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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08)

2010.03.08 00:07

김유동 조회 수:1608


제7 부 시온


홀로코스트에서 보게 된 하느님의 섭리


홀로코스트와 새로운 시온 사이에는 유기적인 연관이 있었다. 유대인 600만 명의 죽음은,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그것은 ‘수난을 통한 구제’라는,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유대인 역사에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힘찬 주제와 합치되는 것이다. 몇만 명이라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가스실을 향해 밀려갔다. ‘유대인이 받는 징벌은 하느님의 역사(役事)다. 이 자체가 하느님이 선택하셨다는 증거다. 히틀러나 친위대는 그것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믿고 있었다. 예언자 아모스에 의하면, 하느님은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아모스서 3장 2절)라고 했다. 아우슈비츠의 수난은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은 절대적인 도덕 기준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요, 앞으로 올 영광을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단순히 유대인에게 분노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 역시 슬퍼하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가스실에 들어가셨다. 유대인이 조국을 쫓겨나 해외로 이산했을 때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이것이 홀로코스트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기술이다. 역사적 관점에 서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인 수난의 결과였다.


지그조 퍼즐의 각 조각들이 어떻게 제 자리에 가서 들어맞는지를 보여 주는 것처럼, 우리는 사물이 이렇게 차례차례 일어나는 것을 보아 왔다. 1648년에 동구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보그단 후메르니츠키가 이끄는 우크라이나의 소작농, 코사크, 타타르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 있었다)이 유대인의 영국 귀환과 미국 이민의 계기가 되었음을 우리는 보아 왔다. 이 사람들이 전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 인맥을 형성해 놓았고,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필요 불가결한 분위기를 형성해 놓는다. 그리고 1881년의 유대인 학살(러시아에서의 대포그롬, 제2 차 알리야―Aliyah : 유대인의 팔레스티나로의 이민―의 원인이 됨) 또한 이스라엘 국가 창설이라는 똑같은 목표로 향하는 일련의 사건을 시동시켜 놓았다.


이렇게 해서 야기된 이민의 물결은 드레퓌스 사건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년 : 헝가리 태생의 오스트리아 작가. 정치적 시오니즘 운동의 창시자)에 의한 근대 시오니즘 운동 창설로 직접 이어졌다. 제정 러시아에 의한 유대인 박해가 조성해 놓은 유대인의 운동은 일종의 긴장 상태를 만들어 내어, 1917년의 밸포어 선언(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national home 수립하는 일을 지지한 영국의 선언. 당시의 외무장관 A. J. Balfour의 이름에서)으로 열매 맺는다. 이 선언을 실행하기 위해, 국제 연맹에 의한 팔레스티나 위임 통치가 시작되었다.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박해는 일련의 파국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것이며, 시오니스트 국가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제2 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도, 히틀러의 반유대 정책은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사회를 매우 강화해 놓는다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히틀러는 이윽고 유대인 국가를 가상 적국으로 보게 되고, ‘제2의 바티칸’, ‘유대인의 코민테른’, ‘전세계 유대 세력의 신집결지’ 등으로 불렀다. 그렇기는 하지만, 1930년대의 한 시기, 나치는 독일계 유대인의 팔레스티나 이주를 적극적으로 원조한다. 그저 단순히 6만 명이 민족의 향토로 귀환하도록해 놓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산이 팔레스티나에서의 공업, 상업의 기반을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시오니스트 계획의 최종 단계를 가져다준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히틀러가 그의 주된 적 유대인에게 노골적으로 물리적 공격을 가했는데, 이 바람에 유대인으로서는 연합국과 하나가 되어 이 독재자에게 반격할 기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의 전쟁 발발 후 이스라엘 국가를 한시라도 일찍 창설하자는 것이 시오니스트들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이 방침은 점차로 퍼져 나가, 이윽고 온 세계에서 유대인 사회의 다수 의견으로 형성되어 나간다.


