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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07)

2010.02.28 23:08

김유동 조회 수:1722


*지난 주에는 깜박하고 한 번 게재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살아 남은 안티세미티즘


이렇게 해서 600만 가까운 유대인이 죽음을 당했다. 이교도, 기독교도, 비종교인, 미신적이거나 지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 풍속과 학술, 그 밖의 온갖 요소를 포함한 2000 년에 걸친 반유대의 증오심이 하나로 합쳐져서, 히틀러의 손에 의해 불가항력적인 기세를 가진 괴물로 둔갑을 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매우 희귀한 정력과 의지의 힘에 의해, 이 괴물은 무력한 유럽의 유대 민족을 뿌리째 흔들어 대었다. 아직 25만 명이 난민 캠프에 있었고, 그 밖에도 생존자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기는 했다. 그러나 동유럽의 위대한 아슈케나지계 유대인의 계보는 사실상 끊어지고 말았다. 한 민족의 말살이 실제로 수행되었다. 수용소가 해방되어, 이 참화의 정도가 밝혀져 감에 따라, 온 세계의 사람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범죄가 저질러졌는지를 깨닫고, 이 이상의 잔학 행위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한 마음으로 결심하고 있을 것이라고 일부 유대인은 기대했을 것이다. 안티세미티즘을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영구히 종식시켜야 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를 새로이 쓰기로 하자고 말이다.


그러나, 인류 사회는 그런 식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특히 안티세미티즘의 충동은 그렇게 간단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천변만화하는 요괴처럼 오래된 껍데기를 벗어던져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서 살아남는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초래한 효과에 의해 안티세미티즘의 증오의 중심은 동구, 중구에서 중근동으로 옮아간다. 아랍 지도자 중에는 히틀러의 유대 문제 ‘해결’이 도중에 어정쩡하게 끝날까 봐 걱정하는 자가 있었다. 예를 들면 1942년 5월 6일, 유대인이 팔레스티나로 향하고 있는 것을 놓고, 이슬람법의 최고 권위자가 불가리아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그들을 폴란드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강력한 감시’ 아래 두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유럽에서조차도, 살아남아서 실의에 빠져 있는 유대인에 대해, 종종 연민보다는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을 앞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헐벗은 그들의 행색, 극악한 처우에 의해 몸에 배고 만 주눅든 행동거조가 새로운 안티세미티즘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보인 자 가운데는, 다른 어떤 사령관보다도 많은 유대인 난민을 다루어야 했던 패튼 장군이 있었다. 장군은 ‘유대 난민’을 ‘현대의 어떤 문화나 사회적 교양과 아주 무관한 유인(類人)’이라고 불렀다. ‘단 4 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퇴화하는 민족은 달리 없을 것이다’. 탈진하고 만 생존자를 다루면서, 그들의 출신국, 특히 폴란드에 대해 격심한 적의가 새삼 드러난다. 유대 난민은 고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본국으로의 송환에 대해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시카고 출신의 한 유대인 미군 병사는, 폴란드로 향하는 화차에 유대인 생존자를 태우고 있을 때의 정경을 이렇게 회상한다.


‘다 큰 남자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입고 있던 옷을 찢으면서 부르짖는 겁니다. “여기서 죽여 주시오. 폴란드로 돌아가면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여기서 지금 당장 죽여 주는 편이 좋아요”라는 겁니다’.


그들의 두려움이 불행하게도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폴란드에서는 1945년 8월, 크라쿠프에서 발생한 반유대 폭동이 소스노비에츠와 루블린으로 확대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크라쿠프로 돌아간 루바 진델은 8월의 첫 안식일, 그녀가 속하는 시나고그에 대해 벌어진 공격 이야기를 한다. ‘폭도는 모두, 우리가 비밀 의식을 벌여서 사람을 저주하고 죽였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쪽을 향해 발포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곁에 앉아 있던 남편은 얼굴에 총탄을 몇 발씩이나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서쪽으로 도망하려고 했지만, 패튼 장군의 군대에 저지되고 만다. 바르샤바 주재 영국 대사는 조금이라도 유대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폴란드 국내에서 위해를 당할 우려가 있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의 7 개월 동안에 폴란드에서는 반유대 살인 사건이 350 건 일어났다.



