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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13)

2010.04.11 06:25

김유동 조회 수:1529


유대인의 유랑은 하느님이 정하는 적절한 때에 인지(人智)를 초월한 사건에 의해 끝장이 난다. 사람이 생각해 낸 정치적 해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생각이야말로 유대교의 진수다. 시오니스트 국가는 새로운 사울의 왕국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현대의 메시아이기라도 한 것처럼 뇌까리는 것은 잘못일 뿐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불경이다. 위대한 유대교 학자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1897~1982년 : 유대 철학자, 역사학자. 히브리 대학 첫번째 신비주의학 교수. 카발라 연구로 유명하다)이 경고한 것과 같이, 또 하나의 가짜 메시아를 내놓을 뿐이다.


‘시오니스트의 이상과 메시아의 이상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대중 집회에서 떠벌리는 장광설 속에서나 그것이 일치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집회에서, 젊은 세대는 실패할 것이 뻔한 새로운 샤바테아니즘(신전이 파괴되고 바르 코흐바가 로마에 반기를 들었을 때 일어난 최대의 가짜 메시아 운동)에 솔깃하게 되는 것이다’


거의 신앙심을 갖지 않고, 때로는 반종교적이기까지 한 시오니스트들이, 유대교의 도움을 빌린 것은 사실이다. 달리 수단이 없었으니까…. 유대교 없이는, 그리고 신앙으로 맺어진 백성으로서의 유대인이라는 생각 없이는 시오니즘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고, 그저 색다른 당파에 지나지 않는다. 시오니스트들은 다시 성서를 인용하기도 했다. 모든 종류의 정치적 교훈, 운동의 표어, 이상주의적인 젊은이들에게 하는 호소를 성서에서 인용했다. 벤구리온은 군사 전략의 지침으로 성서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유대 계몽주의의 동구적 표현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시오니즘에 하느님이 자리할 곳 따위는 없었다. 시오니스트들에게 유대교란 민족의 에너지와 문화를 퍼올릴 수 있는 편리한 샘이고, 성서는 국가의 정사(正史)에 지나지 않았다. 종교적인 유대인 거의 모두가 시오니즘을 처음부터 의혹의 눈으로, 혹은 노골적인 적의를 가지고 보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시오니즘을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기로 결심한 것처럼, 종교적 유대인 역시 시오니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에 대해 태도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생각에는 여러 개의 흐름이 있었고, 각각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변화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정통파에 속해 있었다. 개혁파 유대교는 팔레스티나 이주와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개혁파의 시나고그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세워진 것은 1958년의 일이다. 그러나 정통파에서는 시오니즘에 대해 용인하는 정도가 일치해 있지 않았다. 시오니스트가 국가 창설을 하면서 유대교를 이용한 것처럼, 일부의 경건한 유대교도는 유대인을 유대교로 되돌려 놓는 데에, 시오니즘 특유의 민족 정신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오니스트의 지지를 얻어 유럽 라비의 장으로 임명된 아브라함 이츠하크 쿠크(1865~1935년)는 신앙심이 깊은 유대교도가 그들의 조직화에 성공한다면, 유대인 사이에 일고 있는 새로운 애국 정신이 토라 준수에 불을 댕겨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의 제10 회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토라를 가르치는 학교보다도 세속적 학교 건설이 바람직하다는 결정이 나오자, 미즈라히라고 불리는 종교 정당이 탄생해서 시오니즘 한가운데에 토라를 확립하기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미즈라히는 위임 통치의 시대 내내 시오니즘과 활동을 함께 하고, 건국 당초부터 연립 정권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확실히, 미즈라히는 이스라엘에서 세속적인 유대인과 종교적 유대인이 아주 틀어지는 일을 방지해 내었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종교적인 세력이었다기보다는 2 개의 당파간의 중개자로서 기능했다.


