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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14)

2010.04.27 02:15

김유동 조회 수:1517


그러나, 전 종교장관인 라비 제르하 바르하프티그는 이런 사태를 그다지 염려하지 않는다. ‘우리의 법 제도는 언제나 사람들을 지탱해 왔다. 그 법 제도에서 덤불의 가시 같은 면이 있어서, 때로는 개인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런 저런 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좀더 좋은 표현 방법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 발언에는 일면의 진리가 들어 있다. 유대교는 완벽주의자의 종교다. 이스라엘 신생 국가에서 숱하게 일어난 곤란한 문제가 이를 새삼 부각시켰다. 유대교의 약함 가운데 강함도 깃들여 있다. 유대교는 모범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므로, 유대교 실천자가 사회의 엘리트라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그 계율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국가가 탄생하기 약 3200 년 전이라는 아득한 옛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신생 국가한테 유대교는 이상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대교 특유의 지속성에 의해, 아주 오래 전의 계율 다수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지금까지도 경건한 유대교도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종종 종교 진리의 실체보다는 오히려 그 형식을 반영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지만, 유대교도들로서는 ‘의식 존중’이 비난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바르일란 대학 학장 해럴드 피슈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어 리추얼(ritual=종교 의식)이라는 말에는 프로테스턴트의 전통에 유래하는 살짝 업신여기는 울림이 들어 있다. 히브리어로 “의식”은 미즈보트(종교적 명령)다. 이는 원래 인간끼리의, 혹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윤리적 힘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의식을 통한 신의 명령”을 체현하는 것은 후자이며, 그것은 “윤리에 의한 신의 명령” 못지않게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의식적 정신의 진수는 꼼꼼한 율법의 준수에 있다. 그것이 또, 신생 국가에 특별히 잘 어울리는 유대교의 힘이다. 모든 국가는 과거의 영광에 의한 자국의 신성화를 필요로 한다. 1945년 이후 독립한 100 개를 넘는 나라들 다수는 각각 관습이라든지 전통을 지난날의 종주국에서 빌려오거나, 아니면 거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과거로부터 새로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점 이스라엘은 매우 다행이었다. 그 역사는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고 풍성하며, 풍부한 기록이 전혀 끊어지는 일도 없이 지금까지 남겨져 있으니까 말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관한 유대인의 천재성이, 요세푸스의 시절부터 19세기까지 일단 상실되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했다. 그러나 일단 시오니스트 국가가 창설되자, 그들의 재능은 역사 분야에서뿐이 아니라, 특히 고고학 분야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벤구리온, 모셰 다얀, 그리고 이가엘 야딘 같은 정치가와 장군이, 그리고 몇천이나 되는 수많은 일반인이, 아마추어로서, 그리고 전문가로서, 열정적인 고고학자가 되었다. 아득한 고대에 관한 연구가 대단한 기세를 가지고 이스라엘 전국민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 현상은 유기적으로 결속된 국가를 이루어 놓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종교가 지닌 활력에 비해 볼 때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종교는 유대 민족 그 자체를 형성하고, 라비의 지위를 대대로 계승해 온 종교적 지도자는 그 출발점인 모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었다. 유대인은 종교 의식을 꼼꼼하게 엄수하고, 이를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다. 의식 준수의 태도가 시오니스트 사회의 주요한 특색이어야 한다는 것은 올바르고 건강한 생각이다.



신전의 언덕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유대인의 용기와 하느님의 뜻으로 ‘신전의 언덕’이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나머지와 함께, 마침내 그들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율법 엄수의 두드러진 예는 당시의 그들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1948년의 독립 전쟁 중 예루살렘의 유대인이 쫓겨나게 된 오래된 게토의 수복은 간단히 결정되었다. 그러나 어려움은 다름 아닌 신전에 있었다. 아득한 옛날에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사상 최고 권위인 마이모니데스 자신은 설혹 신전은 파괴되었지만, 그것이 서 있었던 자리는 결코 그 거룩함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셰키나(Shekinah : 신의 보좌에 나타난 야훼의 영광)는 한 번도 이 곳을 떠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 장소 가까이, 특히 지성소의 서쪽 끝에 가까이 있었다고 예전부터 믿어져 온 ‘서쪽 벽’에 유대인들은 기도를 하기 위해 줄곧 찾아왔던 것이다.