전쟁 범죄의 재판


그렇기는 하지만, 홀로코스트가 너무나 극악무도했기 때문에, 이처럼 유대인에게 저질러진 폭력에 대한 국제 사회의 대응에는 두 가지 면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 범죄에 대한 처벌과 보상이 필요하다는 데 대해 국제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그 두 가지가 어느 정도 실행되었다. 전쟁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1945년 11월 20일에 뉘른베르크에서 개시되었다. 기소장에 기록된 주요한 죄상은 ‘최종 해결’ 바로 그것이었다. 나치 지도자를 재단하는 최초의 공판은 1946년 10월 1일에 종료되었는데, 마침 이 날은 유대교의 속죄일에 해당했다. 12 명의 피고가 사형 판결을 받고, 3 명이 종신형, 4 명이 금고형, 3 명이 무죄가 되었다. 그 후 ‘속뉘른베르크 재판’으로 알려지는 나치 범죄자 재판이 12 회에 걸쳐 열렸고, 그 중 4 개의 재판에서 ‘최종 해결’의 계획 책정과 실행이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이 12 회의 재판에서 177 명의 나치 당원이 유죄가 선고되어 12 명에게 사형, 25 명에게 종신형, 그리고 나머지 피고에게 장기형 판결이 내렸다. 뉘른베르크 이외에서도, 영-미-불의 각 점령 지역에서 재판이 벌어져, 거의 모든 재판에서 유대인에 대한 잔학 행위가 단죄되었다.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사이에 모두 5025 명의 나치 당원이 유죄 판결을 받고 806 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 중에서 실제로 처형된 것은 486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1951년 1월, 재독일 미국 고등 판무관이 내린 갖가지 은사령에 의해, 미국 점령 지역에서 복역 중인 다수의 고급 전범이 일찌감치 석방되고 말았다. 유엔 전쟁 범죄 위원회는 3만 6529 명의 ‘전쟁 범죄인’(일본인도 들어 있다)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그 대다수가 유대인에 대한 잔학 행위를 문제로 삼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3 년간에 걸쳐 8개 연합국에서 재판이 열려서, 이 리스트에 실린 3470 명 가운데서 952 명이 사형, 1905 명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전쟁에 말려들었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매우 많은 전범 재판이 개별적으로 벌어졌다. 약 15만 명이 전범 혐의를 받아 약 10만 명이 유죄가 되었는데, 그 대다수가 반유대죄에 해당했다. ‘최종 해결’에 가담한 몇천 명의 나치와 독일 동맹국의 장교가 소비에트 연방의 강제 수용소로 갔다. 1945년, 독일의 재판소가 다시 기능을 하기 시작하자, 여기서도 전쟁 범죄인의 재판이 시작된다. 그 후 4반세기 동안에 12 명이 사형, 98 명이 종신형, 6000 명이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1948년에는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탄생하고 (이 책에도 나오는 바와 같이) 이 나라에서도 보상을 요구하는 절차가 개시되었다. 나치의 전쟁 범죄인을 발견하고 체포해서 신문하는 노력은 홀로코스트 종료로부터 40 년 이상이 지난 1980년대 후반까지도 계속되고 있었고, 앞으로도 10 년 후, 홀로코스트를 수행한 인간이 저 세상으로 가거나, 대단한 고령자가 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어느 누구도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최종 해결’을 실행한 지도자 중에는 꼭꼭 숨어서 평온 무사하게, 혹은 적어도 몸을 완전히 감춘 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명을 다한 자도 있다. 형을 받기는 했지만, 그 죄질의 무게에 커다란 의문을 남겨 놓은 전범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벌하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지금도 그 노력이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희생자에 대한 보상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움직임 역시 약간 애매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1945년 9월 20일, 유대인 협회를 대표해서 하임 바이츠만이 4개국 점령 당국에 배상을 요구하는 청원을 했다. 그러나 답변은 없었다. 총괄적인 평화 조약 체결에 관한 교섭이 없었고, 평화 조약 조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방측 3 개국은, 나치 소유의 자산을 차압해서, 이를 팔아 유대인 희생자 보상을 위한 기금으로 삼았다. 그러나, 개인 한사람 한사람의 구제를 위해 선의로 시작했던 배상 계획은 번잡스러운 절차 때문에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1953년까지 처리된 배상 청구는 겨우 1만 1000 건, 지불된 것은 모두 8300만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이, 1951년 1월에는 이스라엘 수상 다비드 벤구리온이 독일 연방 정부에 대해 총액 15억 달러에 이르는 집단 배상 청구를 했다. 50만 명의 난민을 1인당 3000 달러의 비용으로, 이스라엘이 독일에서 인수했다는 것이 계산의 근거였다. 배상 청구를 하면, 독일과의 직접 교섭이 필요하게 된다.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벤구리온은 ‘우리 민족을 학살한 자들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유산까지 물려줄 수는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8억 4500만 달러의 배상금을 14 년에 걸쳐 지불한다는 합의가 성립, 아랍 나라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953년 3월 독일 의회의 비준을 받아 협정이 발효한다. 1965년까지는 모든 지불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을 근거로 연방 배상법이 독일 의회를 통과 성립해서, 개개의 희생자, 그 피부양자에 대해 생명, 신체, 건강, 직업, 자격, 연금, 보험 등에 관한 손해의 보상을 규정했다. 이 법 아래서, 희생자가 빼앗긴 자유에 대해서도 배상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 게토에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사람, 혹은 다윗의 별을 달고 다닌 기간에 대해 하루 1 달러의 비율로 배상액을 계산했다. 집안의 생활을 담당한 기둥을 상실한 가족은 연금을 받고, 옛 정부 직원은 승진을 하고, 교육 기회를 빼앗긴 일에 대해서도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희생자들은 나아가 몰수된 재산에 관해서도 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 5000 명 가까운 판사와 공무원, 그리고 사무관이 이 포괄적인 배상을 실천하는 임무를 띠고, 1973년까지는 427만 6000 건의 95 퍼센트 이상에 해당하는 청구를 처리했다. 이 조처 때문에 4반세기에 걸쳐, 독일 연방 정부 예산의 약 5 퍼센트가 충당되었다. 이 책의 원고를 쓸 때까지, 약 250억 달러가 지불되고, 20세기의 끝까지는 그 숫자가 3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배상은 관대라든지 충분이라는 표현으로 꼭 집어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바이츠만과 벤구리온의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액수를 지불했다. 독일 연방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이 저지른 죄를 보상하고 싶다는,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보상은 위에서 이야기한 조처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불만족스러운 결과로 끝났다. 독일 산업계에서는 노예 노동 프로그램에 가담한 자들이 어느 누구 하나 그 잔혹한 처사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형사상 민사상의 책임을 묻게 되면, 총력전하에서의 강제노동은 위법이 아니라며, 계속 무죄를 주장했다. 배상금 지불에 관한 소송이 제기되면, 철저하게 싸워, 단 한 푼도 지불하려 하지 않고, 비열과 오만이 교차한 태도로 일관했다. 프리드리히 플리크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를 비롯, 피고 일동을 잘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더욱이 우리가 전쟁 범죄인이라고 확신하게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Friedrich Flick 1883~1972년 : 독일 최대의 철강회사를 운영. 하인리히 히믈러와 절친한 사이로, SS에 매년 1만 마르크를 내놓았다. 2차 대전 중 4만 8000 명의 노예 노동자를 부려 떼돈을 벌었고, 이 때 80 퍼센트 가량의 노예 노동자들이 죽어 갔다. 그는 독일 최대의 갑부 소리를 들었다. 1947년 뉘른베르크의 전범 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플리크는 1 마르크도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1972년 90세로 죽을 때는 10억 달러에 이르는 자산을 (플레이보이로 알려진 그의 아들에게) 남겨 놓았다. 독일 기업 전체에서 총액 1300만 달러밖에는 지불되지 않았고, 보상을 받은 유대인의 수는 1만 5000 명도 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의 I.G. 파르벤 회사에서 노예 노동에 종사한 사람은 1인당 1700 달러, AEG 텔레풍켄에서는 1인당 500 달러 이하밖에는 받지 못했다. 강제노동의 결과 사망한 자의 가족에 대해서는 한푼도 지불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자본주의의 태도는 공산주의 정부에 비하면 그래도 윗질이다. 동독 정권은 배상 청구에 대해 답변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루마니아 정부도 마찬가지다. 1945년 이래, 억압적인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한 광범한 지역에서 유대인은 아무런 보상을 받은 일이 없다.


