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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11)

2010.03.28 07:34

김유동 조회 수:1801


양자간의 타협은 에누리가 없는 진솔한 것이었다. 그래서 합의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 그 남부 국경을 완전히 보장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균형 정책을 실질적으로 그만두었다. 이 결과 이스라엘은 비로소 진짜배기 안전보장을 어느 정도 확보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반환했다. 유전과 공군 기지, 입식지 등 많은 고려가 곁들여진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또 요르단 강 서안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나아가 예루살렘에 관해서조차 양보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 그 조건은 팔레스티나인과 다른 아랍 나라들과의 보충적 조약 체결이었다. 그러나 이들 양보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합의는 팔레스티나의 아랍인에게 1947년 유엔 분할안에 입각해서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건만, 그들은 다시금 협의에 참여하지 않은 채, 제안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이 결과, 이스라엘의 수중에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땅이 남겨진 채로 있다. 국제적으로 승인된 정식 영토가 아니라, 여전히 ‘점령지’로서 말이다.


역사적인 타협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이 조약은 서명자에게 크나큰 희생을 치르게 했다. 베긴은 오래 전부터의 정치적 맹우를 몇 명 잃었고, 이스라엘의 적 가운데서 가장 위험해서 마음 놓을 수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도량이 컸던 사다트는 암살당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평화 조약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조약이 맺어진 타이밍 역시 더할나위 없을 만큼 중요했다. 1920년대 이후, 아랍의 힘의 원천은 경제와 외교 양면에서 언제나 페르시아만 주변과 이라크 북부의 유전에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석유의 중요성은 극적으로 증대한다. 1960년대, 원유 수요의 신장이 줄곧 공급의 증가를 넘어서더니, 1973년 이 경향은 속죄일 전쟁에 호응한 중동 산유국들이 정치적으로 결속하는 바람에 결정적으로 강화되었다. 원유 가격은 배럴당 3 달러에서 10 달러로 3 배나 뛰었다. 1977년까지는 다시 12 달러 68 센트로까지 상승했다. 1979년부터 80년까지에 다시 3 배가 되고, 1980년 말에는 배럴당 38 달러 63 센트에 도달했다.


원유에서 나오는 수입이 10 배 이상 증가한다는 엄청난 원유 가격 혁명의 결과, 아랍 제국의 무기 조달 자금과 반이스라엘 테러 지원 자금은 막대한 규모가 되었다. 그리고 서구 제국과 제3 세계에 대한 아랍 제국의 외교상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이라크에 최신형 원자로를 건설한다. 급속한 이라크의 군사 능력 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이스라엘은 1981년 6월 7일, 공습을 해서 이 원자로를 파괴했다.


제3 세계의 몇몇 나라는 아랍측의 압력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 유엔에서는 아랍 나라들의 영향력이 눈부시게 강화되었다. 그 결과 1975년의 총회에서 시오니즘은 인종 차별주의와 같다는 결의가 채택된다. 그리고 유엔과,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의 우호국이었던 많은 나라들이 무프티(mufti : 이슬람 율법학자, 즉 지도자.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대율법학자 Hajj Amin al-Husseini)의 후계자이며 아랍의 주요 테러 그룹(팔레스티나 해방기구=PLO)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정부 대표의 지위를 부여했다. 당시 오직 남아프리카 공화국만이 처해 있던 ‘국제 사회의 게토(속된 표현으로 왕따)’에, 이스라엘도 들어가게 될 우려가 현실적으로 임박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시점에, 이집트와의 평화 조약 체결과 쌍방에 의한 조약의 완전 이행은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지위를 떠받쳐 주는 큰 힘이 되었다. 만약에 팔레스티나인이 이 때 진지하게 교섭을 벌였더라면 이스라엘은 틀림없이 요르단 강 서안의 대부분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무의미한 테러에 의해 상실되고 말았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1981년부터 85년까지 사이에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룸에 따라 원유 가격은 보합세를 이루었다. 1986년 1월까지 배럴당 25 달러가 되고, 그 해의 4월 10 달러선을 끊는다. 인플레를 생각하면, 이 가격은 속죄일 전쟁 이전의 수준 이하였다. 경제적, 외교적 세력 균형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측에 유리한 분위기를 보이기 시작한다. 1980년대 중엽의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을 20 년에 걸쳐 계속 영유하고 있었다. 장소에 따라서는 ‘잠정적’이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국경선은 영속적으로 확정되고 말 기세다.



