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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15)

2010.04.27 02:17

김유동 조회 수:1575


1983년 5월, 이스라엘의 여론 조사 회사 스미스 리서치 센터가 이스라엘인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태도에 관해 철저한 조사를 했다. 이에 의하면, 이스라엘인의 압도적 다수(83 퍼센트)가 홀로코스트는 그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센터의 소장 하노흐 스미스는 ‘홀로코스트는 제2, 제3 세대를 포함한 이스라엘인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보고했다. 홀로코스트의 광경은 사실, 이스라엘 건국의 목적과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조사 대상자의 91 퍼센트가 서방측 지도자들은 대량 살상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서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며, 이와 거의 비슷한 87 퍼센트가 ‘유대인은 비유대인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홀로코스트에서 배웠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리고 61 퍼센트는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 건국의 큰 요인이라고 보고 있으며, 다시 62 퍼센트가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하는 한, 홀로코스트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파라오의 노예였다는 공통의 기억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성격을 규정했던 것처럼, 이제는 홀로코스트가 신생 국가를 형성한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는 전체 유대인의 3분의 1을, 그것도 특히 유대교 특유의 강점의 근원이었던 경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말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손실을 세속적인 관점에서 포착할 수도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오래된 게토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된 유대인들의 지능은 세계를 측량할 수도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했다. 그것은 근대 유럽과 북미의 문화를 창조하는 주요한 힘이었다. 그러나 이 재능의 원천을 히틀러가 근절해 버렸다. 인류가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하고 말았는지 가늠도 할 수 없다. 이스라엘로서는 박탈감의 크기를 계량할 수도 없다. 지극히 많은 이스라엘의 시민이 가족과 어린 시절의 친구를 거의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상실감은 개인의 레벨에서도 컸다. 동시에, 나라를 함께 건설했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3분의 1이 없어졌기 때문에, 집단 전체로서도 상실감은 컸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강하게 느껴졌던 것은 정신적인 공백일 것이다.


아이히만의 목숨을 빼앗기 전에, 이스라엘의 국민이 그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가며 진지하게 그 시비를 논한 것은 유대교가 인간의 생명에 최고의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특히 사랑하신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그처럼 죽어 간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라도 욥기에 상당한 책이 필요했다. 홀로코스트가 시작되기 6 주 전, 다행히도 폴란드를 출국한 위대한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요슈아 허셸(1907~1973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 놓고 있다.



‘나는 사탄의 제단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에서 끄집어내어진 타다 만 나무다. 이 제단 위 에서 몇백만 명의 인간의 생명이 악의 영화(榮華)를 위해 끊어지면서, 너무나 많은 것들 이 상실되고 말았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이루 셀 수도 없는 인간 그 자체, 하느 님은 정의요 연민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신앙, 2000 년에 걸쳐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자라나고 소중히 간직되었던 성서에 대한 애착심에 곁들여진 비밀과 능력 등’.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새로운 시온은 이 해답 없는 문제를 끌어안은 채 시작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해답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산 유대인의 계속


그러나, 홀로코스트 이전의 시대와 비해 볼 때, 많은 면으로 유대인의 지위가 온 세계에서 근본적으로 개선되었다. 유대 민족 국가가 창설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의 유랑이 끝난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니, 어찌 끝날 수가 있을 것인가. 아서 코엔이 주장한 것처럼, 유대 민족의 유랑은 세속적 민족 국가가 건설되었다고 해서 바로잡아질 수 있는 역사상의 사고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족이 아직 구제되지 않은 상태와 역사 사이의 관련을 보여 주는 계수(係數)’라고나 할 형이상학적 개념인 것이다.