최악의 대응을 한 것은 오스트리아다. 국민의 대다수가 독일에 의한 병합을 원하고, 700만 국민 가운데 55만 명이 나치스 당원이 되고, 독일인과 함께 대전이 끝날 때까지 철저히 싸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대인 희생자의 거의 반수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1943년 11월에 모스크바에서 나온 연합국 선언은 오스트리아를 ‘히틀러의 야망의 희생이 되었던 최초의 자유 국가’로 규정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 후 개최된 포츠담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배상을 과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법적 책임을 벗어나자, 오스트리아의 온 정당이 협정을 맺어, 이 나라는 오히려 피해국이고, 도의적 책임을 질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1946년, 오스트리아 사회당이 밝힌 바와 같이, ‘보상을 해야 하는 것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다. 오히려 보상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해야 마땅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합국의 지시에 의해, 이 나라는 전쟁 범죄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전범 기소를 위한 검찰 기구를 설립한 것은 1963년에 접어든 다음의 일이다. 게다가 기소된 자는 대다수가 정부에 의해 은사 조처를 받고, 공판이 열리는 경우에도 증거 불충분으로 으레 무죄 사면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보상을 요구하는 유대인은 몰수된 재산이 오스트리아 국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않는 한, 독일에 가서 따지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000 달러 이상의 보상을 받은 사람은 아주 드물다.


