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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12)

2010.04.04 06:13

김유동 조회 수:1713


노동당 체제


1942년 말, 바르샤바의 게토가 처한 절망적 상황에 대해서까지도 나치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저항할 것인가를 놓고 유대인 정치 단체끼리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긾은 골이 어느 정도인지를 이야기해 준다. 이런 대립의 모두, 아니 그 이상의 일이, 이윽고 이스라엘에서도 풍토병적인 일상이 되고 말았다. 히스타드루트 노동조합과 하가나라고 불리는 군사 조직의 둘을 산하에 둔 노동당(때로는 마파이라고도 부른다)과 시대에 따라 헤루트 혹은 가할이라고 불리며, 지금은 리쿠드라고 불리는 수정주의파 사이에는 기본적인 의견의 차이가 존재했다. 이 대립은 1933년의 아를로조로프 살해 사건과 이에 뒤이은 사건 때문에 독기 서린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독립 전쟁 때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양자의 관계는 한층 악화했하고 말았다.


벤구리온은 처음부터 베긴에 대해 전적으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베긴은 유엔에 의한 분할안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 사나이가 이끄는 이르군한테 독립 행동을 허용하다가는 이스라엘 영토 확장을 위해 싸움을 벌이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베긴은 1948년 6월 1일, 이르군과 이스라엘 국군의 합병에 동의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무기 획득 루트만큼은 따로 유지했다. 제1 차 휴전 중, 이르군의 무기 수송선 알탈레나호가 텔아비브 앞바다에 도착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그 짐들이 베긴의 수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각의 석상에서 벤구리온은 이렇게 말한다. ‘2 개의 국가, 2 개의 군대는 있을 수 없다.……정권을 베긴에게 넘기거나 베긴에게 분리주의적 행동을 중지하라고 권고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만약 그가 굴복하지 않는다면 전단을 열 것이다’. 내각은 국방 장관에게 법의 집행을 명했다.


텔아비브의 해안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베긴은 자신의 무기를 지키기 위해 급거 알탈레나호에 승선한다. 리츠 호텔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하가나 정규군에서는 팔마하의 총사령관 이갈 알론과 부사령관인 이츠하크 라빈(뒷날의 수상)이 알탈레나호 포격을 결단, 이 배를 격침시켰다. 베긴은 해안까지 헤엄을 칠 수밖에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르군 병사 14 명이 죽고, 이르군은 사살상 괴멸했다. 베긴은 노동당 연립 정권을 ‘범죄인, 압정자, 배신자, 형제를 죽이는 정부’라고 불렀고, 벤구리온은 베긴을 ‘히틀러’라는 한 마디로 매도했다.


그 이후로 1977년까지, 노동당과 그 지지 정당이 이스라엘의 정권을 짊어진다. 그들은 키부츠와 히스타드루트, 하가나, 그리고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유대 대표 기관을 산하에 두고, 독립 이전의 위임 통치 시대에 이미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독립 후에도 이 체제를 유지했고, 군부와 관료 기구, 그리고 노조를 통해 이스라엘 산업계도 지배하에 두었다.