거의 모든 유대인은 계속해서 국가 체제 밖에 있었다. 바빌론 포로 이래로 줄곧 그랬다. 제2 신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제3차 통일 국가라고 할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것은 전 유대인의 약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건국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비율이 근본적으로 바뀔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의미의 시온의 실현은, 2000 년 동안이나 가져 보지 못했던 살아서 고동치는 심장으로 비유할 만한 것을 온 세계의 유대인에게 제공했다. 그 동안 믿음이 돈독한 사람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팔레스티나 입식과 시온으로의 귀환 사상이 주지 못하던 것들을 이스라엘 건국은 온 세계의 유대인 사회에 또렷한 꼴로 마련해 준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은 20세기판 신전 재건이라 할 수 있다. 헤롯 대왕 밑에서 건립된 신전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럽지 않은 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틀림없이 실재해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나라가 존재함으로써, 방문할 수 있고, 공유할 수가 있는 등, 이산 유대인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변화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는 늘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때로는 걱정도 하며, 가끔씩은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일단 이스라엘이 건국되어 자신을 방위하고 정당화하는 능력을 보여 주게 되자, 이제 다시는 이산 유대인일 때처럼, 어느 누구도 유대인임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21세기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산 유대인들은 극단적인 부와 빈곤 그리고 곤혹스러운 정도의 다양성이라는 특질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말, 유대인 총인구는 1800만 명 가까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이 되고서도 홀로코스트에 의한 손실은 회복되지 않은 채로 있다. 현재의 유대인 총인구 1350만 명 가운데 350만 명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유대인이 단연코 가장 많은 곳은 575만 명을 포용하고 있는 미국이다. 캐나다의 31만 명, 아르헨티나의 25만 명, 브라질의 13만 명, 멕시코의 4만 명, 기타 12 개 국가에 퍼져 있는 인구를 합치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는 현재 전세계 유대인의 반수 가까운 660만 명이 살고 있다는 계산이 된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이어 인구가 많은 것은 약 175만 명의 유대인이 사는 소련(이 책은 소련 붕괴 이전에 쓰였으므로)이다. 동구권에서는 헝가리에 7만 5000 명, 루마니아에 3만 명 등, 모두 13만 명이 공산주의 동유럽에 살고 있다. 서구에는 125만 명이 조금 넘는 유대인이 프랑스(67만 명), 영국(36만 명), 서독(4만2000 명), 벨기에(4만1000 명), 이탈리아(3만5000 명), 네덜란드(2만8000 명), 스위스(2만1000 명) 등에 퍼져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10만5000 명을 포용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외하고 보면 거의 유대인을 찾아 볼 수 없으며, 겨우 모로코에 약 1만7000 명, 에티오피아에 5000 명이 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아시아에서는 이란에 여전히 3만5000 명, 터키에 2만1000 명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는 모두 7만5000 명이 있다.


이산 유대인 사회의 역사, 구성, 기원은 꽤 복잡하다. 예를 들어 인도에는 1940년대 말, 모두 2만6000 명의 유대인이 대별해서 3 개의 집단으로 갈라져 살고 있었다. 하나는 베네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인데, 그 수는 1만3000 명으로서 서해안의 뭄바이 주변에 산다. 자신들의 기록과 서적들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인도로 이주한 경위가 끈끈하게 구두로 전해 내려오다가, 그 내용이 1937년에 책으로 정리되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BC 175~163년)의 유대인 박해 시절, 갈릴리에서 피해 왔다고 한다. 배가 뭄바이 남쪽 30 마일 지점에서 난파하는 바람에 겨우 7 가족이 살아 남았다. 경전도 없고 히브리어도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안식일과 그 밖의 유대교 축제일을 지키고 있으며, 아기에게 할례를 하고, 음식물에 관한 유대교의 계율을 지키며, ‘셰마’(신앙고백)가 전승되어 왔다. 그들은 마라티어(Marathi語=인도 중부와 서부에 사는 Maratha족이 사용하는 근대 인도이란어)를 사용하며,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받아들여, 자신들을 고아(흰 사람)와 칼라(검은 사람)의 두 그룹으로 갈랐다. 이것은 인도 이주가 2 차에 걸쳐 있었던 것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한때 2500 명을 헤아리던 코친의 유대인이 있다. 그들은 인도 서해안을 다시 650 마일 남쪽으로 간 곳에 살고 있다. 서기 974년에서 1020년까지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2 장의 구리판에 고대 타미르어로 특권을 새겨 놓은, 일종의 종족 유래의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코친의 유대인이 여러 번에 걸쳐 이주해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일찍 이주해 온 것은 코친의 검은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 후 16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어쩌면 기타 유럽과 중동에서도 더 많은 흰 피부의 유대인이 온 것 같다. 검은 피부와 흰 피부의 유대인 쌍방이 다시 갈라지고, 여기다 유대인과 노예 신분의 현지인 첩 사이에서 난 카스트상 지위가 낮은 메슈아라림이라고 불리는 제3의 주요한 집단이 출현했다. 다른 집단에 속하는 유대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란 결코 없었다.