유대인 귀환법


때는 바야흐로 자신들에게 편을 들어 주고 있다. 이스라엘측이 아니고…라는 것이 아랍측의 교섭 거부를 지탱해 주는 전제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결국 팔레스티나를 떠나고 만) 중세의 십자군 국가에 곧잘 비유하곤 했지만, 이는 오해하기 십상인 잘못된 설이었다. 40 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존립은 이 두 가지가 모두 틀렸음을 입증한다. 이스라엘은 기본적 목표와 국민의 자유를 희생하는 일 없이,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들이 지니고 있던 유연하고도 닳고 닳은 교섭 자세를 유지해 가면서, 최대한의 안전 보장 확보에 성공했다. 때는 아랍측이 아니라 이스라엘 편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랍측이 계속해서 전쟁에 의한 해결을 모색하는 사실 자체가, 이스라엘측으로 하여금 자꾸만 역사적 관점에서 국경선 문제를 생각하는 버릇을 북돋우어 놓았다. 이 경향은 경험주의자에게서까지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스라엘 정부 연감 1951~52년판은 ‘우리 나라는 원래 이스라엘에 속하는 토지의 극히 일부에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다수는 이스라엘의 거듭하는 승리가 유대인으로서는 영토의 확대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믿음이 돈독한 유대인에게는 하느님의 뜻으로 비쳤고, 세속적인 유대인들에게는 누구의 눈에나 확실한 운명으로 비쳤다. 1968년 스파라드계 라비의 장은 새로이 획득한 땅을 내놓는 것은 종교상의 의무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논했다. 같은 해, 키부츠 다티(Kibbutz Dati←Kibbutz Hadati=Religious Kibbutzim : 종교적 협동주의 운동의 대표격)에서는 독립 기념일에 다음과 같은 기도가 영창되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조상에게 유프라테스 강에서 이집트의 강까지의 땅을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의 영토를 넓혀 주소서. 하느님의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 즉 이스라엘의 수도를 세우소서. 그리고 그 예루살렘에 솔로몬의 시대처럼 신전이 세워지이다’.


또 바르일란(Bar-Ilan) 대학 총장인 해럴드 피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땅은 믿음과 하느님과의 계약에 의해, 신탁(神託)이라는 형식으로 오직 한 민족에게 속해 있다. 이는 바로 유대 민족이다. 일시적으로 인구가 변화했다고 해서 유대인이 지니고 있는 신앙의 기반인 이 기본적 사실이 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한 아내에게 두 남편이 있지 않은 것처럼, 한 땅은 두 주권 국가에 의한 지배를 받지 않는다’


1967년의 승리는 또 ‘이스라엘의 땅’이라고 불리는 초당파 운동을 만들어 내었다. 정복한 ‘약속의 땅’의 어떤 부분도 반환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시민을 대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이스라엘 국가에는 그런 도의적 권한이 없다. 획득한 토지는 전체 유대인의 재산이다. 언젠가 실현될 그들의 통합, 즉 알리야(이민)를 위해 확보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그렇게 주장했다. 헤르츠와 벤구리온 그리고 야보틴스키의 사상에서 이론적 근거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이 신시오니즘은, 현시점에서 세계의 유대인 중 겨우 5분의 1만이 이스라엘에 정착해 있지 않으냐고 논했다. 시오니즘의 궁극적 목적은, 유대 미족 모두의 귀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모든 토지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지나친 과장이요, 이념적인 정치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이런 생각에 대해 이스라엘은 늘 부정해 왔다. 그러나 반면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에서 그 성립 당시부터 이념적인 국가이기도 했다. 히브리어로 올레(올라가는 사람, 이민)라고 불리는, ‘정착을 위해 이스라엘에 이주하는 유대인’이 입식을 희망한다면, 어떤 사람이든 받아들일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 창설의 최대의 목적이었다. 1897년의 첫 바젤 계획, 위임통치에 관한 1922년의 제6 조, 그리고 1948년 5월 14일의 독립 선언서에 쓰이어 있는 것처럼, 1950년에는 ‘귀환법’으로 정식으로 법제화해 놓았다.