신전 터가 신성하므로, 유대인은 발을 들여놓기 전에 반드시 의식을 행해서 몸을 정결하게 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신전에 관한 청정의 계율은 가장 엄격했다. 지성소는 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며, 그 대제사장이라 하더라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은 1 년에 오직 한 번, 속죄일뿐이었다. 신전 지역은 황야에서 성소를 둘러싸고 있던 모세의 ‘이스라엘 장막’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민수기의 청정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민수기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부정의 원인과 이를 정하게 만드는 방법 양쪽을 명시해 놓고 있다. 시체, 무덤, 사람 뼈를 만지거나, 아니면 그들과 같은 지붕 아래 있으면 부정해진다. 그리고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암송아지의 (‘암송아지’라는 말이 개역 성경과 NIV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의 9절에는 ‘암송아지의 재’로 나와 있다)를 취하여,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정한 자가 우슬초를 취하여 그 물을 찍어서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민수기 19장 17~18절).


이 암송아지(영어로는 heifer. 정확하게는 3세 미만의 새끼를 낳지 않은 암소다)는 ‘반점이 없고 흠이 없으며, 한 번도 멍에를 멘 일이 없는’ 붉은 소라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작업의 중요한 부분은 부정을 피하기 위해 모세의 형 아론의 정통 후계자인 엘르아살이 해야만 되었다. 엘르아살이 암소를 태운 재와 물을 섞으면, 그 혼합물은 필요한 시간까지 ‘정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이 계율은 매우 엄격하게 해석되었고, 그 바람에 적격 판정을 받을 수 있는 암소는 숫자가 적고 매우 비쌌다. 붉지 않은 털이 겨우 2 가닥 섞여 있기만 해도 그 재에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고대에 몇 마리의 암소가 불태워졌느냐에 대해서는 7 마리라는 설, 9 마리라는 설이 있다.


신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새로운 재를 준비하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당시까지 준비된 재가 남겨져 있어서 아모라임(amoraim. 단수는 amora : 3~5 세기 팔레스티나와 메소포타미아의 율법학교에서 Mishnah를 강의한 율법학자들. 2세기 말, 구전 율법을 수집해서 생활과 종교에 관한 규칙을 편집한 것이 탈무드의 제1 부를 구성한 미슈나, 미슈나에 대한 해설을 한 것이 Gemara로서 탈무드의 제2 부를 이루고 있다. 아모라임은 이 해설에 기여한 사람들)의 시대까지 죽은 자를 만진 사람을 정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그런 다음으로는 재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메시아가 나타나서 10 번째의 암소를 태워서 새로운 혼합물을 준비할 때까지는 정화 의식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결에 관한 계율, 특히 죽은 자에 관한 계율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지금 유대인은 모두가 교의상 정하지 않다는 데에 라비들의 의견이 일치해 있다. 그리고 정화하기 위한 재가 없는 이상, 어떤 유대인도 ‘신전의 언덕’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다.


붉은 암소에 대한 규정은 ‘후카(hukkah)’의 전형적인 예로 간주되었다. 후카란, 합리적인 설명은 없으면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형태로 내려진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교도들은 언제나 이런 계율을 지키는 유대교도를 비웃어 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어떠한 불이익을 무릅쓰고서도 그것을 완고하게 줄곧 지켜 나가며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해 왔다. 이렇게 해서 늦어도 1520년까지는 ‘서쪽 벽’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지만, 그 선을 넘으려 하지는 않았다. 1948년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구가 아랍측의 손에 들어가자, 유대인들에게는 ‘서쪽 벽’에서 기도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서 이 벽을 보는 일까지도 금하게 되고 말았다.


이런 상태가 이 후로 19 년간 계속된다. 1967년 예루살렘의 구시가지가 탈환되어, ‘서쪽 벽’에 다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해 샤부오트(Shavuoth=Pentecost : 유월절 이틀째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7주절’, ‘오순절’. 유대교에서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에게 율법을 받은 날.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린 날로서 ‘성령 강림절’로 기념한다. 부활절 후 제7 일요일=Whitsunday←이 날 세례를 많이 주는데, 세례받는 이들이 흰 옷을 입은 데서) 첫 날에는 25만 명의 유대교도가 이 장소에서 일제히 기도를 올리려 했다. ‘서쪽 벽’의 정면 전역이 정비되어, 포장이 된 훌륭한 광장이 탄생한다. 그러나, 신전의 언덕 그 자체에 유대인이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일부만이라도 들어가는 일을 인정해 보고자 라비들이 온갖 지혜를 쥐어짜 보았다. 그러나 결국, 진실로 유대교를 믿는 자는 신전의 언덕의 어느 구역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최종 결론이었다. 라비단 장로와 종교부는 유대교도가 신전의 언덕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했고, 위반자는 카레트(‘근절’ 혹은 ‘영원한 생명의 상실’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경고를 내걸었다. 몇천 명의 유대인이 이 경고를 무시했지만, 이런 사실은 라비의 무력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신전 지역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경건한 유대교도가 계율을 준수하며 감히 그렇게 하지 않는 일 역시 의의가 깊지 않은가.