그리고, 1820년에서 30년까지의 10 년 동안에 스파라드계 유대인 2000 명이, 바그다드에서 인도에 도착했다. 1930년대에 들어 마지막으로 온 것은 유럽에서 온 난민 유대인이다. 뒤에 온 2 집단 사이에 종교상의 교류는 있었지만, 사회적인 교섭은 없었다. 그리고 베네 이스라엘과 코친의 유대인이 한 시나고그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란 결코 없었다.


흰 피부의 유대인은 모두, 그리고 검은 피부의 유대인도 그 대부분이 영어를 했으므로, 영국 통치하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군대에서도 공훈을 세웠고, 관리, 무역상, 상점주, 장인(匠人) 등이 되었다. 뭄바이 대학에 진학해서 히브리어를 공부해 유대의 고전을 마라티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기술자, 법률가, 교사, 과학자로 활약했다. 1937년에는 인도의 유대인 집단 모두의 중심지인 뭄바이에서 유대인 시장(市長)이 나왔다. 그러나 독립 후의 인도는 영국 통치 시대와 비해 볼 때, 유대인으로서는 살기가 거북살스러워져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 건국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 결과 1980년대에 접어들자, 베네 이스라엘은 겨우 1만 5000 명, 코친 해안의 유대인은 겨우 250 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


인도의 유대인 같은 집단이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유대교가 지닌 강한 종교의 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열악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이들의 끈질김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발생한 몇 가지 파괴적 사건 때문에,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몇십 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거의 전멸하다시피한 일도 있다. 예를 들면 전후 공산 중국은 중국식 ‘최종 해결’을 유대인에게 밀어붙였다. 대상이 된 자의 대부분은 소련과 히틀러에게 지배되던 유럽에서 탈출해 온 사람들이지만, 8세기 이래 중국에서 살아 온 유대인의 자손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인은 모두 중국을 탈출하거나, 추방당했다. 그 결과 홍콩에서 1000 명, 싱가포르에서 400 명이 가냘프게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아랍 세계 전역에서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걸쳐, 역사가 오랜 스파라드계 유대인 사회가, 전쟁 전에 비해 규모가 현저하게 축소되거나 소멸하고 말았다. 유럽의 넓은 지역에서 홀로코스트의 광풍에서 살아남았거나 그 후 돌아온 유대인은 이주, 특히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바람에 더욱 숫자가 줄어들었다. 1939년에는 6만 명이었던 라디노어(Ladino語 : 터키, 그리스 등에 사는 스파라드계의 스페인어와 히브리어와 아랍어가 섞인 말)를 사용하는 살로니카(Salonika : 그리스 북동부 마케도니아의 항구 도시. 그리스 이름은 테살로니카)의 유대인은 1980년대가 되자 겨우 1500 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 아마도 모든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창조력이 풍부하다고 할 빈의 유대인은 전쟁 전의 20만 명에서 8000 명으로까지 감소되었고, 1949년에는 빈의 되블링 묘지에 매장되어 있던 헤르츨의 유해까지도 재매장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운구되어 갔다.