귀환법 제4B 조에는 유대인이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난, 혹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중에서 다른 종교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정의해 놓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누가 유대인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의 시대 이래, 유대인의 역사에서 가장 골머리 아픈 문제의 하나다. 세속주의가 발달하면서 이는 좀더 곤란한 문제로 변모했다. 근대 유럽에서의 유대인의 정의는 종종 그들 자신이 아니라 반유대주의자에 의해 내려지곤 했다. 카를 뤼거는 ‘내가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자가 유대인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근대 유대인은 ‘유대인이란 자기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라는 생각에 이론이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법정에서는 불충분하다. 할라카(율법 규정)는 종교적 요소를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자손 중에서도 혼혈이면서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닌 경우, 이스라엘의 시민권이 있고, 히브리어를 말하며, 이스라엘의 역사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고, 병역에 복무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특별한 개종 절차를 밟지 않는 한, 이스라엘법상 유대인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같은 할라카는 다른 종교로 개종한 유대인은 계속 유대인이라고 정해 놓고 있다.


순수한 방법으로는 세속적인 유대인에 대한 정의가 불가능한 만큼, 몇 번씩이나 내각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기도 하고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유대인으로 났으면서도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다니엘 형제’라는 이름의 카르멜 수도사가 되어 있었던 오스발트 루파이젠이 ‘귀환법’의 규정에 따라 이스라엘 입국 허가를 요구했을 때는 이 문제가 최고 재판소에서 다루어졌다(1962년의 루파이젠 대 내무부장관 사건). 다수 의견을 대표한 질베르크 최고 재판소 판사는 귀환법을 세속적인 법이라고 했다. 귀환법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의 정의는 할라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理解)에 따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바로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은 유대인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고 판사는 말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소송에서, 정의에 관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성립 당초부터 이민을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아랍 국가에서 오는 난민만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유럽의 유대인 난민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건국한 지 3 년 반 사이에, 유럽으로부터의 30만 4000 명을 포함하는 68만 5000 명의 이주자가 쇄도하면서, 인구가 2 배로 늘어났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두 번째 대량 이민의 물결(16만 명)이, 그리고 1961년에서 1964년까지는 세 번째의 큰 물결(21만 5000 명)이 밀려들었다. 6일 전쟁이 더 많은 이민의 움직임을 자극해 놓았다. 1948년부터 1970년의 22 년 동안에 유럽계 유대인의 수가 60만 명에 달해서, 아랍 나라들로부터 온 유대인 인구와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유럽으로부터 온 유대인 이민의 내용은 루마니아에서 온 22만 9779 명이 최대이고, 이어, 폴란드에서 15만 6011 명, 헝가리에서는 2만 4255 명, 체코슬로바키아에서 2만 572 명, 불가리아에서 4만 8642 명, 프랑스에서 2만 6295 명, 영국에서 1만 4006 명, 그리고 독일에서 1만 1522 명이었다. 그리고 터키에서는 5만 8288 명, 페르시아로부터는 6만 명 이상이, 그리고 약 2만 명이 인도에서 왔다. 러시아는 언제나 유대인 이민자를 공급할 잠재력을 지닌 최대의 나라였으나, 실제 이민자 수는 소비에트의 정책에 크게 좌우되었다. 1948년부터 1970년까지는 겨우 2만 1391 명이 러시아로부터 이스라엘로 왔지만, 1971년부터 1974년까지는 10만 명 이상이 출국 허가를 받았다.


