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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06)

2010.02.15 04:10

김유동 조회 수:2578


유대인의 저항


연합국의 작전은, 유대인 자신들이 저항 운동을 일으켰더라면 다른 것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저항 운동은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유대인은 1500 년에 걸쳐 박해를 받아 온 오랜 경험에서, 저항은 그들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잃는 일로 이어지고 만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역사, 신학, 전설, 사회 구조, 그들의 언어조차가, 거래를 하고, 돈을 치르고, 청원을 하고 반론을 하되 싸우지 말라고 단련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또 유대인 공동체, 특히 동구의 유대인 집단으로부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인구가 유출되어 무력화하고 있었다. 가장 야심이 있는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가장 정력적이고 모험을 좋아하며, 무엇보다도 전투적인 젊은이들은 팔레스티나고 갔다. 우수하고 총명한 유대인의 국외 유출은 전쟁 전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 중에도 이어졌던 것이다. 시오니스트 운동가 야보틴스키는 홀로코스트가 닥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는데, 전투 훈련을 받고, 제복을 입고 무기를 지닌 폴란드의 유대인 그룹은 히틀러에 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을 팔레스티나로 보내기 위해 조직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예를 들면 (뒷날의 이스라엘 수상) 메나헴 베긴은, 루마니아의 국경을 넘어, 1000 명의 불법 이민을 호위해서 중동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자신 공교롭게도 이렇게 해서 화를 모면하고 있다. 이런 행위는 사리에 합당한 일이었다. 이왕 싸울 것이라면 조상의 땅인 이스라엘에서 싸우고 싶다. 그 곳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유럽에서 싸워 보았자 희망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유럽에 머물러 있던 유대인들은 태반이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속았고, 스스로도 속이고 있었다. 아무리 잔혹한 박해가 가해지더라도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다. 박해하는 자가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교섭을 하면 최종적으로는 합의가 가능하다고 그들의 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었다. 따라서 언제나 ‘살아 남는’자를 남겨 놓는 일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4000 년에 걸친 그들의 역사에서, 유대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도 아니고, 거의 다도 아니고, 모든 것을 요구하는 적과 맞닥뜨린 경험이 없었다. 단 몇 명도 아니고, 많은 수도 아니고,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목숨을 요구하는 적을 상정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괴물이 나타날 것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기독교도와 달리 유인은 악마가 인두겁을 쓰고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저항의 가능성을 가능한 한 줄이자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나치는 유대인의 사회와 정신 구조의 연구 성과를 한껏 사용했다. 각 도시의 유대인 평의회, 각 ‘란트’(州에 해당하는 독일 지방의 행정 단위)의 유대인 연합, 그리고 유대인 전국 조직을 동원해서 임원들 스스로에게 ‘최종 해결’의 준비 작업을 시켰다. 명부의 작성, 출생 신고, 사망 신고, 새 규칙의 회람, 게슈타포 명의로 된 새로운 은행 구좌 개설, 특별 거주구로의 유대인 이동, 추방을 위한 지도와 일람표 작성 같은 작업을 하게 했다. 이 방식은 점령 지역에서 유대인 평의회를 동원하는 일의 원형이 된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나치의 ‘최종 해결’ 수행을 위해 돕는 꼴이 된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 평의회가 약 1000 개 가량 조직되어, 1만 명이 그 밑에서 일했다. 전쟁 전의 유대 회중 조직인 케힐로트가 유대인 조합의 모체가 되고 있다. 소련 점령 지구에서는 독일군 도착 이전에, 이미 가장 용감한 지역 지도자가 사살되었다. 독일인은 유대인 평의회를 불온 분자 적발을 위해 사용했고, 발견되는 즉시 사살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순종적이었고, 두려움에 떨며, 아첨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 나치는 처음에는 유대인에게서 모든 귀중품을 빼앗기 위해 지도자층을 이용했고, 이어, 유대인을 강제 노역으로 몰아내기도 하고 절멸 수용소로 보내는 데 이용했다. 그 반대급부로, 그들에게는 특권을 부여해서, 유대인 주민을 감독하는 권리를 주었던 것이다.


