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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10)

2010.03.21 06:54

김유동 조회 수:1551


시오니스트 나라의 국경


마지막으로 ‘시오니스트’ 국가다. 이는 유대인이 현실적으로 획득하고 입식하고 개발해서 지켜 낼 수 있는 영토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시오니스트의 주된 단체가 채택했던 것이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스라엘 국가 자체의 정책으로 삼아 놓은 것이, 바로 경험을 밑거름으로 삼은 이 현실적인 사고였다. 이는 유대인이 그들의 교섭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 지도자는 유대인이 점거하고 방위할 수 있는 곳으로서, 정리가 잘 된 지역을 포함하는 경계선이라면, 어디가 되었든 합의를 표명할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위임 통치기와 그 후의 모든 단계에서 유대인은 느긋한 태도를 취하고, 그들에게 제시된 어떤 분할안이 되었든, 그것이 타당한 내용의 것이기만 하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1937년 7월, 필 위원회(위원장인 영국인 Robert Peel 卿의 이름을 땀)는 메툴라에서 아풀라까지의 갈릴리 지방과 가자의 북쪽 20 마일 지점에서 아크레까지의 해안선을 따른 지역만을, 그것도 후자에 관해서는 영국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고립지를 위한 회랑을 제외하고 유대인에게 주겠다는 분할안을 제시했다. 유대인은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의 4분의 3을 받기로 되어 있던 아랍측은 토의도 하지 않은 채 이 안을 거부해 버렸다.


1947년에 다음 분할안이 유엔에서 제안될 때까지 유대인의 입식지는 계속 변하고 있었고, 이 안은 그 실태를 반영한 것이 되었다. 당시 아랍인 거주 지역으로 되어 있던 아크레와 서갈릴리는 유대인 것이 되지 않고, 그 대신 네게브의 거의 모두와 사해 지역의 일부가 유대측 영토로 덧붙여졌다. 지난번 필 위원회의 안에서는 유대측 지역이 팔레스티나의 2 할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 유엔안에서는 5 할이 할당되어 있었다.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 요르단 강 서안 지역 모두, 특히 예루살렘이 제외되어 있었으므로, 어찌 정의를 내리든 이는 ‘약속의 땅’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를 수락했다.


이처럼 경험에 근거한 그들의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였던 아바 에반이 다음과 같은 명쾌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의 외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대외 교섭 책임자가 되어 있던 인물이다. 에반에 의하면, 유대인이 그들의 종교적, 역사적 의의가 깊은 지역을 포기하는 데 동의한 것은 ‘영토 분할이라는 요소가 유대 국가 형성 과정에 이미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대 국가 건설이 ‘정치적 구체성’을 띠게 된 시점, 즉 유엔에 의한 위임 통치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그랬다는 것이다. 시오니스트의 입식 계획은 ‘실존하는 인구학적 현실에 대해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아랍인의 토지 소유가 확정되어 있지 않은 장소에 유대인을 입식시킨다’는 생각에 입각하고 있었다.


아랍인은 예전에 이스라엘인이 정착했던 지역을 따라 살고 있었으므로, 현대의 유대인은 예전 불레셋인이 있던 해안 평야 쪽과 예즈레엘의 골짜기로 갔다. 이 곳은 말라리아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에 아랍인이 기피해 온 토지다. ‘유대인 입식의 원칙은 언제나 현실적, 현대적이었을 뿐, 종교적, 역사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에반은 말했다. 따라서 유엔에서의 교섭에서도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역사적 기반을 고려했다. 그러나 고대의 사실(史實)을 근거로 해서, 특정 지역이 우리 영토라고 주장한 일은 한 번도 없다. 헤브론의 마을에는 아랍인이 넘치고 있었으므로 이를 요구하지 않았다. 베에르 셰바는 그 곳에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손에 넣었다. 아랍인을 몰아내지 않고도, 그리고 그들의 강한 사회적 결속을 흐트러뜨리지 않고도, 인구 밀도가 높은 유대인 사회를 만들어 낼 여유가 이스라엘의 땅에는 충분히 있다는 것이 시오니스트 운동의 전제가 되는 명제였다’.



그들의 철학이 이러했기 때문에, 분할안에 의해 경계가 정해지고 나면 국가의 운영과 방위가 몹시 어렵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대인은 유엔안을 받아들였다.