최초의 4반세기 동안에 이민이 쏟아져 들어와 이스라엘의 인구는 당초의 65만 명에서 300만 명이 넘어설 정도로까지 되었다. 새로이 도착한 사람들을 받아들여 주택을 제공하는 일, 교육과 고용 등은 국가 안전 보장에 버금가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국방을 빼 고 보면 최대의 예산 항목이 되었다. 이른바 ‘고난의 땅’에서 유대인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 때로는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1949년 6월부터 이듬해 6월 사이의 단 1 년 동안에, 4만 3000 명의 유대인이 예멘에서 선박과 비행기로 왔고, 1980년대 중반에는 에티오피아에서 팔라샤(Falasha : 에티오피아에 살며 유대교를 믿는 햄족) 2만 명을 몰래 공수해 왔다.



현대 히브리어의 역할


이처럼 새로이 탄생한 유대인 공동체를 일체화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군대와 히브리어였다. 아랍측이 너무나 외곬으로 비타협적 태도를 취한 덕분에, 이스라엘 국방군은 키부츠에 뒤이어 시오니스트 국가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진 세계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이민 자녀들에게 군대를 통해 사회적인 평등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히브리어의 채용은 더욱 훌륭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19세기 말까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대화를 위한 히브리어는 예배에서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후기 성서 시대에 벌써 아람어가 이를 대신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기본적인 기록용 히브리어 문어(文語)로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교 학자들은 모두 서로 히브리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슈케나지계(독일계)와 스파라드계(스페인계)에서는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어나 이디시어(Yidish : 고지 독일어 방언에 히브리어와 슬라브어가 섞인 것. 히브리어로 기록하는데, 러시아, 유럽 중부, 영국, 미국의 유대인 등이 사용)가 시오니스트 국가의 대화용 언어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만일 현실적으로 그렇게 했다가는 결과가 참담해졌을 것이다. 히브리어 채용이 가능해진 것은 엘리에세르 벤 예후다(1855~1922년)가 1881년에 팔레스티나에 들어가 정력적인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전의 이름이 데보라 요나스라는 아내와 함께 야파 항구에 도착했을 때 이 인물은 앞으로 집 안에서는 서로 히브리어만으로 대화를 하자고 굳게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벤 예후다의 집안에서는 이 나라에서(즉 세계에서), 근대에 들어 최초의 히브리어 사용 가족이 되고, 장남인 벤 시온은 고대 이후 처음으로 나면서부터 히브리어를 말하는 아기가 되었다.


아일랜드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 부활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히브리어만큼은 거뜬히 근대 언어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히브리어로 계승된 유대교가 노동, 주택, 조리, 조명, 난방, 여행, 생활 등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인 사항과 늘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히브리어는 원래 기도를 위한 말로서 진가를 발휘해 왔다. 그러나, 행위 그 자체를 표현할 수도 있는 언어였다. 일단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이야기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자, 일상생활에서의 활용이 훌륭하고 매끄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저절로 진화 발달하는 내재적 능력을 드러내게 되었다. 위임 통치 시대인 1919년에 내려진, 영어, 아라비아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영국 정부의 결정도 공용어로서의 히브리어 발달에 극적인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독일어가 공용어로 될 가능성은 히틀러의 출현으로 완전히 소멸하고 만다. 1930년대 말에 10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용하고 있던 이디시어도 1945년 이후 아랍 나라들과 스파라드계 유대인이 많이 이주해 옴으로써 공용어가 될 수는 없게 되었다.


히브리어가 자리잡게 된 것은 것은 이스라엘 국군이 히브리어를 사용한 덕이다. 게다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군이 잘 운영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근대 언어 사회학의 모든 법칙을 거슬러 가면서, 히브리어를 재생시켰고 자립의 길을 걷게 만들어 놓았다.


히브리어 정착 과정에서 약간의 강제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는데 특히 이름에 관해서 그랬다. 아브라함의 시대부터, 유대인은 종교적, 애국적, 혹은 문화적인 이유로 이름을 바꾸는 데에 익숙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인 ‘페렐만’을 고쳐서 새로운 히브리어 이름 갖기 운동을 시작한 것은 벤 예후다이다. 3 회에 걸친 최초의 알리야로 입식한 사람들 대다수가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벤 예후다를 본받았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드 그륀 혹은 그린이란 이름은 다비드 벤구리온이 된다. 나중에는 강제적인 개명도 실시된다. 이를 보면서 신랄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은 이름을 튜튼(Teuton=엘베강 가에 살던 게르만 민족의 한 갈래. 게르만어)풍으로 고치기를 강요당했다. 이를 뒤집어 놓은 것이 히틀러다. 1938년 독일의 유대인은 성을 바꾸지 못하게 해서 유대의 원래의 성으로 되돌아가도록 강요당했다. 게다가 ‘공인된 유대 이름’이어햐 하는데, 남자용으로는 185 개의, 여성용으로는 91 개의 이름이 준비되었다. 룻과 미리암, 그리고 요제프와 다비트(다윗) 등 독일의 비유대인이 좋아하는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제외되었다.