이스라엘은 영국의 위임 통치 체제로부터, 정치, 헌법, 사법 제도 등 많은 것을 계승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만큼은 영국과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은 동구의 사회주의 정당에서 정당은 곧 국가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소련과도 비슷했다. 영국형 의회 민주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적 정치가와 직업적 관료의 구별을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알론은 팔마하 사령관 자리에서 장관에 오르고, 다시 부수상으로 취임했고, 라빈은 국방군 참모총장을 지내다 후에 수상이 되었다. 이 밖의 두 사람의 국방군 참모총장, 하임 바를레브와 다비드 엘라자르도 마찬가지로 노동 운동을 통해 승진한 인물이다. 국방군 사령관 중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려져 있는 모셰 다얀은 체이림이라고 불리던 마파이 청년 운동을 통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벤구리온 밑에서 국방부를 통괄하다가 이윽고 수상이 되는 시몬 페레스도 똑같은 코스를 취하고 있다. 국회의원, 장군, 각료, 대사, 국영 라디오 회장 등의 지위를 한 인간이 차례로 역임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정당 국가이기는 하지만, 결코 1당 국가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사항을 각의에서만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행정관의 지위는, 원칙적으로 선거의 실적에 따라 논공행상적으로 배분된다. 각 부처에서의 채용, 직책, 승진은 그 부처를 영향 하에 두고 있는 정당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노동당 체제는 전체로 볼 때 군수 산업, 주택 건설, 건강 보험, 유통 부문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는 농공업사업 복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조직을 통해, 노사 관계와 교육, 공중 위생, 이민 문제 등 원래 정부가 담당해야 할 아주 광범한 분야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중 많은 부분은 위임 통치하에서의 입식 형태와 크게 관계가 있다. 레지스탕스, 강렬한 내셔널리즘 운동, 때로는 테러에 의해 지난날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획득해서 국가 체제를 확립한 제3 세계의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공통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독립 후의 국가 체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민주주의는 복수 정당제에 의해 지켜졌다. 그러나 정당은 언제나 침식, 분열, 재편성, 당명 변경을 되풀이하면서,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연립 정권을 수립해 나갔다. 1947년에서 1977년까지 사이에, 마파이 즉 노동당의 득표율이 32.5 퍼센트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40 퍼센트를 넘어가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노동당 우위라는 전체적인 정치 구도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선거 후에, 혹은 더러는 선거와 선거 사이에서 연립 여당 형성을 놓고 어려운 거래가 벌어지는 등,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다.


벤구리온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의 짧은 기간 모셰 샤레트에게 그 자리를 넘겨 준 일을 제외하고는, 1948년부터 1963년까지 수상의 자리를 줄곧 지켰다. 종종 독단적인 인사, 예를 들면 장군의 임면을 단행했는데, 이는 내부의 정치적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날 이집트에서의 첩보 활동 실패로 큰 낭패를 보게 했다고 해서 책임을 물은 핀스 라본 국방장관에 대한 오랜 증오는, 표면상의 이유 이상으로 당내의 권력 다툼의 빌미가 되었다.


정당이란 이념만이 아니라, 이권의 집합이기도 했다. 당원 모집, 특히 이스라엘에 도착한 이민으로부터의 모집은 이런 점을 참작했다. 이런 모집 방법이 시작된 것은 1,2 차 대전 중간의, 입식이 모든 정당의 최우선 과제였던 시대부터였다. 1930년대 초기에는 한정된 토지의 분배를 놓고 정당간에 협정이 벌어졌었다. 독립한 다음으로는 농업에 종사하기를 희망하는 이주자 모두에게 줄 만한 충분한 토지가 있었으므로, 당원들은 지지자 획득을 위해 임시 이민 수용 시설을 누비고 다녔다. 공식적이 아니라 부족과 종교별로 배분을 했다. 예를 들면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이민은 세속적 정당(주로 마파이)에 참가했고, 북 아프리카에서 온 이주자들은 연립 정권의 일익을 구성하는 종교적 조직 미즈라히에 가입했다.


예멘 출신 당원의 활약으로 마파이는 예멘에서의 이주자를 거의 독점적으로 산하에 넣었는데, 미즈라히의 항의로 이 숫자는 65 내지 60 퍼센트까지 감소되었다. 10만 명을 넘는 모로코에서 온 이주자에 관해서는, 남 아틀라스 지방에서 온 이민은 마파이가, 북 아틀라스 지방에서 온 이민은 미즈라히가 차지한다는 합의가 성립되었다. 멋대로 소속이 결정되고 정치 교육을 받게 된 것에 대해 분개한 모로코로부터의 일부 이민이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1955년에 이런 결정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 일도 있었다.