그러나, 시오니스트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엄청나게 많았다. 히틀러 타도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았다. 당장, 영국, 미국,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 등 전승 3 개국에 의한 반대를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들 3 개국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영국과 시오니스트 국가


우선, 영국이 가장 중요한 입장에 서 있었다. 팔레스티나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39년의 정부 백서에서, 대영 제국은 밸포어 선언을 실질적으로 파기하고, 앞으로는 팔레스티나에서 유대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일은 용인하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제2 차 대전 중, 유대인은 영국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시에 영국의 팔레스티나 정책을 뒤집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벤구리온은 ‘우리는 백서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히틀러와 싸워야 하며, 동시에 히틀러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백서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2 개의 목적이 양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유대인이 하나로 뭉쳐 싸우는 일을 영국이 허용해 준다면, 벤구리온의 인식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었다. 나중에 팔레스티나에서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군부, 외무부, 식민부 당국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 부대를 편성하는 일에 대해 꺼림칙하게 여겼다. 실제로 1942년 말에는 영국군이 알라메인(이집트 북서부 지중해에 면한 마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중동 지역에서의 독일의 위협이 제거되자, 이 지역의 영국군 사령부는 유대인에 의한 군사 행동 전반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는 강력한 지원자가 있었다. 바로 처칠이다. 그는 기존의 유대인 소규모 부대를 핵으로 삼아 기동적인 공격 부대를 편성하자는 바이츠만(Chaim Weizmann 1874~1952년 : 러시아 태생의 화학자로 시오니즘 지도자. 후의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의 제안에 찬성해 주었다. 영국 군부는 이 계획의 실현을 여러 번 저지하려 했지만, 결국 처칠이 밀어붙이고 만다. ‘나는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든다’. 1944년 7월 12일, 영국의 군사 담당 국무장관에게 보낸 글에서 ‘나는 유대인들이 중부 유럽에서 그들의 동포를 살육한 자들을 스스로 격멸하려는 생각에 찬성한다. 그들의 적은 독일인이다. ……지금 온 세계에 흩어져서 다른 어떤 민족도 겪어 본 일이 없는 고통을 맛본 이 순교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기치를 들어올리는 일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어떤 이유도 발견할 수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있다.


2 개월 후 2만 5000 명 남짓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유대인 여단이 편성되었다. 처칠이 존재하지 않았던들, 유대인은 결코 정규 군단을 가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더더구나 여단을 편성해서 함께 활동한 이 경험이, 4 년 후의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도 영국은 팔레스티나 정책을 변경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히틀러 타도에 그 국력을 소진시켜 버린 이 마당에, 중동 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유전의 가치는 높아지면 높아졌지 내려갈 일은 없었다. 따라서 아랍 세계 사람들의 적의가 극에 달하게 만들 정도로까지, 유대인의 팔레스티나 이주 규모를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아랍 세계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한 채로 팔레스티나에서 철군을 하게 될 때까지는 위임 통치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불법적인 이주자가 팔레스티나에 상륙하는 일을 저지하고, 그래도 숨어 들어오는 이주자는 붙잡아서 강제 송환한다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었다.


1940년 11월, 1700 명의 강제 송환자를 태우고 모리셔스를 향해 출항하려던 파트리아호가 ‘하가나’(haganah=이 당시의 무장 지하 조직. 후의 정규군의 전신)에 의한 파괴 활동의 표적이 되어 하이파만에서 침몰, 250 명의 난민이 익사했다. 1942년 2월에는 루마니아에서 난민을 태운 스토루마호가 팔레스티나의 영국 당국에 의해 승객의 상륙이 거부당하자, 터키 당국의 추적을 받은 끝에 흑해에서 침몰, 770 명이 익사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서도, 유대인의 이주 제한을 유지하려는 영국의 결심에는 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나 전쟁이 끝난 다음에나 흔들림이 없었다. 25만 명의 유대인이 난민 수용소에 살아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시오니스트 지지 입장에 있었던 노동당이 1945년의 총선거에서 정권을 획득하고서도 사태는 변함이 없었다. 노동당 내각의 새 외상 어네스트 베빈은 외교관과 장군들의 의견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여전히 지구 표면의 4분의 1을 지배하고 있었다. 팔레스티나 주둔군 10만에 대해, 유대인은 겨우 6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시오니스트들이 승리를 거둘 만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노동당 정권 탄생으로부터 18 개월 후, 베빈은 팔레스티나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만다. 이블린 워(Evelyn Waugh 1903~1966년 : 영국 소설가)는 예루살렘에 대해 쓴 책에서, 그 당시 영국이 취한 행동을 평하면서, 씁쓰름하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지(聖地)를 다스리는 위임 통치권을 비겁, 게으름, 인색 같은 하찮은 이유 때문에 포기했다. 독일 황제가 거들먹거리며 말을 타고 지나간 자리를 영국의 알렌비 장군은 터벅터벅 걸어서 행진한 일이 있는데, 이제는 그 견식과 장비까지 갖추어진 대군이 소수의 무장 집단 앞에서 아무런 손상도 없이 거의 싸워 보지도 않은 채 꽁무니를 사려 버리는 초라한 광경으로 또 다시 시야가 흐릿해지고 말았다’. 도대체 어쨌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일까.