금지된 이름을 가지는 유대인은 남성이라면 이스라엘, 여성이라면 사라를 덧붙여야 했다. 프랑스의 비시 정부와 노르웨이의 키슬링 정권도 이 비슷한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런 지난날의 고약한 기억은 벤구리온을 전혀 머뭇거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 전투적이기까지 한 단호한 히브리어 지지가, 성공을 확실하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한 이스라엘 군함의 함장이 베시니예프스키라는 성을 가졌다는 소리를 들은 벤구리온은 앞으로 ‘어떤 장교도 히브리의 성을 갖지 않는 한,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해외에 파견하는 일을 금한다’는 규칙을 정했다.


이스라엘의 지배 계급은 벤구리온의 예를 따랐다. 모셰 샤레트(전 수상)는 셰르토크라는 성에서 바꾼 것이다. 엘리아후 엘라트는 엡슈타인에서, 레비 에슈콜(전 수상)은 슈콜니크라는 성에서 바꾼 것이다.


히브리어에 의한 명명법 위원회가 설립되어, 개명에 관한 규칙과 히브리어 리스트를 공개했다. 예를 들면, 포르트노이는 포라토, 타이텔바움은 아고시로, 융은 엘렘으로, 노비크는 하다시로, 그리고 볼프존은 벤제브라고 하는 식이다. 유대인에게 악의를 품은 오스트리아 관리가 심술궂게 붙인 잉크디거(발이 아프다)라는 이름은 아디르(강건한)로, 뤼그너(거짓말쟁이)는 아미티(진실을 말하는 사람)로 변경되었다. 성만이 아니라, 이름도 히브리어화했다. 예를 들면 펄은 마르갈리트가 되었다. 유대인은 성보다도 이름 바꾸기에 더 저항을 보였다. 1959년에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골디 마이어존은 이스라엘 외무부의 관례를 따라 성을 메이어로 바꾸었지만, 이름을 제하바로 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고, 골디를 골다로 바꾸는 것으로 그쳤다.


히브리 이름이 필요해지자, 새로운 것을 노려 성서에서 희귀한 이름을 서둘러 찾게 되었다. 이갈, 야리브, 야엘, 아브네르, 아비탈, 하기트 등, 여기다 옴리와 제루바벨이라는 이름이 유행했다. 새로이 발명된 이름도 있다. 밸포어에서 딴 발푸라, 헤르츨에서 딴 헤르츨리아 같은 것이 그렇다. 유대의 인명에 관한 권위자인 라비, 벤치옵 카가노프에 의하면, 성서에서 이름을 따 오는 관습의 부활에서는 수많은 유대교의 터부에 대한 신중한 도전도 있었다. 특히 아브라함 이전의 성서명 사용 금지가 무시되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인은 자신의 자녀에게, 예를 들면 유발, 아다, 펠레그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탈무드가 인류의 역사를 통해 5 명의 극악인 중 하나라는 님로드라는 이름까지 붙이면서 금기를 깼다. 이 말고도 ‘사악한’ 이름으로서 유행한 것으로는 레우마, 델리아, 아탈리아, 치포르가 있다. 베긴 자신, 성서에 ‘그는 주님의 눈에 악한 일을 행했다’는 메나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히브리어는 그저 이스라엘 국민을 하나로 묶어 주는 데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많은 나라, 특히 신생 국가로서는 재앙의 근원이라 할 언어 문제를, 이스라엘은 히브리어 덕분에 피할 수가 있었다. 이 말고도 기본적 문제점을 수두룩이 떠안고 있던 이스라엘로서, 이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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