1930년대 7만 가까이를 헤아리던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인구도 40 년 후에는 1만 2000 명이 될까 말까한 정도가 되고 말았다. 안트워프를 서유럽의 다이아몬드 거래의 중심지로 키워 놓은 그 곳의 유대인의 경우 영업을 계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인구는 전쟁 전의 5만5000 명에서 1980년대에는 1만3500 명으로까지 줄어들고 말았다. 왕년에는 금융 분야에서 매우 이름 높은 역사를 자랑하던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수는 1933년의 2만6158 명에서 1970년대에는 4350 명으로 낮아졌다. 1920년대 17만5000 명의 유대인이 살면서 세계 문화의 척도라고 할 정도의 활약을 보여 준 베를린에서, 1970년대 유대인의 숫자는 서베를린에 겨우 5500 명, 동베를린에 850 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 가장 무참한 공백 지대가 된 곳은 폴란드인데, 전쟁 전의 유대인 인구 330만 명이 1980년대까지 5000 명으로 내려앉았다. 지난날 시나고그와 도서관이 점재하던 수많은 거리에는 이미 유대인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런가 하면 끊임없이 성장을 보이고 있는 유대인 공동체도 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유대인은 나치 시대를 대단한 끈덕짐으로 살아남았다. 독일군에 의한 점령 당시 2만5000 명 있던 유대인은 전쟁 후 점차로 그 숫자가 불어나, 3만2000 명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는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이탈리아로 온 유대인 이민에 의한 것이다. 1965년에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이 벌인 연구에 의하면, 많은 선진 제국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유대인 사회는 취약한 인구 동태를 보이고 있다. 출생률은 1000 명당 연 겨우 11.4 명으로 낮으며, 이탈리아 인구 전체의 18.3 명을 밑돈다. 임신율과 결혼율도 낮고, 사망률과 평군 연령(후자는 유대인의 41 세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33세)만이 이탈리아인 전체보다 높은 실정이다.


로마에서는 유대인 사회의 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1880년까지 오래된 게토였던 트라스테베레의 한 구역에 아직도 살고 있다. 왕정 시대부터, 유대인은 이 장소에서 폐품 매매와 행상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지금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유복한 유대인이 극빈 유대인과 거의 지붕을 맞대고 살고 있다. 이 곳에 사는 스쿠올라 템피오라고 불리는 중요한 30 가족의 경우 각각 족보를 1900년 전인, 로마 황제 티투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루살렘 신전이 파괴된 후, 그들의 조상은 쇠사슬에 묶여 이곳에 끌려 왔다. 로마의 유대인은 장중한 가톨릭 교회의 그림자에 짓눌려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교회는 그들을 어떤 때는 이용하고, 박해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보호하기도 했다. 유대인들도 교회를 배척하는 동시에 조화를 도모하려 하기도 했다. 예전의 게토 문 바로 밖, 룽고테베레 첸치에 있는 주요한 시나고그는, 이탈리아 교회 건축의 바로크 양식을 딴 훌륭한 건물이다.


1986년 4월, 이 곳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로마 교황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시나고그의 예배에 출석해서, 로마의 라비의 장과 교대로 시편을 읽었다. 교황은 유대교도 회중을 향해, ‘여러분은 우리가 마음 속으로부터 따르는 형제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형님뻘’이라고 말했다. 그 의도는 좋았지만, ‘형님’이라고 강조한 것은 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있다.