이 분할안에는 팔레스티나 국가 수립이 약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측은 이 분할안을 전혀 검토도 하지 않고 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곧장 무력에 의한 해결을 추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과, 1948년 6월부터 11월까지 벌어진 다툼의 결과, 이스라엘 국가의 영토는 팔레스티나 전체의 8 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국경선 덕분에 이제는 좀 어설프기는 하지만, 나라로서 기능할 수 있고 방위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한편 팔레스티나의 아랍인들은 국가를 세울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가자 지구와 요르단의 통치하에 있는 요르단 강 서안이 남겨져 있었을 뿐이다.


아랍측이 대화하기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경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1949년의 휴전 라인을 기점으로 삼는, 항구적인 국경에 관한 합의를 시도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토의 일부를 양도할 용의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최종적 결정만 얻을 수 있다면, 이를 수용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협상은 제안할 수조차 없었다. 원초적으로 아랍측은 이스라엘과의 직접 교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엔의 팔레스티나 조정 위원회를 통해 여러 차례 교섭이 벌어졌다. 아랍측은 1947년의 유엔 분할안의 선까지 이스라엘이 철수하라며 양보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들여지거나 승인된 일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보답으로 신생 이스라엘 국가를 승인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휴전을 평화의 서장(序章)으로 보았음에 비해, 아랍측은 휴전을 일시적인 정전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의 형편이 좋아지기만 하면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발판으로 간주했다. 게다가 아랍 제국은 각각이 체결한 휴전 협정의 조항을 준수할 마음이 없었다. 이스라엘 시민을 표적으로 하는 아랍 페다인(fedayeen : 단수는 fedayee. 그들의 나라를 위해 그 자신을 바치는 자들. 오늘날의 자살 특공대가 이것)의 습격과 테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경제에 대해 실행되는 보이코트와 봉쇄를 엄폐하기 위해 휴전 협정을 이용했던 것이다. 아랍측 입장의 휴전이란, 바로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계속이므로, 1947년 11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실제로 거의 모든 주변의 아랍 제국과 진정한 의미의 전쟁 상태에 있다.


이 현실은 시오니스트 국가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를 하게 만들었다. 세속적인 초기 지도자들은 시오니스트 국가를 평화주의와 협동주의를 기초로 한 유토피아로 파악하고 있었고, 종교적인 선구자들은 거룩한 신정 국가라고 간주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양자가 보조를 맞추어, 그 에너지를 국가의 안전 보장을 최대한 확립하는 데 쏟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근대의 입식자들은 언제나, 아랍인의 습격에서 몸을 지키기 위한 방벽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의 대전을 거치는 사이에 방벽은 점차로 복잡하게 전문가의 손질을 받게 된다. 그러나 1949년 이후에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안전 보장이 국가 전체의 항구적이고 최우선적인 과제라는 현실을 서서히, 마음은 내키지 않는 가운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점차로 교묘해지는 아랍의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좀더 꼼꼼한 국내 치안 대책을 강구해야 했을 뿐 아니라, 외적에 대비하기 위해 다각적인 방위 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군은 모든 아랍 나라들에 의한 동시 공격에 대해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신생 국가 이스라엘의 군사 예산은 이 현실을 기초로 해서 결정된다. 외교 관계도 마찬가지다.



시나이 전쟁과 6 일 전쟁


실제로, 1948년에서 78년 초까지의 30 년간, 이스라엘은 생존을 걸고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필사적인 노력을 하면서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휴전 협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최초의 7 년 동안에 1300 명의 이스라엘인이 아랍측의 습격으로 죽었고, 테러리스트의 기지에 대한 이스라엘로부터의 보복 공격도 해를 거듭할수록 격해졌다. 1951년 7월 20일, 아랍 온건파에 속하는 마지막 인물,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이 암살당한다. 이듬해 7월 23일 군부가 이집트 국왕을 추방하고, 이어서 1954년 2월 25일, 이스라엘 섬멸을 공언하는 대중주의적 독재자 가말 압둘 나세르가 정권을 장악한다. 스탈린은 이미 1953년에 사망하기 한 달 전에 이스라엘과의 국교를 단절해 놓고 있었다. 이집트와 체코 사이에 무기 공급 협정이 체결된 1955년 9월 이후, 소비에트 진영은 아랍 나라들을 상대로 대량의 신형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동맹 관계에 힘을 얻은 나세르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숨통을 죄어 섬멸할 계획을 시동한다.


