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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09)

2010.03.14 22:37

김유동 조회 수:1644


영국의 철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딱이 영국이 금방 철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따라서 테러 작전은 계속될 수밖에…. 그리고 베긴이 책임자로서 깊이 관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 사태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사건에서도 그는 슈테른이 한 것 같은 암살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이 이르군의 멤버를 처벌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르군 역시 당연히 영국군 장병을 처벌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영국군이 이르군 병사를 교살하거나 채찍질을 하면, 이르군에서도 이와 똑같이 했다. 1947년 4월, 3 명의 이르군 대원이 에이커의 감옥 요새를 공격해서 251 명의 죄수를 도망치게 만든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베긴은 그 3 명이 유죄 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받게 된다면, 보복할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 7월 29일 3 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몇 시간 후, 이르군의 작전 주임 기디 파글린은 베긴의 지시에 따라, 보복을 위해 미리 붙잡아 둔 2 명의 영국군 상사, 클리포드 마틴과 마빈 페이스의 목을 매단 다음 시체를 폭파해 버렸다. 죄를 짓지도 않은 마틴과 페이스의 두 명을 몸서리쳐지는 방식으로 살해한 데 대해 많은 유대인이 큰 쇼크를 받는다. 유대 대표 기관은 이 살인을 ‘범죄자 집단이 저지른 죄 없는 사람에 대한 비열한 살인’이라고 평했다(사건으로부터 35 년 지난 후, 마틴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어, 이 살인은 당시 생각되고 있었던 것보다 한층 뼈아픈 것으로 여겨졌다).


이 처형은 영국 본토에서 억제할 길 없는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더비 마을의 시나고그가 불태워지고, 런던, 리버풀, 글라스고, 맨체스터에서 반유대 폭동이 일어났다. 이는 13세기 이후 처음으로 보는 현상이었다. 이들 일련의 소동은 영국의 정책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 때까지 영국은, 어떠한 팔레스티나 분할도 자신들이 감독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아랍 국가의 군대가 팔레스티나로 진격해서 유대인을 몰살할 테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팔레스티나 땅에서 가능한 한 속히 철수해서, 뒷일은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맡겨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베긴의 방침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일은 가공할 위험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 위험의 크기는 어느 정도 2 개의 초강대국, 즉 미국과 러시아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시오니스트들은 어느 경우가 되었든, 행운 혹은 하느님의 배려라고 할 만한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이다.


1945년 4월 12일의 루스벨트 서거가 그 시작이었다. 얄타 회담이 있은 후, 이븐 사우드 국왕과 회담한 루스벨트는 서거하기 바로 몇 주 전에 반시오니스트의 입장으로 선회했다. 친시오니스트였던 대통령 보좌관 데이비드 나일스는 훗날, ‘만약에 루스벨트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이스라엘이 과연 탄생할 수 있었을지 어떨지 매우 의심스럽다’고 단언하고 있다. 루스벨트의 후계자 해리 S 트루먼은 전임자보다는 훨씬 솔직하에 시오니즘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반쯤은 심정적인 것이었고, 나머지 반쯤은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유대인 난민을 동정하고, 팔레스티나의 유대인을 박해의 피해자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루스벨트와 비해 볼 때, 유대인 표의 행방에 대해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다가오는 1948년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뉴욕주와 펜실베이니아주, 그리고 일리노이주 같은 큰 표밭에서, 유대인 조직으로부터의 지지 표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이 일단 팔레스티나 통치권을 포기하는 것을 보자, 트루먼은 유대인 국가 창설 지지를 표명했던 것이다.


1947년 5월, 팔레스티나 문제가 유엔의 의제로 상정되었다. 해결안 기초를 요구받은 특별 위원회는 2 개의 안을 제출했다. 위원회 소수파는 2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를 제안했고, 다수파는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창설하되 예루살렘은 별도로 국제적인 구역으로 한다는 새로운 팔레스티나 분할안을 내놓았다. 1947년 11월, 트루먼의 단호한 지지를 얻어 새 분할안은 유엔 총회에서 가결된다. 찬성 33 표, 반대 13 표, 기권 10 표였다.