바이츠만은 이런 시오니스트간에 벌어진 정쟁 모두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국가가 창설될 당시에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는 했지만, 미국 대통령과 동등한 정도의 권한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따라서 그는 정당과 대항하면서 국익과 공익을 유지해 나간다는 입장에 서 있지 못했다. 그런 일은 벤구리온에게 맡겨졌다. 그를 위해 변호를 하자면, 벤구리온은 당 조직과 싸우려고 했다. 생애를 통해 직업적 정당인이었던 그는 마지막까지 공격적으로 싸워 나갔다. 수상으로서는 국가와 정당을 분리해서 나라를 정당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전력을 다했다. 권력 남용에 대한 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정책과 인사에까지 지배력을 미치려는 노동운동 조직과 싸웠다. 실상, 이런 조직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창설한 것이다. 이렇게 애쓴 결과, 수상 관저, 국방부, 군대, 학교를 당 지배로부터 해방해 내었다. 그러나, 의료 제도에 대해서는 실패로 끝나고, 히스타드루트(노동자 총동맹)의 실질적 지배가 계속되었다. 결국 그는 동료 정치가들에게 정이 떨어져서 1965년에 새 정당은 결성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공직에서 물러난 다음 분노를 삭이며 스데보커의 키부츠에서 본의 아닌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헤르츨과 바이츠만, 그리고 야보틴스키와도 달리, 벤구리온은 자기 자신을 유럽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대계 중동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브라(sabra : 팔레스티나산 선인장 이름)라고 불리는 ‘초기 개척자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토박이’들을 신뢰하며, 그들이 이 나라를 유럽인의 입식지에서부터 순정한 아시아의 국가로 변용시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피와 눈물과 고생과 땀밖에는 주지 못하면서, 엄한 요구를 하는 모세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1969년, 벤구리온은 죽기 직전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아직 사막을 헤매 다니며, 이집트의 고기찌개를 그리워하는 유랑의 백성이다. 네게브와 갈릴리에 유대인이 정착하고, 몇백만 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에 이주해서, 윤리적 정치의 실현에 필요한 도덕 수준과 시오니즘의 고매한 가치관이 유지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아직 제 구실을 하는 국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오합지졸이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도 아니다.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충족되지는 못했다. 아직 유랑 시대의 과거에 얽매여 있는 백성이다’



그러나 노동당은 여전히 유럽 사회주의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의 지식 계급의 당이고, 키부츠는 주말 밭농사를 위해 찾아가는 별장 정도라는 기분이었다. 당원으로서는 대졸자가 많았고, 문화적으로 거의가 중산 계급 사람들이다. 노동자 계급, 특히 아시아-아프리카로부터 온 스파라드계 이민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선의를 베푼다는 식의 공치사를 하는 태도를 보였고, 지난날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년 : 마르크스처럼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사회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이론만으로 사회를 계몽시키려 한 여성 사회주의자)가 독일의 무산 계급에게 가르침을 주려 한 것처럼, 무엇이 그들에게 좋은 일인지를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들은 신생 국가의 일원이 된 타고난 귀족이었다. 어쩌면 오히려 세속적인 카테도크라시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도 몰랐다.


이윽고 서서히, 정부와 야당 사이의 취향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노동당 정치가들은 티셔츠차림의 소박함과 산뜻함을 좋아했지만, 베긴의 리쿠드는 세련된 양복에다 넥타이로 맵시를 낸 것 같은 기분을 풍겼다. 그것은 인텔리 사회주의자와, 천성적인 포퓰리스트의 차이였다.


벤구리온이 은퇴한 다음, 유럽계 유대인의 영향력이 점차로 감퇴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이 그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은 오히려 강해졌다. 대조적으로 아랍 지역에서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야당으로 기울었다. 이 경향은 2 대전 사이의 시대에 비롯된 것이다. 야보틴스키는 언제나, 레반트(그리스에서 이집트까지의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의 스파라드계 유대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 자신 라디노(Ladino=터키, 그리스 등에 사는 스페인 포르투갈계 유대인, 즉 스파라드들이 사용하는 스페인어와 히브리어, 아랍어가 뒤섞인 언어)를 익히고 있었고, 히브리어의 스파라드풍 발음을 옹호했다.