이 얼개가 가장 가증스럽고 대규모로 악용된 것은 폴란드 최대의 게토, 특히 바르샤바와 우치(Łódź)의 게토였다. 우치의 게토에는 20만 명의 유대인이 몰려 있었다. 한 방에 평균 5.8 명을 수용한 꼴이다. 4만 5000 명이 질병과 기아로 죽어 갔으니 절멸 수용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르샤바의 게토에는 44만 5000 명 정도의 유대인이 몰려 있었는데, 한 방 평균 7.2 명의 밀집 상태였다. 여기서는 20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8만 3000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대인은 게토로 밀려 들어갔다가, 여기서 처형을 위해 열차로 절멸 수용소로 쏟아져 나간다. 게토 내부는 일종의 미니 독재 체제하에 있었으며, 하임 모르데하이 룸코프스키 같은 남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남자는 우치의 게토에서 엄청 거드름을 부리는 권력자로서, 자신의 흉상을 우표에 인쇄까지 해 놓고 있었다.


지배자들은 무기를 휴대하지 않은 유대인 자치 경찰을 통해 게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바르샤바 게토에는 이런 경찰관이 2000 명 있었는데, 이들은 폴란드 경찰에 의해 감독되었고, 물론 무장한 독일의 치안 경찰과 친위대가 구석구석에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게토는 문화적으로 아주 메말라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즐겁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보잘것없는 자금을 쪼개서 유대인 단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했다. 비밀 예시바(율법학원)가 조직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유대인 작곡가의 곡만 연주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바르샤바, 우치, 빌나, 코프노(지금은 리투아니아의 도시 카우나스)의 게토에는 오케스트라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비밀 신문이 발행되고 회람되었다. 우치의 게토에서는 마치 중세처럼 연대기가 기록되었다. 그러나 게토의 역할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권한에 대해, 독일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매우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토는 전쟁 수행에 소용이 닿는 한 최대로 이용할 뿐(우치에는 117, 비알리스토크에는 20 개의 작은 군수 공장이 있었다)이고 강제 수용소로의 이송 명령이 떨어지면 질서 있게 이송할 수 있도록 협력시키는 것이다.


유대인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기 위해 독일인들은 모든 국면에서 거짓말을 하고, 정교한 속임수를 구사했다. 게토에서의 이송은, 언제나 공장으로의 이동이라고 이야기했다. 발트제(숲의 호수)의 스탬프가 찍힌 엽서를 대량으로 인쇄해서, 이를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에게 사용하게 했다. ‘잘 있다, 일도 잘 하고 건강하다’고 한장 한장에 쓰게 했다. 트레블링카로 향하는 도중에는, 기차표 매장이 있는 가공의 역까지 건설해 놓고, 역사에는 손으로 그린 시계와 ‘비알리스토크 방면’이라고 쓴 표지까지 걸어 놓았다. 샤워 룸으로 보이게 위장해 놓은 처형실 문짝에는 적십자 마크를 붙여 놓았다. 친위대는 때때로, 유대인이 ‘샤워 룸’을 향해 정렬시키는 사이, ‘죄수’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게 음악 연주를 하게 했다. 그들은 이런 거짓을 마지막 단계까지 했다. 어떤 희생자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메모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오랜 여행 끝에 간신히 여기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목욕실”이라는 표지가 걸려 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비누와 수건을 받아 들고 있다. 놈들은 이제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일까’. 벨제츠에서는 1942년 8월 18일, 친위대의 소독 전문가였던 쿠르트 거슈타인이 가스실로 차례차례 들여보내지고 있는 성인 남녀 그리고 어린이들을 향해 어떤 친위대 장교가 노래하듯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전혀 아프지는 않단다. 자, 숨을 한껏 들이쉬렴, 허파가 강해진단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정말 좋은 소독제니까’.


이런 거짓말을 유대인 대다수는 믿었다. 그들 자신 속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들은 희망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친위대는 일부 유대인만이 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게토에서 교묘하게 퍼뜨렸다. 그리고 열심히 협력하면 할수록 살아 남을 기회가 늘어난다는 소리를 유대인 지도자에게 불어 넣었다. 게토의 유대인은 절멸 수용소의 존재를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1942년 유대인 젊은이 2 명이 헤움노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 곳에서 본 것을 이야기했을 때,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실성을 한 모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의 보고를 지하 조직의 신문에서는 덮어 두고 말았다. 4월에 들어 벨제츠에서 온 보고가 헤움노의 이야기와 부합한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비로소, 바르샤바의 유대인은 유대인 절멸의 음모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7월, 바르샤바 게토의 지도자, 아담 체르니아코프는 어린이조차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겨 놓고 있다.