미국, 소련, 그리고 기회의 창문


후에 소련과 아랍 제국, 그리고 국제적 좌익 진영에서는 이스라엘 국가의 창설이 자본주의자와 제국주의자의 음모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미국 국무부와 영국 외무부는 모두 유대인 국가 성립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그런 국가의 탄생은 서방 진영에 최악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육군성도 유대인 국가의 창설에 강하게 반대했고, 미국의 국방부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국방장관인 제임스 포레스탈은 유대인 로비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이 나라에서는 어떤 그룹이 되었든, 국가 안전 보장을 위협할 정도로까지 우리의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영국과 미국의 석유 회사들은 새 국가 건설에 대해 더 강도 높은 반대를 했다. 석유 산업을 대변해서 칼텍스의 막스 손버그는 ‘트루먼은 미국의 도덕적 위신을 실추시키고 말았다’고 했으며 ‘미국의 이념에 대한 아랍의 신뢰를 깨 버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국을 보나, 미국을 보나, 이스라엘 국가 창설을 지원하는 유력한 세력이 경제계에서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두 나라에서 이스라엘 편을 들어 준 압도적 다수는 좌익 진영에 속해 있었다.


사실, 만약에 이스라엘 창설에 관한 음모가 있었다고 한다면, 소련이야말로 그 주요한 구성원이었을 것이다. 제2 차 대전 중, 스탈린은 전술적 이유에서 반유대 정책의 일부를 중단했다. 그리고,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까지 창설해 놓았다. 1944년부터는 단기간이기는 했지만, 외교면에서 친시오니스트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그러나 러시아 내부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서, 중동 지역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가속적으로 저하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1947년 5월에 팔레스티나 문제가 비로소 유엔의 의제로 등장했을 때, 소비에트 외무 차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소련 정부가 유대인 국가 창설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그렇게 투표를 하는 바람에 주위를 놀라게 했다. 11월 13일, 유엔 총회 소비에트 대표단 단장 세미욘 차라프킨은 분할안 투표에 앞서 유대 대표 기관의 대표들을 향해, ‘장래의 유대인 국가를 위해’라며 건배를 제의하기도 했다.


11월 29일에 총회에서 벌어진 결정적 표결에서는, 소비에트 블록 전체가 이스라엘의 바람대로 표를 던졌고, 그 이후 소비에트와 미국의 유엔 대표단은, 영국의 팔레스티나 철수에 관한 타임 테이블을 밀접하게 협력해 가며 작성했다. 그뿐이 아니다. 1948년 5월 14일에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즉시 이를 사실상(de facto) 승인했음에 대해, 스탈린은 한 발짝 더 내디뎌, 3 일도 되지 않아 이스라엘 공화국을 국제법상의 정통 정부로서 정식으로(de jure) 승인했다. 아마도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체코 정부가 신생 국가 이스라엘에 무기 매각을 결정한 일일 것이다. 체코의 한 비행장 전체가 텔아비브행 무기 수송을 위해 제공되었다.


이스라엘의 탄생과 존속을 위해, 이 타이밍은 그야말로 천금과 같은 것이었다. 스탈린은 1948년 1월, 러시아계 유대인 배우인 셸로모 미호엘스를 살해하게 한다. 이 사건은 스탈린의 강렬한 안티세미티즘이 정책으로 자리바꿈하는 조짐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해외에서의 반시오니즘 전환은 이보다 좀 늦어졌지만, 같은 해 가을까지는 결정적인 상황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될 즈음,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존립을 확실하게 다져 놓고 있었다.