한편 기독교 교회는 늦기는 했지만 그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가톨릭 교회도, 루터파 교회도, 중세 이래 몇 세기에 걸쳐 반유대 입장을 지속해 오며, 일반적인 유대 혐오 풍조에 박차를 가했었다. 그 종착점이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범죄 행위였던 것이다. 어느 종파나, 전쟁 중의 태도는 칭찬받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특히 로마 교황 피우스 12세는 ‘최종 해결’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입장에 서서 발언을 한 2, 3 명의 인사가 있기는 했다. 베를린에 있는 성 헤드비크 가톨릭 성당의 베른하르트 리히텐베르크 신부는 1941년, 공식 석상에서 유대인을 위해 기도를 드린 일이 있다. 신부의 아파트가 가택 수색을 당했고, 설교를 위해 쓴 메모가 발견되었다. 이 메모에서 유대인이 모든 독일인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음모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신도들에게 호소할 생각이었음이 드러났다. 신부는 금고 2년형을 받고, 형기가 끝나자 다하우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 말고는 성직자가 들고 일어난 사례를 볼 수 없다.


1943년 10월 16일, 로마에서 유대인 사냥을 목격한 사람 중에는 예수회 신부 아우구스틴 베아가 있었다. 독일의 바덴 출신으로 피우스 12세의 청죄사제(聽罪司祭)를 지낸 인물이다. 20 년 후 추기경이 된 베아는 제2 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기독교 일치 추진 사무국장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예로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주 예수의 살해자라며 유대인을 비난하는 전통을 영구히 없애 버리기로 결심한다. 추기경은 ‘유대인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공의회 초안 작성에 지도적 역할을 하고, 이를 ‘교회와 비기독교적 종교와의 관계에 관한 선언’으로 확대한다. 대상이 된 종교로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선언은 전체 회의에서의 토의를 거쳐 1965년 11월 채택된다. 선언의 내용은 아직 어설픈 곳이 있었고, 베아 추기경이 바라고 있던 솔직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교회가 유대인을 박해한 데 대한 사죄가 없었고, 기독교의 성립 과정에서 유대교가 기여한 큰 역할에 대해서도, 인식이 충분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핵심 부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교 지도자층과 그 추종자가, 그리스도 살해를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 때 취한 행위를 그들이 처한 입장의 차이를 고려하지도 않고, 또 현대인까지 몰아 넣어서 모든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일은 옳지 않다. 가톨릭교도는 하느님의 새로운 종이지만, 유대인은 하느님이 버린 자,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결론을 성서에서 이끌어 내는 일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 서술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언을 채택하는 데 대해 심한 반대가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이 선언은 문명 사회가 반유대의 입장에 정통성을 부여하기를 거부하고자 하는 큰 흐름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환영해야 할 움직임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정의를 하건, 이른바 문명 사회라는 것은 전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확신을 유대인은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영속적이고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안전 지대를 확보하는 일이 절대로 필요하다. 일단 긴급할 때에는 적의 손을 피해 전세계의 모든 유대인이 피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이 배운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제1 차 세계대전은 시오니스트 국가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제2 차 세계 대전은 시오니스트 국가의 실현을 불가결하게 했다. 유대인의 압도적 다수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대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 대가가 자신들이 되었든, 설혹 다른 것이 되었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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