프랑스의 유대인 사회도, 전쟁 후, 인원수와 세력 양쪽 면에서 틀림없이 성장했다. 나치와 비시 정권(Vichy는 프랑스 중부 광천수로 유명한 지방 이름.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있을 때 Pétain 원수를 국가 주석으로 삼은 친독 정권이 여기 있었다) 동맹은 전쟁 전에는 34만 명이던 프랑스의 유대인 가운데 9만 명을 살육했다. 이 비극은, 그 동안 프랑스 상층 사회로의 동화가 진행 중이던 그 고장의 유대인 사회가 유대인 난민을 국외로 추방하는 일에 일부 협력한 사실과 맞물려 한층 뒷맛을 고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30 년 동안에 이슬람 세계에서 스파라드계 유대인 이민이 대량으로 흘러 들어옴으로써 이 손실은 숫자상으로는 충분히 회복되었다. 이집트에서 2만 5000 명, 모로코에서 6만 5000 명, 튀니지에서 8만 명, 알제리아에서 12만 명이, 그리고 시리아, 레바논, 터키에서도 각각 상당한 숫자가 유입했다. 결과, 프랑스의 유대인은 전쟁 전 수준의 2 배 가까운 67만 명 이상에 도달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유대인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


유대인 인구의 대폭 증가는 문화면에서도 근원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원래 프랑스의 유대인은 언제나 가장 동화 경향이 강했는데,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거의 완전히 공화제 지지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이런 경향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비시 정권하에서 많은 프랑스인이 취한 야비한 태도로 이 신뢰 관계에 금이 가고 만다. 1945년에서 1957년까지의 12 년 동안에 프랑스계 유대인이 성을 바꾼 숫자가, 1803년에서 1942년 동안에 바꾼 숫자의 6 배나 되는 것도 그런 사정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지표일 것이다. 그래 보았자 성 바꾸기를 한 총수는 별대단한 것이 못 되고, 전쟁 후에도 볼 수 있었던 강한 동화 경향은 프랑스 유대인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고 있다. 레이몽 아론 같은 유대인 작가들은 현대 프랑스 문화의 중추에 자리잡고 있다. 조용하고, 젠체하지 않으며, 매우 세련된 중상층에 위치하는 이런 유대인 중에서 제4 공화국에서는 르네 마이에르와 피에르 망데스-프랑스, 제5 공화국에서는 미셸 드브레나 로랑 파비우스 같은 저명한 수상이 탄생했다. 여기에다, 스파라드계 유대인들이 아프리카로부터 흘러 들어와 프랑스계의 유대적인 성격을 크게 강화한다. 그들은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사용하지만, 동시에 히브리어를 읽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었다. 19세기의 프랑스계 유대인은 ‘3 세대 이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믿고, 아버지는 의심하고, 자식은 부정한다. 할아버지는 히브리어로 기도를 드리고, 아버지는 프랑스어의 기도서를 읽고, 아들은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모든 축제일을 지키고, 아버지는 속죄일만을 지키며, 아들은 이 모두를 무시한다. 할아버지는 유대교도로 머무르고, 아버지는 동화하고, 아들은 단순한 이신론자(理神論者)가 되고 만다.……다만, 무신론자나, 푸리에리즘이나, 생 시몽주의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理神論者(deist) : 자연신론. 기독교로부터 신비성과 초이성적 전승을 배제하고, 신이나 계시 같은 것들을 이성이나 자연과 양립하는 한 용인하고 옹호하는 입장. 17~18 세기, 영국과 유럽의 자유 사상가들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


푸리에리즘(Fourierism) : 프랑스의 유토피아주의자 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년)가 창도한 소자치체를 기반으로 한 분권적 공산주의 사상과 운동. 요는 같은 취미와 이상을 지닌 작은 단체로 갈라, 공동 대가옥에 살며, 각자가 가장 적성이 맞는 일을 하고 산다는, 일종의 공동조합적 공산 체제.


생 시몽주의(Saint-Simonianism) : 생시몽(1760~1825년. 공상적 사회주의자로서, 본명 Claude Henri de Rouvroy)이 제창한 국가사회주의. 국가가 전재산을 소유하고, 노동자는 그 노동에 상응하는 재산을 소유할 자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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