미국의 정책도 변해 가고 있었다. 냉전으로 말미암은 긴장이 증대됨에 따라, 전후에 볼 수 있었던 미국의 이상주의가 사그라들면서, 트루먼도 국방부와 국무부의 조언을 전보다 주의 깊게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만약에 영국의 철군이 1 년만 늦어졌더라도, 미국은 이스라엘의 건국에 대해 훨씬 열성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소련이 반대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영국의 정책에 테러로 대항한 작전은 아마도 건국 실현을 위해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47년부터 48년에 걸친 수개월간의 짧은 기간, 우연히 벌어진 역사의 틈바구니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형식으로 이스라엘은 이 대사업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행운 혹은 하느님의 배려였다.


그러고 보니, 만약에 베긴의 가차없는 태도가 영국의 조기 철군을 초래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국가 탄생을 실현하게 해 준 것은 벤구리온이었다. 한 발짝만 삐끗해도 팔레스티나의 유대인을 파멸로 굴러 떨어뜨리고 말 것 같은 결정을 숨 돌릴 틈 없이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말이다.


유엔에서 팔레스티나 분할안이 채택되자마자, 아랍인은 모든 유대인 입식지를 파괴하기로 작심하고, 즉각 공격을 개시했다. 아랍 연맹 사무국장인 아잠 파샤는 라디오 방송으로 ‘대살육과 유대인 말살의 싸움이 사작되었다’고 선언했다. 유대측 지휘관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기는 했지만, 무기와 병력은 열세였다. 1947년 말까지 하가나는 소총 1만7600 정과 스텐 건(영국 육군에서 쓰던 경기관총) 2700 정, 그리고 기관총 1000 정 가량을 마련해서, 숙련도가 제 각각인 2만 내지 4만3000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장갑차와 중화기, 항공기는 거의 없었다.


아랍측은 상당한 규모의 팔레스티나 해방군을 조직해 놓고 있었지만, 지휘 계통이 산만했다. 아랍 나라들은 또한 정규군들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집트 1만, 시리아 7000, 이라크 3000, 레바논 3000 명이 있었고, 이에 더해 영국군 장교를 포함하는 트랜스요르단의 정병 4500 명이 있었다.


1948년 3월까지는 1200 명이 넘는 유대인이 아랍측의 공격으로 죽는데, 그 반수를 민간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같은 달 마침내 체코에서 무기가 도착하기 시작해, 4월에는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영국의 위임 통치 기한은 5월 15일까지였다. 그러나 4월에 접어들자 벤구리온은 일생 일대의 중대 결심을 한다. 팔레스티나에 드문드문 산재한 유대인 거주지를 이어 놓기 위해서 공세를 취해, 유엔에서 이스라엘에 할당한 영토를 최대한으로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도박은 거의 완벽하게 성공을 거둔다. 하이파를 점령하고, 티베리아와 동부 갈릴리로 통하는 길을 열고, 사페드, 야파, 아크레를 제압했다. 이스라엘 국가의 핵이 될 이런 부분을 확보하면서,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


5월 14일 금요일, 벤구리온은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우리의 국가적이고 본원적인 권리에 입각해서, 그리고 유엔총회에서의 결정에 준거해, 우리는 이에 팔레스티나에서의 유대인 국가 성립을 선언하고, 그 명칭을 이스라엘국이라 한다’. 즉각 임시정부가 발족했다. 그 날 밤, 이집트 공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이튿날 마지막 영국인이 떠나는 것을 기해 아랍군의 침입이 시작된다. 한 가지만 빼고 사태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요르단의 아랍 군단이 압둘라 국왕을 위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 유대군은 5월 28일 구시가지에서 철수한다. 그 바람에 성도(聖都)의 동쪽에 입식해 있던 유대인은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일만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측은 지배 지역을 더욱 넓혀 놓았다.


6월 11일, 1 개월의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그 사이에 아랍 여러 나라들은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한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대량의 중장비를 체코에서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조달했다. 프랑스의 주된 동기는 영국에 대한 노여움 때문이었다. 7월 9일에 전투가 재개되자, 전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했다. 이스라엘군은 리다(Lydda=Lod), 라믈레, 나사렛을 탈취하고, 유엔 분할안의 선을 넘어 상당한 지역을 점령했다. 전투 재개 후 열흘도 지나지 않는 사이에, 아랍측은 제2차 휴전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간헐적인 사격전이 있었고, 10월 중순 이스라엘군은 네게브 입식지로 통하는 길을 얻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세로 브에르셰바의 마을이 함락했다.