이러한 미즈라히의 ‘배반’을 접하자, 정통파 장로들은 1912년 아구디스트 운동(원래는 World Agudath Israel=The World Jewish Union인데 흔히 Agudah라고 한다. 동유럽계 유대인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을 창시한다. 그러나 영국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할 때까지는 조직화하지 않았고, 활동도 하지 않았다. 터키 제국이 지배할 때에는 소수 민족에게 그 종교 지도자를 통해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오래된 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 제도는 당연히 정통파 유대교에서 환영했다. 그러나, 1922년 위임통치법 제4 조에 의해, 영국은 시오니스트에게 모든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정치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의회의 실권은 세속적 세력에 의해 단단히 장악되었고, 그 종교적 분야는 미즈라히에 맡겨진다.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1923년 아구디스트는 ‘토라 위인(偉人) 평의회’라는 집단에 의해 운영되는 대중 운동을 조직했다. 평의회의 각 지부는 경건한 유대교도를 지도해서, 평의회가 지명한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권했다.


이렇게 해서 제2의 종교 정당이 탄생했다. 동구에서는 이 당이 자체의 출판과 로비를 통해 세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리고, 반시오니스트로서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득세함에 따라 팔레스티나는 이주 비자 발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패닉 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오니스트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주 비자는 시오니스트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 대표 기관을 통해 발행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신규 입식에 필요한 자금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던 것도 이 기관이다. 불레셋인과 대결을 하게 된 태고적의 유대인처럼 히틀러주의에 직면한 아구다는 자신들의 기본 원칙을 어떤 방식으로 관철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진상일 것이다.


밸포어 선언은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탈출 수단이 아닐까. 1937년, 유명한 라비 히르슈의 손자로서 아구다의 리더의 한 사람 이츠하크 브로이어는 ‘토라 위인 평의회’에 정식 질문장을 제출했다. 밸포어 선언은 국가 건설 사업을 하느님이 유대인에게 과하신 것인가, 아니면, ‘사탄의 계략’인가. 평의회가 하나로 정리된 회답을 내지 못했으므로, 브로이어 자신이 회답을 준비한다.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한 그의 답변은 시오니스트와의 타협을 명확하게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새 국가는 순교를 한 이스라엘인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이고, ‘구제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토라가 인도하는 바에 따라 마련된 것이다. 이렇게 아구다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아 놓았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나라의 기초를 다지려고 애쓰고 있을 때, 아구다는 이스라엘의 법적 기반을 토라에 두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7년 4월 29일, 유대 대표 기관은 아구다에 서한을 보냈다.


‘이스라엘 국가의 창설은 유엔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 이 나라의 모든 시민에게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또 신정 국가 설립을 의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 한 승인을 얻을 수 없다’.


신생 국가는 세속적 성격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으로, 유대 기관은 안식일과 식품에 관한 계율,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는 종교적 입장에 따르고, 학교 안에서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동의했다. 이 타협에 의해, 국가 창설 때에는 아구다의 잠정 정부 협의회 참가가 가능하게 되고, 나아가 종교 통일 전선의 일원으로서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연립 정권의 한 축을 짊어질 수 있게 되었다. 아구다의 사상은 1952년 10월 10일 다음과 같이 표명되고 있다.



‘세계는 이스라엘을 위해 창설되었다. 토라를 지키고, 토라를 실현하는 일이 이스라엘의 의무요 의의다. 이스라엘인이 살고 토라를 지키기 위해 하느님이 정하신 장소야말로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는 세계 존재의 이유가 이스라엘의 땅에서 토라 체제를 확립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상(理想) 실현을 위해 기초가 구축되었다. 바야흐로 유대인은 향토에 살면서 토라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꿈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의 백성 모두가 향토에 귀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모든 이스라엘인이 토라를 지키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아구다는 유대인의 이스라엘 집결을 실현하고, 이를 신정 국가로 변환하기 위해, 시오니즘을 이용하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미즈라히의 타협이 아구다를 낳아 놓은 것처럼, 이번에는 아구다의 타협이 ‘도성(예루살렘)의 수호자’(히브리어로 Neturei Karta)라고 자칭하는 엄격주의 집단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당파는 1935년에 아구다에서 떨어져 나오며, 국가 창설 그 자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선거를 비롯한 모든 국가 행사를 보이코트하고, 예루살렘이 배교자에 의해 통치되기보다는 국제적인 공동 관리하에 두는 편이 낫다고 선언했다. 이 당파는 비교적 소수로 구성되었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과격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소수의 엄격주의자가 종종 다수파로서 승리를 거두곤 했다. 게다가 유대교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처음 내놓은 전제를 확인하면서 강경한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유대인은 ‘평생을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명령으로 다스려진다. ……통상적인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물질적인 성공이나 실패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아주 이질적인 나라다’라고 말한다. 즉 ‘다른 민족 모두의 흥망을 불러 일으켜 놓은’ 요인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따라서 시오니스트 국가의 창설은 유대인이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거나, 제3 신전 시대의 개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보다도 훨씬 위험한 새로운 유랑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사악함의 성공을 들이대며 유혹하는 일이 공공연히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헝가리의 라비들의 발언을 곧잘 인용하곤 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시오니즘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지 않은 자신들을 하느님이 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소각로에서 유대인의 육체를 재로 만들기는 했지만, 그 영혼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해방되었다. 그러나 가면을 뒤집어쓴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의 백성을 대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유대인의 영혼을 불태워 재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시나이 전쟁과 6 일 전쟁에서의 승리를 개탄한다. 그 놀라운 성공은 유대인을 시오니즘으로 이끌어 들이기 똑알맞아서, 결과적으로 볼 때 영원한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뿐인가. 승리는 사탄의 짓이며, 결국은 장대한 패배가 되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오니즘에 의한 ‘해방과 보호’를 거절하고, 그 전쟁과 정복을 배척했다.



