귀퉁이에 5 센티미터 정도 크기로 다루어졌을 뿐이었다.


총체적으로 홀로코스트 뉴스는 그다지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속속 들어오는 왁자지껄한 전황 보고에 파묻혀 그다지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의 일반 시민은 홀로코스트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매우 주저했다. 미국 육군이 수용소 지대로 진격해 들어가고 난 다음에도 그랬다. <네이션>지에 기고하는 제임스 에이지는 나치에 의한 잔학 행위의 기록 영화를 보기를 거부하고, 이를 프로파간다라고 깎아 내렸다. 전쟁터에서 귀환한 병사들은, 그들의 견문담을 고국의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고, 사진을 보여 주어도 의심스러워하는 태도를 보고 화를 내었다.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는 일에 큰 장애가 된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 바로 그 사람이다. 그로서는 다소 반유대적 경향이 있었고, 거기다가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가 카사블랑카 회의에 제기되었을 때, 대통령은 ‘독일인이 유대인에 대해 품고 있는 불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인구인의 극히 일부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독일의 법률가, 의사, 교사, 대학 교수의 50 퍼센트 이상을 유대인이 차지했으니 말이야’ 하고 말했다(참고로, 실제 숫자는 법률가가 16.3 퍼센트, 의사가 10.9 퍼센트, 교사가 2.6 퍼센트, 대학 교수가 0.5 퍼센트다). 루스벨트는 국내의 정치 정세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의 90 퍼센트가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 마당에, 이 이상 유대인을 위해 행동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살육 사실이 밝혀진 다음으로도, 대통령은 14 개월 동안 아무 행동도 취하려 하지 않는다. 1943년 4월, 늦게나마 이 문제에 관한 미영 회의가 버뮤다에서 열렸지만, 대통령은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회담 결과, 구체적인 조처는 아무 것도 취할 수 없다는 것만이 확인되었다. 그뿐 아니라, ‘난민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생기는 일에 관해서는 히틀러에게 어떤 모션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나왔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전쟁 난민 위원회가 설립되지만, 정부로부터의 원조는 거의 없었고, 기금의 90 퍼센트는 유대인들의 기부로 충당했다. 이 위원회는 그럭저럭 20만 명의 유대인과 2만 명의 비유대인을 구조해 낼 수 있었다.


가스실 등의 시설을 폭격하는 문제는, 헝가리계 유대인 등의 살육이 시작된 1944년 여름, 한 번 검토된 일이 있었다. 특히 처칠은 유대인의 참상에 몸서리가 쳐진다며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살육은 아마도 세계사상 최대이고 최악의 범죄 행위일 것이다’ 하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처칠은 1944년 7월 7일, 이든에게, ‘무엇이 되었건 공군에게 행동을 취하게 하라. 필요하다면 수상의 권한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작전은 실행 가능했다. 1944년 7월 7일부터 11월 20일 사이에, 아우슈비츠에서 47 마일 떨어진 석유 정제공장이 10회 이상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공격이 끝나기 전에 홀로코스트는 이미 완료되어 히믈러가 살육 시설의 파괴를 명하고 있었다. 8월 20일, 127 대의 ‘하늘을 나는 요새’ 전략 폭격기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동쪽으로 5 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공장을 폭격하고 있다. 폭격에 의해 유대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는지는 증명할 길이 없다. 친위대는 어떠한 물리적 군사적 장애를 무릅쓰고라도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이상할 정도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그러나 미영 양국 정부 내의 지지자라고는 처칠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양쪽 공군도, 적군이나 군사 시설 이외의 것을 표적으로 삼은 작전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미국 육군성은 그 실행 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해 보지도 않은 채, 계획을 파기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하고 심각한 논점에 대해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유대인 구출 작전을 위해 병력을 충당하는 일을 거부하는 것은 전체적인 전쟁 방침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한 일이었다. 각 나라의 유대인 단체의 양해를 얻어, 신속하고 완벽하게 히틀러를 타도하는 것이 유대인을 살리는 가장 좋은 방침이라는 것을 양국 정부가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대한 조직과 큰 세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유대인 단체는 폭격 실시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전쟁의 승리가 최우선 목표로 인지된 이상, ‘최종 해결’은 그런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최종 해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치의 전쟁 수행을 스스로 방해하는 멍에였다.


육군이 되었건 산업계 지도자가 되었건, 독일측에서 전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최종 해결’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몇천 몇만이나 되는 군인을 필요로 했으니 말이다. 중요한 전투 수행 중, 철도가 종종 기능이 마비되곤 했다. 어찌되었건 300만 명이나 되는 부지런한 노동력이 헛되이 죽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대다수는 우수한 숙련공이었다. 군수 시설의 유대인 노동자는 자신들의 운명을 어렴풋이 깨닫고, 전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자신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일했다. 산업에 종사하는 독일인이, 유대인 스태프를 그들의 손 안에 남겨 두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했다는 증거도 수없이 많다.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의 예를 들어 본다면, 러시아 점령 지역에서 군수 공장 관리를 담당하던 어떤 관리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거의 해결 불가능했던 것은, 전문적 관리직 부족 문제입니다. 원래의 경영자 거의 모두가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 기업은 모두 소비에트 정부에 접수되었습니다. 공산당 관리자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인 수탁자들은 무능해서 믿을 것이 못 되었고, 아주 소극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전문가와 진짜배기 두뇌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지난날의 경영자이고 기술자였습니다.……그들은 급료도 거의 지불되지 않고 있었지만, 가능한 한 최대의 노력을 해서, 생산력을 극한으로까지 높여 놓으려고 분투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들도 전원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홀로코스트는 히틀러가 전쟁에 패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홀로코스트에 의해 군사적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붉은 군대였고, 최종적으로 정치상의 득점을 얻은 것은 소비에트 제국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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