연말까지 이스라엘 병력은 10만여를 헤아리게 되고, 장비도 많이 정비되었다. 태고적에 잃어버린 후로 처음으로 이 지역에 군사적 우월성을 확립한 것이다. 휴전 회의가 1949년 1월 12일에 로드스 섬에서 열렸다. 이집트가 2월 14일, 레바논은 3월 23일, 트랜스요르단이 4월 3일, 시리아는 7월 20일 각각 이스라엘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했다. 이라크만큼은 어떤 협정도 하지 않은 채, 5 개국은 제대로 이스라엘과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데이르 야신 마을의 학살과 난민 문제


1947년에서 이듬해인 1948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은,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한편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아랍-이스라엘 문제를 잉태해 놓았다. 여기에는 난민과 국경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따로따로 고찰해 보는 것이 좋겠다.


먼저 난민 문제다. 유엔의 통계에 의하면, 위임 통치하의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던 아랍인 65만 6000 명이 이스라엘의 지배 지역을 빠져 나왔다. 그 내용은 요르단강 서안의 28만 명, 트랜스요르단으로 7만 명, 레바논으로 10만 명, 이라크로 4000 명, 시리아에 7만 5000 명, 이집트로 7000 명, 가자에 19만 명이다(이스라엘에서는 이보다 적은 55만 명에서 60만 명이라는 숫자를 들어 놓고 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떠난 이유는 4 가지다. 전투에 말려들어 죽는 일을 피하려는 것, 행정 기구가 붕괴되고 만 것, 아랍측의 라디오 방송에 의해 퇴거 명령을 받았거나 잘못된 지시를 받은 일, 혼란과 패닉에 빠진 일, 그리고 이르군과 슈테른의 무리가 1949년 4월 9일에 일으킨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의 학살 때문에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진 일 등이다.


이 최후의 사건은, 그것이 이스라엘 건국의 도의적 정통성과 관계된 것인 만큼 정밀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1920년 이후로 줄곧, 아랍측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테러 공격을 해 왔다. 이에 대해 적절한 대처를 하는 일은 있었지만, 유대인은 아랍인 입식지에 대한 테러 행위는 스스로 억제하고 있었다. 1947년부터 이듬해에 걸친 겨울 전투가 개시되었을 때, 채석을 생업으로 하는 인구 1000 명도 되지 않는 아랍인 마을 데이르 야신이 인접해 있는 예루살렘 근교의 마을 기바트 샤울과 불가침 약속을 한다. 그랬는데, 부근의 유대인 입식지 2 개소가 유린당하고 파괴되는 바람에 복수를 부르짖는 소리가 높아졌다.


슈테른당은 아랍인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 데이르 야신 마을 파괴를 제안한다. 이르군의 상급자 예후다 라피도트는 ‘이 작전의 명확한 목적은 아랍의 기를 꺾고,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동체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 있다. 끊임없는 공격을 당해 왔고, 특히 최근 아랍측의 수중에 떨어진 유대인의 시체를 모독당한 일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고 증언하고 있다. 베긴은 작전 실행에 동의했지만,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확성기를 실은 소형차를 준비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항복의 기회를 주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하가나의 지방 사령관도 내키지 않으면서도 작전 실시를 허가하고, 좀더 엄한 조건을 덧붙였다.


습격 작전에는 80 명의 이르군과 40 명의 슈테른 대원이 참가했다. 확성기를 실은 소형차는 구덩이에 빠져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아랍측은 항복을 마다하고 싸움을 결의했고, 예상 이상으로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 바람에 이르군과 슈테른의 연합군은 중기관총과 2 인치 박격포를 가진 정규군 소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규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아랍측의 저항을 종식시켰다.