베긴과 유대인의 테러 행위


이에 대한 대답은 현대적인 세계에 제시한 또 다른 유대인의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자유주의적인 지배자의 의지를 뭉그러뜨리게 마련인 교묘한 테러의 구사 말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40 년 동안에는 흔해빠진 것이 되고 말지만, 1945년 당시에는 아주 낯선 기법이었다. 이는 홀로코스트의 부산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왜냐 하면, 홀로코스트를 겪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절망적인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수단이 머리에 떠올라 주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가장 숙련된 테러리스트는 베타르(폴란드 유대인 청년 운동)의 전 리더였던 메나헴 베긴이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의한 비통한 추억이 피가 되고 살이 된 것 같은 인물이었다. 고향 마을 브레스트 리토프스크는 주민의 7 할이 유대인이었고, 1939년에는 3만 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44년에는 단 10 명으로 줄고 말았다. 베긴의 가족도 거의가 죽음을 당했다. 유대인에게는 시체를 매장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친구를 유대인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다가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그러나, 베긴은 생존 능력을 타고났고, 복수심도 타고났다. 리투아니아에서 체포되었지만, 스탈린이 설립한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한 고문을 견디어 내고 자백하지 않은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를 조사한 담당관은 심문 끝에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너 같은 놈의 쌍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뒷날, 베긴은 이 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심문자의 신념하고 내 신념의 싸움이었다. 심문실에서도 나에게는 싸워야 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 바렌츠해에 가까운 북극권의 소비에트 노예 노동 캠프로 보내져서, 카틀라스-바르쿠타 철도의 건설에 종사했다. 여기서 살아남자, 폴란드인을 대상으로 하는 은사에 의해 노동 캠프에서 해방되어 중앙 아시아를 걸어서 횡단, 폴란드 육군의 2등병으로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1943년 12월, 수정주의파의 군대 조직 이르군(Irgun)을 장악하더니, 2 개월 후 팔레스티나의 영국 행정 당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유대인 사이에는 영국에 대한 3 개의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했다. 우선 바이츠만은 여전히 영국의 선의를 믿고 있었다. 벤구리온은 영국의 선의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전쟁에 이기는 일이 선결 문제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그는 레지스탕스와 테러를 엄격히 구별했는데, 이는 하가나의 방침에 반영되었다. 이르군의 분파에는 지도자인 아브라함 슈테른의 이름에서 따 온 슈테른 갱이라고 불리는 과격파가 있었다. 대전 발발과 동시에 야보틴스키가 발한 영국군과의 전투 중지 명령을 어기고, 전투를 계속했다. 슈테른 자신은 1942년 2월에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이츠하크 샤미르와 나탄 옐린 모르에게 이끌린 그의 동료들은 그 후로도 영국군과의 전투를 전면적으로 계속했다.


베긴은 이 둘과도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하가나를 너무나 소극적이라고 보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슈테른 갱은 난폭하고 악랄하며,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 그 자체가 아니라, 팔레스티나의 영국 당국이야말로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망신을 주면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막대한 비용을 강요해서 효율을 떨어뜨리자는 것이 그의 노림이었다. 베긴의 휘하에는 600 명의 대원이 있었다. 암살은 하지 않기로 했지만, 영국 방위위원회 사무실과 이민 관리국 건물, 징세 센터 같은 표적을 폭파했다.