‘나는 너무나 무력합니다. 비탄과 연민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 이상 견딜 수가 없군요. 여러분, 내가 취하는 행동이 올바르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그러나 일이 이쯤 되고 나서도 많은 유대인은 죽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희망에 매달리고 있었다. 빌나의 게토 지도자 야콥 겐스는 공중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놈들이 유대인을 1000 명 보내라고 나에게 말하면, 난 1000 명을 보내 줄 생각이다. 왜냐 하면 우리 유대인이 자발적으로 인도해 주지 않으면, 독일인이 와서 강제적으로 데려갈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면 놈들은 1000 명이 아니라 수천 명을 데려가겠지. 수백 명을 보냄으로써, 나는 1000 명을 구하는 거지. 1000 명을 보냄으로써 1만 명을 구하는 것이고…’


유대교의 가르침도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가장 순순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통적인 교양을 믿는 하시딤파 유대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성경 구절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신명기 28장 66절). 그리고 기도를 위한 숄을 몸에 두르고, 시편을 읊조리면서 수용소를 향하는 열차를 탔다. 신의 영광을 위해, 순교자가 될 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하느님의 자비로 목숨이 연장되는 일이 있다면, 이는 기적일 것이다. 하느님이 얼마나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하셨는가 하는 구원의 불가사의함을 전하는 일화가 홀로코스트를 통해 하시딤스파 유대인 사이에 퍼졌다. 어떤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앙심이 두터운 자는 더욱 믿음이 두터워졌다. 그들은 모든 사물에서 하느님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가스 처형을 간신히 면해서 탈주한 유대인 처리반의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다.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끌려 온 신앙심이 돈독한 유대인의 한 무리가, 가스실로 들여보내지기 직전,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인지 브랜디를 마시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들은 곧 구세주와 만나게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유대인 중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기쁨을 가지게 된 자도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계 유대인 여성 에티 힐레숨이 아우슈비츠에서 기록한 놀라운 일기에 의하면, (어떠한 시련과 맞닥뜨려도 믿음을 잃지 않았던) 욥의 이야기가 홀로코스트의 와중에서도 그녀의 마음 가운데서 살아 있었다고 한다.


‘발을 주님의 대지에 단단히 붙이고, 수용소의 한 귀퉁이에 서서, 주님이 계시는 하늘을 우러러보자, 눈물이 나의 뺨을 따라 흘러 내렸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눈물이’.