1951년 9월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비난 결의가 채택되었지만, 이집트는 줄곧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1956년 이후, 나세르는 아카바만으로의 이스라엘 선박 진입까지도 거부한다. 그 해 4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 사이에 군사 협정이 체결되고, 7월에 수에즈 운하를 접수, 10월 25일에는 요르단과 시리아가 군의 지휘권을 통합했다. 바작바작 숨통을 죄어 옴을 감지한 이스라엘은 10월 29일에 선제 공격을 감행, 시나이 반도의 미틀라 통로 제압을 목적으로 공수부대를 강하시킨다. 전쟁은 단기간에 대세가 결정나고, 운하 지역에 상륙한 영불군과 호응해서 이스라엘은 시나이 전역을 평정, 가자를 점령하고, 페다인의 활동을 종결시켰으며, 아카바로 통하는 해상 루트도 확보했다.


비록 영불군 참전으로 그 군사력의 평가가 다소 엷어지기는 했지만, 시나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소비에트의 최신 무기에 맞서서 국가를 방어할 군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내외에 보여 주었다. 그러나 전투 종료 후에 체결된 협정은 다시 애매한 것이 된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재무장시키지 않고, 유엔군이 진주해서 방어적 완충지대를 설정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이스라엘은 시나이에서의 철군에 합의했다.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이 결정은 10 년간 계속된다. 그러나 습격과 테러는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 시리아 역시 소비에트 진영에서 공급한 무기로 무장한다.


1967년 봄, 병력을 재편성해서 장비를 새로이 한 나세르는 다시 한번 공격할 결심을 한다. 5월 15일 유엔군에 철수를 명하고, 10만 명의 군대와 기갑부대를 동원해서 시나이 반도를 재무장했다. 유엔군은 요구에 응했다. 5월 22일, 이스라엘 선박의 티란 해협 항행 금지로 아카바만을 다시 봉쇄한다. 8 일 후,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카이로에서 이집트와의 군사 협정에 서명해서, 정세는 더욱 긴박해졌다. 같은 날, 이라크군이 요르단 영내에서 공격 준비를 완료한다. 이런 상황 아래서 이스라엘은 다시금 선제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은 지상에 있던 이집트 공군기를 거의 모두 파괴한다. 이 작전의 귀추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은 요르단과 시리아는 이집트측에 붙어서 전단을 연다. 이스라엘은 이를 독립 전쟁 이래의 변칙적 상황을 해소하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즉 6월 7일 예루살렘의 구시가지를 탈취해서, 전 시가지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확보한다. 그 이튿날에는 요르단강 좌측 연안을 장악한다. 그리고 다시 이틀 사이에 골란 고원을 강습해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코스에서 30 킬로 지점까지 진출했다. 동시에 시나이 반도 전역을 다시 점령한다. 이렇게 진행된 6 일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은 건국 후 처음으로 방위 가능한 국경선을, 그리고 수도로서 잘 알려져 있던 유대의 역사적 유산을 수중에 넣었다.



속죄일 전쟁과 이집트와의 평화


그러나, 이 눈부신 승리도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수에즈 운하의 동쪽에 자리잡은 이른바 바르 레브 라인 같은 견고한 방위 라인만 있으면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근거도 없는 자신감과 잘못된 신뢰가 싹텄다. 선전전에서는 언제나 승리를 거두면서도 전쟁에서는 계속 지기만 한 나세르가 죽자, 동료로서 좀더 강경한 안와르 사다트가 그 뒤를 이었다. 행동의 자유를 늘리기 위해, 사다트는 1972년 이집트에 머물러 있던 소비에트 군사 고문단을 내쫓는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소비에트로부터의 무기 공급 정지로까지는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세르가 아랍 여러 나라들과 맺어 놓은 눈부실 정도의 정치적 군사적 동맹 관계를 폐해 버리고, 그 자신은 이스라엘 공격 계획을 은근히 획책하면서 이를 조정하는 일에 몰두했다.