이들 유대인 그룹 3개 파벌간의 관계는 언제나 긴장으로 팽팽하고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 점이 나중에 중대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다준다. 1944년 11월 6일, 슈테른 갱은 영국의 중동 문제 담당 장관 모인경(Moyne卿)을 살해했다. 경악하고 격노한 하가나는 ‘반슈테른파, 반이르군의 시즌’이라는 작전을 전개해서, 그들 중 몇 명인가를 잡아서 지하 조직 유치장에 가두었다. 더 고약한 것은, 하가나는 이들 단체의 회원과 조직 이름 700건을 영국 방위 위원회에 건네 주었던 일이다. 시오니스트 지도자층에서 준 정보에 의해 적어도 300 명, 일설로는 1000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영국군의 추적을 벗어난 베긴은 하가나도 고문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 앙갚음을 꼭 해 줄 것이다. (제 형제를 죽인) 이 카인 놈아!’라는 도전적인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러나 워낙 영리한 그는 하가나하고 전투를 벌일 정도로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견고하기 짝이 없는 지하 군사 조직을 만들어 낸 것은, 원래 같은 편이었어야 마땅한 유대인과 영국 양쪽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이 몇 달 동안의 일이다. 영국을 팔레스티나에서 배제하기 위해서는, 하가나도 결국 그에게 합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베긴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 생각이 옳았음이 곧 증명된다. 1945년 10월 1일, 벤구리온은 바이츠만에게 의논도 하지 않은 채 하가나 지휘관인 모셰 스네에게 암호 전문을 보내, 영국군에 대한 작전 행동 개시를 지시한다. 이렇게 해서 통일 유대 저항 전선이 결성되었다. 하가나는 9월 31일 밤, 철도를 폭파하면서 공격을 개시했다.


통일전선이 탄생하고서도, 공격 목표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하가나는 어떤 형태가 되었든 테러 수단에 호소하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군사 작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식의 무력 행사만을 추구한다. 1946년 4월 26일 슈테른 일파가 침대에서 자고 있는 영국 공정부대원 6 명을 살해하는 냉혹한 사건을 일으켜 놓았지만, 베긴은 이런 살해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나 그 이후나 테러리스트라고 불리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체적 리스크나 도덕적 리스크를 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애당초에 여호수아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약속의 땅’이 수중에 들어왔을 것인가. 여호수아서는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자신들의 것으로 약속된 땅을 정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말해 주는 몸서리쳐지는 기록이 아니었던가.


베긴은 영국에 팔레스티나 철수를 결심하게 만드는 2 개의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46년 6월 29일 이른 새벽, 영국군은 유대 대표 기관을 급습했다. 2718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었다. 온건파 유대인에게 리더십을 갖게 하자는 것이 노림이었다. 그러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실제로 이르군에는 손도 대지 못했기 때문에, 베긴의 입장이 강화되는 결과가 되었다. 그는 하가나에게서, 영국의 팔레스티나 행정 당국 일부가 사용하고 있던 킹 데이비드 호텔의 폭파에 대해 동의를 얻는다. 계획의 목적은 영국에 망신을 주는 일이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상자가 나올 위험성은 매우 높았다. 폭파 계획을 사전에 알아차린 바이츠만은 사직을 하면서, 그 이유를 공표하겠다고 위협했다. 하가나는 계획 중지를 제의했지만 베긴은 응하려 하지 않는다. 1946년 7월 22일 점심 시간, 예정보다 6 분 일찍 700 파운드의 고성능 폭약이 호텔 한 동을 완전히 파괴했다. 28 명의 영국인, 41 명의 아랍인, 17 명의 유대인과 5 명의 다른 나라 사람이 희생되었다. 16 세의 여학생이 미리 정해진 수순에 따라 폭파 경고의 전화를 사전에 걸었지만, 그 다음에 어찌되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베긴은 충분한 경고가 주어져 있었다고 줄곧 주장하면서, 사상자가 나온 책임은 영국측에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유대인의 죽음에 대해서만 애도했다.


그러나 이런 테러 행위에서는 폭약을 장치한 자가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유대인 당국자들의 견해였다. 하가나 사령관 모셰 스네는 사직으로 내몰린다. 저항 운동의 통일 전선은 각 구성 성분대로 분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텔 폭파라는 폭력 행위는 다른 사건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 목적을 달성했다. 즉, 영국 정부에 의한 팔레스니타 3 분할 제안이다. 유대와 아랍 연방 모두가 이 안을 거절하자, 영국 외상 베빈은 1947년 2월 14일, 팔레스티나 문제 모두를 국제 연합에 위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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