‘우리는 어떤 증오와 적의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민족, 국가, 언어와의 싸움이나 전쟁은 어떤 현식이 되었든 부정한다. 왜냐 하면 거룩한 토라는 유랑의 처지에 빠진 우리에게 그런 일을 명한 일이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수많은 죄를 범해서 (하느님에 대한)반역자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음을 아시거든, 하느님, 단호히 금해 주소서.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거룩하신 하느님이—하느님에게 영광을—우리를 반역자의 길에서 해방하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도성의 수호자’들은, 스스로를 ‘엘리야의 시대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일’, 혹은 ‘예세벨(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사악한 아내)의 식탁에서 식사하기’를 거부한 ‘남은 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시오니즘은 ‘모든 왕들의 왕에 대한 반역’이다. 그들의 신학적 해석에 함축된 바에 의하면, 유대 국가는 홀로코스트보다도 더 무서운 파국으로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속적인 시오니스트 국가는 그 탄생 이래로 3 방향으로부터 신앙상의 반대에 봉착했다. 우선 연립 정권 안으로부터의 반대, 다음으로는 연립 정권 외부이기는 하지만, 시오니스트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반대, 그리고 이런 결집된 의견에 반대하는 국내 세력으로부터의 반대였다. 반대 운동에는 한도 없을 정도로 온갖 형태가 다 있었다. 편지에 우표를 거꾸로 붙인다든지, 편지 주소를 쓸 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름을 쓰지 않는다든지, 신분증을 찢는다든지, 그리고 선거를 보이코트한다든지, 데모, 대규모 폭동 등, 유치한 것에서부터 폭력적인 것까지 모두 있었다. 이스라엘 국가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지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소한 사항에 대한 결정을 충분히 고려하지도 않고 내렸다가는 예고도 없이 와락 화부터 내는 일부 사람들—특히 예루살렘 지역 사람들—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종교 세력은 국회 내, 그리고 특히 내각 안에서의 진지한 거래를 통해 자기들의 주장을 내놓았다. 이스라엘 독립 후 최초의 4 개 정권에서, 종교 문제 때문에 내각 붕괴의 위기가 적어도 5 회 닥쳤었다. 1949년에는 금지 식품의 수입 문제 때문에, 1950년 2월에는 임시 이민 시설에서의 예멘계 유대인 어린이들에 대한 종교 교육 때문에, 1951년 10월과 이듬해 9월에는 정통파 유대교도의 가정에서 젊은 여성을 군대에 징용하는 문제 때문에, 그리고 1953년 5월에는 학교에 관한 문제 때문에 내각이 뒤흔들렸다. 이스라엘 독립 후 최초의 40 년간, 종교 문제는 이데올로기, 국방, 외교 같은 문제보다는 훨씬 자주 연립 정권을 흔들어 대곤 했다.