게토의 주민이 차례차례 수용소에 보내져, 남은 자가 적어지자, 유대인 중에서 저항을 위해 일어서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부 의견 대립 때문에 행동 계획의 합의에는 시간이 걸렸다. 바르샤바에서는 공습에 대처하기 위한 방공호를 건설한다면서, 유대인들이 하수도로 이어지는 지하도를 팠다. 지도자는 24세의 청년, 모르데카이 아닐레비치다. 750 명의 전사를 모으고, 9 자루의 라이플과 59정의 권총, 그리고 수류탄을 몇 개 조달하는 데 성공한다. 나치는 무장 친위대를 동원해서 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 파괴에 착수했다. 당시 6만 명의 유대인밖에는 이 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전사들은 궐기해서, 주로 지하에서 벌어진 절망적인 전투에서 16 명의 독일인을 죽이고, 85 명을 부상시켰다. 아닐레비치는 5월 8일에 전사했지만, 남은 사람들이 다시 8 일 동안 전투를 계속했고 결국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쓰레기 범벅이 되면서 목숨을 잃었다. 무장이 잘 된 정규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치의 침공을 이처럼 오래도록 버티어 내지 못한 유럽의 나라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1944년 10월 7일에는 아우슈비츠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크루프의 공장에서 일하던 유대인이 몰래 폭약을 가지고 나와, 이를 재료로 해서 소련군 포로가 수류탄과 폭탄을 제작한다. 궐기한 것은 제3 및 제4 소각로에 배치되어 있던 유대인 처리반 사람들이다. 제3 소각로를 폭파해서 3 명의 친위대원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약 250 명이 수비대에 참살당했지만, 27 명이 탈출했다. 폭약을 수용소로 가지고 들어온 유대인 소녀 4 명은 몇 주간이나 고문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실토하지 않았다. 그 중의 한 명 로자 로보타는 ‘모두들 강하고 용감하세요’ 하고 최후의 말을 남겨 놓고 숨을 거두었다. 고문을 끝까지 이겨 낸 2 명의 소녀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모든 여성들 면전에서 목을 매어 죽였다. 그 중 한 명은 ‘복수를!’이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유대인 몰살이 벌어지는 동안 어느 단계에서도 저항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독일인은 언제나 압도적인 힘으로 갑자기 들이닥쳐 일을 처리했다. 유대인은 공포와 절망으로 마비된 채로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두브노 마을에서 한 목격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 3 배나 되는 우크라이나인 민병이 대기하고 있었다. 게토 내외에 세워진 아크등에 전기가 켜졌다.……너무나 황황스럽게 밖으로 몰아대는 바람에, 사람들은 어린 아기를 침대에 남겨 둔 채로 밀려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길에서는 어머니가 아기를 부르며 울부짖고, 아이들은 어머니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친위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붙잡은 자들을 구보로 달리게 해서 화물열차에 오를 때까지 구타를 계속했다. 화차는 차례차례로 가득 찼고, 울부짖는 부녀자들의 소리, 허공에서 울리는 채찍 소리, 그리고 총성이 쉬지 않고 울려 대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열차로 이송되는 도중 죽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서 목적지에 도달하면, 그대로 곧장 가스실로 보내졌다. 1942년 8월의 어느 이른 아침, 쿠르트 거슈타인(친위대의 소독 전문가)은 6700 명의 유대인이 열차로 아우비츠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1450 명은 도착했을 때 이미 숨져 있었다. 200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가죽 채찍을 한 손에 들고, 화차의 문짝을 열어, 생존자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하며, 구타해 땅에 뒹굴게 했다. 스피커가 전원 완전히 옷을 벗으라고 을러 대고 있었다. 모든 여성이 사나운 기세로 머리가 깎였다. 그리고 ‘소독을 위한 샤워’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전원을 벌거벗긴 채 가스실로 몰아 대었다. 저항할 기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할 수 있었던 일이라면, 감추어 가지고 있었던 마구 구겨진 지폐를 잘게 잘게 찢어 버려, 나치가 쓸 수 없게 하는 일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저항이었다.


히틀러의 묵시록적 종말을 면한 유대인은 하나도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테레지엔슈타트의 수용소는 노인으로 가득했는데, 이는 유대인이 이처럼 그저 옮겨져 있을 뿐이라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수용소에는 이른바 특권을 가진 유대인들이 보내져 왔다. 즉, 제1 급 십자훈장 이상의 훈공자, 혹은 50 퍼센트 이상의 장애를 가진 상이군인이다. 그러나 연합군이 1945년 5월 9일에 수용소를 해방했을 때, 14만 1184 명의 수용자 가운데 살아 남았던 것은 겨우 1만 6832 명에 지나지 않았다. 8만 8000 명 이상이 연령, 전공을 물을 것도 없이 가스실로 보내졌던 것이다. 유대인은 아무리 고령자라 해도 용서 없이 죽였다.


오스트리아 합병 뒤 말기 암에 걸려 있던 고령의 프로이트를 친구들이 나치에게 몸값을 내고 살려 내어 영국으로 옮겼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그의 늙은 자매 4 명이 빈에 남겨져,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까지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결국 그녀들은 나치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81세의 아돌핀은 테레지엔슈타트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80세의 폴린과 82세의 마리는 트레블링카에서, 84세의 로즈는 아우슈비츠에서 각각 죽음을 당했다.


세상 모르는 어린 유대인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다. 절멸 수용소에 도착한 여성은 모두 머리를 박박 깎였다. 머리카락은 상자에 넣어져 독일로 보내졌다. 삭발하는 데 젖먹이가 방해가 되면, 간수가 아기를 붙잡아, 그 머리를 벽에 부딪쳐 죽여 버렸다. 뉘른베르크 재판 법정에서 목격자가 토로한 증언이다.