예루살렘의 라비들이 이 문제에 관해 엄격한 입장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배경에는 또 하나의 부차적인 이유가 있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탈환이라는 시오니스트의 군사적 승리를 메시아 재림의 예언 성취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 유대인의 마음 속에 움터 나오는 것을 억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같은 이론이 신전을 재건하자는 제안에도 적용된다. 또 어떤 형태가 되었든, 전체 이슬람 세계로부터의 심한 반대에 부딪칠 것은 틀림없었다. 신전 터에, 역사적 예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 2 개의 이슬람 건조물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 재건 구상은, 라비 특유의 치밀함을 가지고 철저하게 논의되었다.


바빌론 포로로부터 제1 차 귀환을 했을 때, 유대인은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신전을 재건하지 않았던가. 거대한 유랑이 끝난 지금이야말로, 그 때의 신전 재건을 선례로 삼아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니다. 유대인의 과반수가 ‘이 땅에 살게’ 되었을 때 그 선례가 적용되어야지, 지금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에스라에게 이끌려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인의 수는 오늘날의 유대인 인구보다 훨씬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이 재건되지 않았나.


그건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느님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제3 신전은 하느님의 직접 개입에 의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지난날 시오니즘 그 자체에 반대할 때 사용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후의 사건들로 잘못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또한 솔로몬이 세워 놓았다고는 하지만, 제1 신전 역시 하느님의 역사로 돌려졌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그러나 허구한 날 전쟁만 하던 다윗 시대에는 신전이 세워지지 않았다. 신전 건설은 평화로운 솔로몬 시대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도 최종적인 평화가 올 때까지 제3 신전을 지을 수는 없다. 그리고 설혹 그 때가 오더라도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예언자가 필요하다. 당초에 하느님이 다윗에게 직접 건네신 신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없어지기야 했지. 그러나 제3 신전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에스겔서에 나와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러나 기술적 논의야 어찌되었든 현세의 사람들은 신전을 재건해서 그런 형식으로 예배를 재개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려니와, 그럴 의지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적 각성이 필요하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신전을 다시 세우는 일만큼 종교적 각성을 위해 효과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논의는 한도 없이 이어졌고, 결국 다수 의견은, 아직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월절을 위해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하느님에게 바치는 의식을 하자는 제안까지 제지되고 만다. 제단이 있었던 정확한 장소가 발견되지 않았고, 현재 코헨(사제)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제대로 제사장의 계보를 타고 있는 사람인지 의문시되는데다 사제가 입어야 할 의복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전과 이에 관한 논쟁은 지난날의 신앙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생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금도 살아서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세속적인 과거도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탈피하기 위해 창설된 것이 시오니스트 국가다. 여기서는 과거의 상징은 홀로코스트였다. 아니 상징 이상의 것이었다.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에 그늘을 드리우고, 당연히 유대 민족 공통의 기억 속에 돌출한 사건으로 계속 존속할 것이 틀림없는 무서운 현실이다. 유대교는 율법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온 것이 아니다. 통상적인 언어로 말해 법의 끝간 곳, 즉 정의에도 늘 관심을 보여 오고 있었다.


방랑 시대의 유대인 역사에서 한없이 되풀이되던 슬픈 특징은, 유대인인 까닭에 이 민족에게 가해진 박해이며, 아울러서 이교도 사회가 정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유대인 국가 성립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극악한 부정의에 대한 반응이었다. 신생 국가가 할 일 중 하나는 응징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일이었다. 유대인이 드디어 반격으로 돌아서, 권리를 침해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법률을 적용할 수 있다는 시실을 세상에 보여 주는 일이었다.