계율 문제


유대교가 엄격한 도덕적 교의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날 분야는 매우 광범위했다. 예를 들면, 전통적이고 법적인 지위가 주어진 안식일이 있다. 이 날에는 탈것의 운전, 탈것에 의한 여행, 저술, 악기 연주, 전화 걸기, 전등 켜기, 금전 만지기 등에 관한 39 개의 주요한 금지 사항과 기타 많은 보충적인 금지 사항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는 유대교 법전에 ‘안식일을 공공연히 더럽히는 자는 누가 되었든, 모든 의미에서 비유대인과 마찬가지다. 그가 만진 와인은 마시면 안 되고, 그가 구운 빵은 비유대인의 빵이나 마찬가지이며, 그가 만든 요리는 비유대인의 요리와 같다’는 것이 있다.


이 바람에 안식일의 계율은 군대, 관료 조직, 공영 산업과 협동 농업의 각 분야에 심각한 연쇄 효과를 파급해 놓았다. 안식일에 키부츠에서 소의 젖을 짜게 해도 좋은가, TV 방송을 허용할 것인가 등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고, 수많은 규칙들이 제정되었는데, 그러면서도 모순되는 지방 조례와 세칙이 수두룩했다. 결국 안식일에는 버스가 하이파에서는 운행되면서 텔아비브에서는 운행되지 않으며, 찻집을 텔아비브에서는 열 수 있어도 하이파에서는 열 수가 없고, 예루살렘에서는 이 둘 모두가 금지되었다. 국영 엘알(El-Al) 항공에 의한 안식일의 항공기 운항을 놓고, 내각이 붕괴의 위기로 몰린 일도 있다. 국영 해운 회사인 여객선에서 코셔(kosher : 계율상 적정한 식품)가 아닌 보통 요리를 내놓을 것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쟁은 정부 안에서 엘 알 문제보다도 더 심각했다. 식품의 계율을 둘러싼 문제는 정치적인 분쟁을 불러일으키기 똑알맞았다. 호텔과 레스토랑을 영업하기 위해서는 라비의 단체가 발행하는 ‘적격 인증서’가 필요했다. 1962년에 제정된 법에 의해, 나사렛 근처의 기독교인에게도 아랍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학술 목적 이외의 돼지 사육이 일절 금지되었다. 그리고 1985년에는 돼지 고기 식품의 판매, 유통 금지법 제정 운동이 시작된다. 정부와 라비는 각각, 사육업자가 발굽을 가지고 반추를 하는 포유류라고 신고한 동인도네시아산 바비루사(사슴멧돼지)를 놓고 정말로 계율상 문제가 없는지 여부를 검사했다. 신성한 땅에서의 시체 해부와 매장에 대한 문제를 놓고 내각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교육 문제 또한 매우 어지러운 양상을 보여 준다. 영국의 위임 통치 시대에는 4 종류의 유대인 학교가 있었다. 세속적인 교육을 하는 일반 시오니스트 학교, 세속적이고 협동체적인 히스타드루트의 학교, 세속과 토라 양쪽의 교육을 하는 미즈라히 학교, 그리고 토라만을 가르치는 아구다의 학교다. 이스라엘 건국 후 1953년에 제정된 ‘교육 통일법’은 이들 학교를 2 종류로 통합했다. 즉 세속적 국립 학교와 종교적 국립 학교다. 아구다의 학교는 이 새 제도에서 탈퇴하는 바람에, 충분한 시간을 일반 과목에 충당하지 않는 한,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세속주의자는 아구다의 학교에서 주 32 시간의 수업 중, 18 시간을 성서와 탈무드와 히브리어 수업(여자는 남자에 비해, 성서 시간이 많고 탈무드 시간이 짧다)에 충당하고 과학, 지리, 역사 시간을 깎아먹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러는 한편에서 종교적 유대인은 국립 학교가 32 시간 중에서 겨우 8 시간만 종교에 충당하고 있는 데다, 그 중 3 시간이 히브리어 수업이라는 것, 그리고 성서가 초기 시오니스트의 역사로서 소개되는 부분 일부를 빼고는 세속적 정신에 입각한 신화라고 가르치는 일에 불만을 가졌다. 1950년대 말, 분규에 휘말린 내각은 세속적 학교에서는 ‘유대 종교 의식’을, 종교 학교에서는 ‘이스라엘 국가 의식’을 높인다는 타협안으로 이런 불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한층 큰 혼란을 불러오게 했다. 1959년에는 동방계 정통파 유대교도 어린이들을 위한 세속적 교육 내용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더니, 3 개월 후에는 폭동이 일어났다. 반대파 라비 중 한 사람은 못마땅한 듯이 다음과 같은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들은) 지혜가 모자라는 청년을 높이 들어올려 긍지의 옷을 입게 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들은 지혜를 지닌 장로들을 티끌 속에 내동댕이치고 만다. 기가 막힌 일은, 바로 이 곳 이스라엘에서, 그들은 토라의 계율을 무시해도 좋다고 어린이들에게 가르친다. 소년이 학교에서 귀가한 다음 부모가 기도를 하라고 하면, 소년은, 선생님이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거나 난센스라고 말했다면서 말대답을 한다. 라비가 와서 소년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소년들은 라비가 하는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사커 클럽의 시합이 벌어진다든지, 바닷가에 데려다줄 자동차가 기다리곤 하기 때문이다. ……라비가 간절히 타이르며 눈물을 흘리면, 소년들은 이를 비웃는다. 즉, 교사들이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토라의 현인들은 한귀퉁이로 밀려나고, 당원 등록증을 손에 든 소년들이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