습격대가 마을로 들어가 상궤를 벗어난 행동을 한 것은 이 시점이다. 습격대와 함께 행동하고 있던 하가나의 스파이는 ‘통제를 벗어난 살육’이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습격대는 23 명의 남자들을 채석장으로 데려가 사살했다. 어떤 아랍인 목격자는 이 말고도 마을 안에서 93 명이 죽어 갔다고 증언했는데, 희생자의 수가 250 명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베긴은 상세한 습격 상황을 보고받기 전에, 당일의 명령을 여호수아기와 같은 고양된 기분을 곁들여 전달했다. ‘훌륭한 제압 행위에 대한 나의 찬사를 받으라. ……데이르 야신에서처럼 도처에서 우리는 적을 공격하고 섬멸할 것이다. 하느님, 하느님, 당신은 정복을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잔학 행위의 뉴스는 침소봉대한 꼴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는데, 이 보도가, 그 후 2 개월에 걸쳐 많은 아랍인이 이스라엘 영내에서 도망치는 이유가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데이르 야신 사건이 그런 일을 노리고 획책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다른 요인과 어우러져, 이 사건은 신생 이스라엘 국가 안에 있던 아랍인 인구를 겨우 16만 명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일이 매우 효과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아랍 여러 나라들도 그 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 출국을 권유하기도 하고 강제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과거 2500 년에 걸쳐 유대인이 살아 온 곳도 포함되어 있다. 1945년의 시점에서 아랍권에는 5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15일의 전쟁 발발에서 1967년 말 사이에, 이 중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로코에서 25만 2642명, 알제리아에서 1만 3118 명, 튀니지에서 4만 6255 명, 리비아에서 3만 4265 명, 이집트에서 3만 7867 명, 레바논에서 4000 명, 시리아에서 4500 명, 아덴에서 3912 명, 이라크에서 12만 4647 명, 그리고 예멘에서 4만 6447 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총계 56만 7654 명에 달하는 이들 아랍권에서 온 유대인 난민은 이렇게 따져 볼 때 숫자상으로는 이스라엘에서 떠난 아랍 난민의 숫자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난민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대우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각 나라들의 정책의 차이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신생 국가를 유대인의 향토로 삼는다는 정책의 일환으로서, 유대인 난민 모두를 조직적으로 입식시켰다. 한편 아랍 각국 정부는 유엔 원조 하에 난민을 캠프에 수용했다. 팔레스티나를 되찾을 때까지의 잠정적 조처라고 했지만, 그런 때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지만, 인구의 자연증가로 1980년 후반에는 아랍인 난민의 수가 40 년 전보다 늘어 있었다.


난민을 대하는 양자의 대조적인 태도는 교섭에 대한 대처 방식이 기본적으로 다른 데서 온 것이다. 유대인은 2000 년 동안 무력 행사를 선택지로 갖지 못한 피억압 소수 민족으로 일관해 왔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교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가끔씩은 간신히 목숨만 구하기도 하는 등, 거의 대부분의 경우, 매우 약한 입장에서 교섭을 하곤 했다.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은 교섭 기술을 연마했을 뿐 아니라. 교섭에 관한 사고와 철학을 이룩해 놓고 있었다. 합의에 이를 가망이 전혀 없을 때에도 단념하지 않았고, 아무리 조건이 나쁘고 불리하더라도 합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었다. 교섭을 계속하다 보면, 그리고 자신들이 노력하기만 하면 나중에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력보다는 대화가 낫다는 생각은 그들의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증거가 산더미처럼 나오고 나서도, 그들이 히틀러의 가늠할 수도 없이 거대한 악을 이해할 수 없었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사고방식이었다. 거래를 전혀 원하지 않고 오직 목숨만을 원하는 사나이가 있다는 것을, 그들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대조적으로 아랍인은 정복하는 민족이었다. 성스러운 책(코란)은 다른 하찮은 딤미(dhimmi :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이민족. 그들의 눈에는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열등한 존재)에 대해 최대의 것을 강요하는 그들의 입장을 고무하고, 이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최종적인 해결을 향해 교섭한다는 사고 자체가 원칙을 접는 일이었다. 정전이나 휴전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후에 무력을 행사한다는 선택지를 남겨 놓을 수가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약은 일종의 패배로 비쳤다. 이것이야말로 아랍인이 난민들의 정착을 바라지 않았던 이유다. 난민이 아랍 나라들에 자리를 잡아 버리면, 싸움의 도덕적 근거가 최종적으로 상실되고 만다. 카이로 방송은 이렇게 말했다. ‘난민은 이스라엘과 싸우는 아랍을 위한 투쟁의 초석이다. 난민은 아랍 민족, 아랍 내셔널리즘의 무기다’.