지금까지 줄곧, 이스라엘군은 이론상 열세였다. 그래서 1948년 4월, 1956년 10월, 그리고 1967년 6월의 세 번에 걸쳐 기습에 의한 전술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선제 공격을 하지않을 수 없었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우세를 믿고 있지 않은가. 그 틈을 찌른 것이 사다트다. 시리아와 협력해서 1973년 10월 6일 욤 키푸르, 즉 ‘속죄일’에 경고도 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기습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어, 이스라엘군을 제압한다.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은 함께 이스라엘의 방위선을 돌파했다. 아랍측의 대전차, 대항공기 미사일은 예상외로 성능이 좋아서, 이스라엘군의 항공기와 기갑부대가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국가가 탄생한 지 4분의 1 세기,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대패배의 위기에 직면해서, 제2의 홀로코스트가 일어날 가능성까지 있었다. 그러나 10월 9일, 시리아군의 진격이 억지되었다. 다음날 이스라엘에서의 필사적인 간청에 호응해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최신 무기의 긴급 공수를 개시했다. 2 일 후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에 대해 과감한 반격으로 전환해, 운하를 건너서 그 서안으로 진출, 시나이에 전개한 이집트 전군의 퇴로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것이 전쟁의 분수령이 된다. 이스라엘은 신속히 1967년과 똑같은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10월 24일, 정전이 성립되었다.


이스라엘이 정전을 받아들인 것은 군사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심리적 요인 쪽이 크다. 과거 네 번의 전쟁을 통해, 아랍과 이스라엘의 입장은 아주 달라서, 대칭성이 없었다. 아랍 나라들은 여러 번 전쟁에 지더라도 상관없었지만, 이스라엘로서는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승리한다고 해서 평화를 쟁취할 수가 없지만, 그 패배는 곧바로 파멸을 뜻했다. 이집트에 대해서는 언제나 가장 위험스러운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 줄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적대자 가운데서 가장 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라였다. 이집트 국민은 진정한 의미의 아랍인이 아니다. 이집트는 중동에서의 리더십을 장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위신을 중시했다. 뿌리 깊은 감정적 동기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게 된 이집트령에서는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상당한 규모의 유전이 개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용한 것이라지만 그것은 유대인의 역사적 유산의 일부는 아니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이집트와의 화평은 실현이 가능했다. 다만 상처받은 이집트군의 자존심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1973년 서전의 승리로 상처는 아물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선전이 효과를 발휘해, 이 때의 승리는 실제보다 휘황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집트와의 화평을 실현하는 데는 또 하나의 장애가 있었다. 건국 이래 이스라엘에서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 내각이 정권을 담당해 왔다. 이 정권은 아바 에반(Abba Eban 1915~2002년 : 이스라엘의 외무장관을 오래 지낸 정치가, 웅변가)의 발언에도 나타나 있는 것처럼 국경에 대해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야당은 국경 문제에 대해 야보틴스키류의 비타협적인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다. 이집트와의 화평은 실제로도, 그리고 잠재적으로도 이스라엘 영토의 대폭적인 할양을 의미하고 있었다. 국민의 의지를 통일할 필요가 있었지만, 야당의 반대는 확실했다. 그러던 것이 1977년 5월의 선거에서 노동당이 패배하고,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정권이 수정주의파의 계통에 속하는 베긴의 리쿠드당으로 넘어간다. 민주적 사회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역설적 현상이지만, 이 정권 교체에 의해 화평이 실현되기 쉬워졌다. 베긴은 영토에 대해 일절 타협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었다. 그런 베긴이었으므로 벤구리온 이래로 노동당 당수가 어느 누구도 감행할 수 없었던 대담성을 가지고 영토를 안전 보장과 거래할 수 있었다.


요르단의 압달라 국왕 이후, 아랍 세계의 첫 번째 현실주의자인 사다트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리쿠드의 승리에서 반 년도 지나지 않은 1977년 11월 9일, 사다트는 교섭 개시를 제안한다. 화평을 실현하는 과정은 길고도 복잡했으며 어려웠다. 교섭의 가교 노릇을 한 것은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었고, 필요한 비용은 관대한 미국 납세자가 지불했다. 이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었다. 최종적인 교섭은 대통령의 여름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1978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쉬지 않고 벌어졌다. 이 사이 한 발짝도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던 베긴은 캠프 데이비드를 고급 강제 수용소라고 불렀다. 합의 내용을 상세한 조약으로 삼는 데는 다시 6 개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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