아이히만 재판


홀로코스트라는 범죄가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거창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앞에서 다룬 뉘른베르크 재판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기타 절차만 가지고는 분명히 불충분했다. 이미 1944년, 뒷날의 이스라엘 수상 모셰 샤레트가 책임자로 있던 유대 대표 기관인 정치국 조사부가 나치 전쟁 밤죄인에 관한 자료 수집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 후, 비밀 조직을 포함하는 몇몇 이스라엘 국가 기관이 범죄자를 추적해서 법정으로 끌어내는 작업을 임무의 일부로서 하고 있었다. 활동은 이스라엘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국내 유대인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유대인 회의 같은 국제적인 조직이 이에 참여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도 참여했다. 1946년 부헨발트, 마우트하우젠 같은 몇몇 강제 수용소에서 5 년간 살아남은 38 세의 체코계 유대인 시몬 비젠탈은 다른 수용소의 동료 30 명과 하께 유대 역사 문서자료 센터를 설립했다가, 나중에 빈에 본부를 차렸다. 그리고 아직 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나치 범죄자를 찾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보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홀로코스트는 학술 목적 혹은 교육 목적을 위해 아주 열심히 연구되었다. 1980년대까지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에만도 홀로코스트 연구를 위한 강좌가 93 개나 마련되었고, 홀로코스트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 기관이 6 개 설치되었다. 예를 들면 로스앤젤레스의 비젠탈 홀로코스트 연구 센터에서는 최신 기술을 도입해서 ‘다중 스크린, 다중 음성에 의한 홀로코스트 시청각 의사(擬似) 체험’이라는 것을 완성했다. 세로 40 피트, 가로 23 피트의 아치형 스크린, 3 대의 필름 영사기와 특제 시네마스코프 렌즈, 18 대의 슬라이드 영사기와 5 개의 음원에서 소리가 나는 스피커 등이 설치되었고, 이 모두가 동시 제어를 하는 중앙 컴퓨터에 접속되어 있다. 홀로코스트 따위는 없었다, 혹은 극단적으로 과장된 것이라고 반대주의자들이 필사적으로 이를 입증하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극적인 홀로코스트 재현 시도가 지나친 처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기록하는 제1의 목적은, 사법을 통한 정의 실현이었다. 비젠탈 자신 1100 명 이상의 나치를 고발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홀로코스트의 실행 관리 책임자로서는 히믈러의 바로 다음의 위치에 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신원을 확인해서 체포했고, 재판으로 넘겨 판결을 선고했는데, 이를 가능하게 만든 대량의 서류와 자료를 제공한 것도 그였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에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의 공작원에 의해 체포된 다음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호송되어 1950년에 성립한 ‘나치와 나치 협력자 처벌법’이 정해 놓은 15 개 항목의 죄로 기소되었다. 아이히만의 재판은 다양한 이유로 이스라엘 국민과 전 유대 민족에게 실제적인 의미에서나 상징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을 살육한 자가 면책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 그들이 몸을 감출 곳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을 가장 인상적인 형태로 보여 주었다.


976 명의 외국 특파원과 166 명의 이스라엘인 기자가 이 재판을 취재해서 보도했다. 기소장이 홀로코스트의 전체상만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의 수많은 사건을 망라한 포괄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소송의 진행을 통해 무수한 사람들이 대량 살육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판은 또, 이 지극히 감정적인 사건에 대처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사법이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체포 당시 아이히만은 처음에 자신이 본인이라는 것, 자신을 처벌할 권리가 유대인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1960년 6월 3일에는 ‘만일 죄를 보상하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면, 공중의 면전에서 내 목을 매달아도 좋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조금 비협조적이 되어, 뉘른베르크 재판 때 곧잘 들을 수 있었던 변명을 시작했다. 즉 자신은 남의 명령을 실행하는 기계의 톱니바퀴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검찰에 대해 품격이 결여되기는 했지만, 적극적이고, 약삭빠르며, 완고한 변호를 펼치게 된다. 이스라엘 의회는 외국인(독일인 변호사인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 박사)에 의한 아이히만 변호를 인정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정부는 3만 달러의 변호료를 지불했다. 재판은 오래 끌었고 철저한 심리를 했다. 그리고 1961년 12월 11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은 사실 인정의 내용을 기술할 뿐 아니라, 체포 당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재판소에 유대인 관할권이 있고, 아이히만을 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면밀하게 논증하고 주장했다.


압도적인 증거 때문에 엄한 양형은 불가피했다. 12월 15일에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상고는 이듬해 5월 29일 각하되었다. 이츠하크 벤 츠비 대통령은 감형 탄원서를 받아 들고, 만 하루 동안 숙고했다. 이스라엘은 그때까지(그 이후에도) 한 번도 사형을 집행한 일이 없었고, 내외의 많은 유대인들이 교수형은 피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선고가 올바른 것임을 믿었고, 대통령은 형의 경감을 정당화할 만한 아무런 사정을 발견할 수 없었다. 라믈라 형무소의 한 방에 함정처럼 구멍이 뚫리고, 교수형용 나무틀이 그 위에 설치되면서, 형 집행을 위한 방이 특별히 준비되었다.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31일 0시께 처형되었다. 유해는 불태우고 재는 바다에 뿌려졌다.


아이히만 사건은 이스라엘의 기동성, 공명정대함, 그리고 굳은 결의를 보여 주었다. ‘최종 해결’ 즉 유대인 절멸 계획의 악몽를 떨쳐 내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쌓아 올리는데 꼭 필요한 한 페이지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의 국민 의식을 아직도 계속 묶어 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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