따라서 1959년에, 아랍측은 난민 재정착에 대한 유엔의 플랜을 협의조차 하지 않고 거절했다. 이에 뒤이은 4반세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되풀이해서 내놓은 난민에 대한 보상 제안을 받는 일조차 계속 거부한다. 그 결과 아랍 난민과 그 자녀들이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아랍 나라들의 국가 체제상 난민은 불안정 요소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이 문제 때문에 요르단이 붕괴할 뻔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절묘한 세력의 균형 위에 서 있던 레바논의 정치 시스템이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완전히 파괴되고 만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교섭에 임하는 방식의 차이는, 이스라엘 국경선 확정에서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유대인측에는 새 국가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즉 ‘내셔널 홈’(민족의 鄕土), ‘약속의 땅’, ‘시오니스트의 나라’의 셋이다.


첫 번째, ‘내셔널 홈’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저 단순히 유대인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얻는다는 것이 유대인이 바라는 모두라면, 그 장소는 아무 곳이라도 좋았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 우간다. 마다가스카르 섬 등이 지난날, 후보지로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계획에는 유대인이 흥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금방 판명되었다. 약간이나마 관심을 보인 것은 엘 아리시(El Arish : 북 시나이에 있는 이집트령)로의 이주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장소가 팔레스티나에 가깝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이라는 두 번째 견해는 어떨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생각은 세속적인 사람이냐 종교적인 사람이냐를 불문하고 모든 유대인의 가슴에 와 닿는 바를 가지고 있었다. 예외는 메시아가 출현할 때가 아니면 시온으로의 귀환은 있을 수 없다는 경건한 유대교도와, 아무 곳으로도 이주할 생각이 없는, 정착지에 동화해 버린 유대인뿐이었다.


하지만,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미 보아 온 바와 같이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주었을 때, 정확한 경계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스라엘인이 실제로 점거한 땅을 가리키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느 시대에 점거한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사실, 다윗 왕의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 이렇게 두 번 통일 국가가 나타났고, 두 신전이 있었다. 시오니스트의 일부는 새 국가 이스라엘을 제3 신전 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느 신전 시대를 계승해야 하는 것일까. 다윗 왕국은 (솔로몬 왕국은 그렇지 않았지만) 시리아를 포함하고 있었고, 하스몬 왕조도 한때,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들 고대 왕국은 모두 최성기에 작은 제국을 형성해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준유대인과 완전한 비유대인까지도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2 개 왕조가 유대인의 ‘내셔널 홈’ 창설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시오니스트 국가의 모델이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고대에 지배하고 있었던 팔레스티나 각지의 영유권을 지금까지도 유대인이 가지고 있다는 정서적 신념은 강했다. 1919년의 파리 강화회의에 시오니스트들이 제출한 계획 속에도 그런 것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라파에서 시돈(사이다)에까지에 이르는 해안선 모두와 요르단강의 양안, 그리고 다마스쿠스-암만-히자스 철도 바로 서쪽을 달리는 동부 경계 지역을, 장래의 유대 국가 영토로 요구한 이 제안은 예상했던 대로 기각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야보틴스키가 이끄는 수정주의파의 계획 속에 끈질기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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