‘자신의 눈으로 실제로 본 자 아니고는, 독일인이 얼마나 기꺼이 이런 만행을 저질렀는지 믿지 못할 것입니다. 벽에 서너 번 패대기를 쳐서 아기를 죽였을 때,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얼마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시체를 어머니의 팔에 돌려 주었는지…’


트레블링카에서는 갓난 아기 대부분이 도착과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빼앗겨서, 죽음을 당하고, 중병자나 장애자들과 함께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졌다. 때로는 가냘픈 갓난 아기의 울음 소리가 구덩이에서 울려 오기도 했다. 적십자 완장을 찬 간수가 요양소라고 불리던 이 구덩이 둘레를 경호하고 있었다.


갓난 아기의 머리를 벽에 쳐서 죽이는 일은 반유대주의 폭력의 2면성이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과학적 살육이 비밀리에 조직적으로 벌어지는 한편으로, 돌발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몸서리가 쳐지는 잔학 행위도 벌어졌던 것이다. 유대인은 품성이 저열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못된 방법으로 죽음을 당했다. 마우트하우젠의 채석장에서는 미성을 가진 이탈리아계 유대인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한 바위 위에 서서 ‘아베 마리아’를 부르게 하면서 폭사시켰다. 몇백 명이나 되는 네덜란드계 유대인은 ‘낙하산병의 절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채석장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게 했다. 몇천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사소한 수용소의 규칙을 위반했다면서 맞아 죽었다. 코인을 감추어 가지고 있었다, 결혼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죽은 유대인의 옷에서 유대인의 별 표지를 제거하는 일을 게을리했다, 외부의 빵 가게에서 빵 한 조각을 얻었다, 허가 없이 물을 마셨다, 담배를 피웠다, 반듯하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다. 그 중에는 목을 잘라 죽인 경우도 있다. 트레블링카의 부소장 쿠르트 프란츠는 사나운 개 몇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를 유대인을 물어 죽이는 일에 썼다. 간수는 무엇이든 손에 들 수 있는 것만 있으면, 이를 사용해서 죽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벨제츠의 한 목격자가, 수용소에 갓 도착한 ‘매우 젊은 소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소년은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젊음의 상징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발랄한 태도에 늘 놀라곤 했었지요. 주변을 둘러보면서, 즐거운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누군가 여기서 도망친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고 말이죠.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간수 하나가 이 소리를 듣고 이 아이를 잡아서 죽을 때까지 고문을 했습니다. 벌거벗겨서, 교수대에 거꾸로 매달아 3 시간을 그대로 놓아 두었습니다. 그래도 소년은 아직 기운차고 강했습니다. 그래서 놈들은 그 소년을 내려서 땅에 눕게 하더니, 막대기로 꾸역꾸역 모래를 입으로 쑤셔 넣었던 것입니다. 소년이 죽을 때까지 말이죠’.



최종적으로 제국이 분해해서, 히믈러가, 그리고 다른 수용소의 지휘관이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최종 해결’의 과학적 측면은 붕괴되어 버려서, 2면적인 반유대주의 폭력은 오직 하나의 잔학한 힘으로 합쳐졌다. 남아 있는 유대인을 마지막까지 닥치는 대로 죽여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유대인 무장 특무반 룸코프스키를 포함한 게토의 우두머리들, 유대인 경찰관, 친위대 스파이, 이들 모두가 죽음을 당했다. 전선이 뭉그러지자, 친위대는 유대인 집단을 후방으로 옮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마음 내키는 대로 죽이기 위해서였다.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제3 제국의 붕괴가 확실해진 다음으로도, 친위대는 대량 살육자로서의 임무 수행에 이상할 정도의 집념을 보였다. 그것은 인류 사상 가장 소름끼쳐지는 불가해한 현상이다. 살인자가 반란을 일으킨 사례가 하나 있다. 마우트하우젠의 보조 시설로서, 독일의 손에 남겨진 최후의 수용소 에벤제에서 폭탄을 장치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유대인 3만 명에 대해, 친위대원들이 총 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수용소가 해방된 다음까지 살육이 계속된 경우도 있었다. 1945년 4월 15일, 영국 육군의 탱크 부대가 벨젠을 탈취하고 나서 그대로 다음 작전으로 옮아가는 바람에, 헝가리인 친위대가 48 시간에 걸쳐 현장 일부를 괄할하게 되었다. 이 사이 그들은 주방에서 감자 껍질을 훔쳤다는 사소한 이유로 72 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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