정통파 유대교도는 또, 수많은 시설에서 남녀를 갈라 놓던 예로부터의 전통이 온갖 형태로 파괴되는 것을 보고 격노했다. 정통파 센터 부근에서는 댄스홀과 남녀 공용의 수영장을놓고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여성의 징병 제도에 대해서는 ‘토라 위인 평의회’가 ‘설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무시해야 할 법률’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이는 종교 중시파가 승리를 거둔 수많은 투쟁 중의 한 예다.


그들은 또, 가장 중요한 과제인 혼인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스라엘은 세속적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민사법상의 혼인 제도 제정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교도가 아닌 사람끼리 결혼을 하더라도, 1953년에 제정된 (결혼과 이혼에 관한) 라비 법정 관할법 제1 조와 제2 조에 의해 정통파 유대교의 규정이 적용되었다. 국회에서는 세속파 의원도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서로 혼인할 수 없는 2개의 공동체로 분열되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률은 골머리 아픈 문제를 불러일으켜 소송을 질질 끌게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 말려든 것은 비유대인과 세속적 유대인만이 아니다. 개혁파 유대교의 라비와, 그들의 손으로 개종된 자들도 이 분쟁의 당사자가 되었다. 정통파 유대교의 라비만이 개종자를 인정하는 권한을 가지며, 개혁파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통파 유대교의 입장을 취하는 결혼과 이혼에 대한 전문가는,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당연한 일이라며, 모든 유대인 이민 집단까지도 엄격하게 심사했다. 이렇게 해서 1952년에는 6000 명에 이르는 베네 이스라엘(인도의 뭄바이에서 온 유대인)의 이혼이 무효라고 트집을 잡았고(결과적으로는 적절함이 판명되었다), 1984년에는 에티오피아에서 온 팔라샤계 유대인들의 결혼에 의문을 던지며 까다롭게 굴었다.


재혼과 이혼에 관해서는, 수많은 격렬한 논쟁이 펼쳐졌다. 구약 성서의 신명기 25장 5절은 자식이 없는 과부와 사망한 남편의 형제 사이에 레비라트혼을 강제한다. 이 의무는 히브리어로 할리자라고 부르는 ‘시동생에 의한 거절’로 소멸할 수 있지만, 시동생이 미성년자인 경우 과부는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만약 시동생의 귀가 먹었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나는 그녀와의 결혼을 바라지 않는다’를 말로 할 수 없으니까, 다른 남자와의 재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사례가 실제로 1967년에 아슈도드에서 일어났었다. 게다가 농아인 이 남성은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그래서 라비들은 어쩔 수 없이 중혼 절차를 밟은 다음, 그 이튿날 이혼시켜 문제를 해결했다.


배우자의 한쪽이 이혼을 거부하는 경우에도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아내가 거부하는 경우, 이혼 성립은 어려워진다. 그러나 남편이 거부하는 경우에는 이혼이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1969년의 사례에서 한 남편이 6 건의 외설 접촉 행위와 3 건의 강간으로 금고 14 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아내가 이혼 청구 소송을 제기하자, 남편은 이를 거부했다. 라비 율법하에서는 두 사람의 혼인이 계속되고, 이스라엘의 민법상, 아내에게는 구제 수단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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