베긴으로서는 이 전통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폴란드 출신 유대인의 하나로서, 그는 아랍 나라들에서 박해를 받고 쫓겨난 유대인들의 처지에 대해 매우 자연스러운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와 있다는 점에 대해 송구스러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랍에 대한 증오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수난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상의 권리로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유대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동방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생살여탈의 권리가 아랍측에 있다는 생각은 죽은 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4000 년쯤 되는 예전에, 문명의 먼동이 트는 서광 속에서, 조상들의 하느님에게 생존권을 부여받았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유대인의 피로 성별된 이 권리를 위해, 우리는 어떠한 민족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대가를 치렀다’.


베긴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당 지배층하고는 아주 대조적으로, 베긴과 동방계 유대인은 공통되는 귀중한 특질을 지니고 있었다. 죄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당은 국가 체제를 매우 단단히 장악하고 있었고, 이를 좀처럼 놓지 않았다. 베긴은 연속해서 8회 선거에 패배한다. 그러고도 당수의 지위를 계속 지켜 내었다. 이런 예는 아마 역사상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레비 에슈콜(재위 1963~1969년), 골다 메이어(재위 1969~1974년), 이츠하크 라빈(재위 1974~1977년)으로 수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동당에 대한 선거민의 지지는 점차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벤구리온의 경고를 새겨듣지 않고 국가와 당을 분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 정권이 끝나 갈 무렵 몇 가지 스캔들이 발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1977년 5월의 선거에서 노동당은 마침내 제1 당의 지위를 잃고 만다. 득표율은 투표자의 15 퍼센트로 떨어지고, 획득 의석수는 32 석에 그쳤다. 한편 베긴의 리쿠드는 43 의석을 획득, 어렵지 않게 연립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 1981년 6월에 치른 다음 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그가 은퇴한 다음 1984년의 선거에서는, 노동당과 비기는 바람에, 리쿠드와 노동당이 교대로 수상을 내는 형태로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에는 처음으로 일종의 2대 정당 체제가 탄생해서, 1당 영구 지배 체제의 위험은 피할 수가 있게 되었다.



종교 정당


이스라엘에서의 정당간의 대립을 고찰할 때, 역사적으로 숱한 폭력적 사건을 겪으면서 사무친 증오가 아무리 뿌리 깊은 것이었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세속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언제나 현실적인 타협을 볼 수 있었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시오니스트 국가의 세속성과 유대교 자체의 종교성 사이에 존재하는 균열이다. 이 문제는 새로운 것도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유대인 사회에서는 율법이 구하는 것과 세속 사회가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긴장을 자아내곤 했다. 유대인이 자치로 접어들었다 하면 즉각 이 모순이 표면으로 불거져 나오게 마련이다. 경건한 유대교도 다수가 이교도의 지배하에서 사는 편이 속편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교도들의 선의에 의지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근대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의지할 것이 못 되는지가 밝혀지기는 했지만….


새로운 시온의 개념은 19세기의 안티세미티즘에 호응해 고안된 홀로코스트의 비극 직후에 태어났다. 그것은 유대교를 바탕으로 한 신정 정치의 설계도가 아니라, 유대인이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수단이었다. 즉 상황은 예언자 사무엘의 시대와 기본적으로 다를 게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레셋 사람들의 공격으로 멸망할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살아남기 위해 왕정으로 전환했다. 사무엘은 슬퍼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이 변화를 받아들였다. 왕정, 즉 우리가 말하고 있는 국가가 율법에 의한 통치와 돌이킬 수 없는 마찰을 빚을 것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결국 옳았다. 율법은 시행되지 않았고, 하느님은 진노하고, 곧 이어서 바빌론 포로 사건이 일어났다. 제2 신전 시대의 왕정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문제에 직면했고, 마찬가지로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산의 시대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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