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유대인의 역사(116)

2010.05.01 23:29

김유동 조회 수:1447


전쟁 후의 프랑스에서는 이런 이론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 아들은 불가지론에 빠져서 고립하게 된 아버지를 내팽개쳐 두고, 할아버지의 종교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한때 없어지거나 없어질 뻔한 중세 유대인 공동체가 알제리아로부터 유대인이 유입되는 바람에 되살아났다. 예를 들면, 1970년에는 저명한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가 액상 프로방스의 새로운 시나고그의 초석을 닦아 놓았다. 같은 장소에 원래부터 있던 오래된 시나고그는 전쟁 중에 팔려서 개신교 교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나고그만이 유대적인 것들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교와 세속의 양쪽 시각에서 볼 수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1960년대, 70년대를 통해, 오랜 역사를 지닌 프랑스 이스라엘 연합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유대교 신봉자가 많았는데, 이들은 프랑스 내외에서 유대인의 대의를 위해 전투적인 태도를 취했다. 종전보다도 많은 비율의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고 히브리어를 익히게 되었다.


1930년대 당시와 비해 볼 때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안티세미티즘 운동의 잔재는 유대인의 투쟁심을 불러 일으켰다. 1950년대의 푸자디스트(Poujadist : 소규모 상인과 수공업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보수 반동 사상과 운동. 1954년에 출판과 서적 판매업자인 Pierre Poujade가 제창), 1980년대의 국민전선 같은 반유대주의자가 의회에 진출하자, 유대인 조직은 단호히 이에 응전해서, 자신들의 신념을 명확하게 표명했다.


1980년 10월 3일, 코페트닉 거리에 있는 ‘자유’ 시나고그가 폭파당했다. 당시 이런 사건이 여럿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이를 위해 ‘르 르누보 쥐이프’(유대인의 부활)라는 운동이 활기를 띤다. 아프리카로부터의 이민으로 인구가 늘어났으나, 프랑스의 유대인 사회는 의외일 정도로 계속 시오니즘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1956년, 1967년, 1973년, 그리고 1980년대 초와, 이스라엘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을 때마다, 이를 자신들의 위기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의 정책이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이익에 반한다는 생각이 들기만 하면, 반드시 강경하게 반대하곤 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유대 로비가 결성되었는데, 1981년의 선거에서 유대인이 던진 표는, 23 년간에 걸쳐 프랑스를 지배해 온 드골주의 우파 지지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새로운 유대인 지배 계급이 프랑스에 타나나고 있었다. 그들은 다수의 힘과 젊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는 이산 유대인 전체의 의견 형성에 보다 큰 영향을 끼칠 기세였다.


이산 유대인 중에서, 프랑스계 유대인의 영향력 확대는 환영할 일이라 하겠다. 특히 히틀러 시대를 거치면서, 독일에 있는 유대인들이 거의 완전히 침묵해 버린 오늘날을 감안해 볼 때, 더더욱 그렇다. 최근의 수십 년간 필연적인 추세로, 특히 이디시어가 스러져 나가자 이산 유대인은 주로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1646년에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귀환한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 하겠다. 오늘날 영 연방 제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85만 명, 미국에 600만 명 가까운 유대인이 살고 있으며, 세계의 유대인 반 이상이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영국이 유대인의 역사에 직접 관여한 것은 근대 시오니즘의 탄생과 밸포어 선언, 그리고 팔레스티나의 위임 통치 시대다. 세계의 주된 유대인 사회 중에서 영국의 그것은 가장 안정되고, 만족스러운 것이어서, 위협받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1930년대에는 9만 명의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였고, 이런 식으로 세력이 점차 커져 나갔다. 제1 차 세계 대전 직전 30만 명이었던 유대인 인구는 제2 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4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유대인 사회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유대인 사회에서도 인구 동태상 취약성을 보이고 있엇는데,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이 경향은 점차 가속도가 붙었다. 예를 들면, 1961년에서 1965년까지 사이에 영국인 혼인 비율의 전국 평균이 1000 명당 7.5 명이었음에 비해, 시나고그에서의 평균 혼인 비율은 4.0 명에 지나지 않았다. 1967년에 41만 명이었던 유대인 인구는 1970년대에 40만 명선이 무너지더니,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아마도 35만 명을 밑돌게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근대 영국의 유대인 사회에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계의 기업가는 계속해서 금융 부문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오락, 부동산, 의료, 신발류, 산매업 분야에서는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라나다 TV 같은 전국 규모의 회사도 많이 창설했다. 시프 일가는 마크스 앤드 스펜서 회사를 성공시켜 놓았는데, 전쟁 후의 영국 비즈니스계에서 가장 오래 가면서도 인기가 떨어질 줄 모르는 대성공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와인스토크 경(Lord Arnold Weinstock 1924~2002년 :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 노동자의 집안에서 남작으로까지 오른 그는 ‘2차 대전 후 영국 기업가의 수상’이란 찬사를 들었다)은 제너럴 일렉트릭을 영국 모든 기업 중에서 최대의 기업으로 변모시켜 놓았고, 유대인은 출판, 신문 사업에서도 맹활약을 벌였다. ‘주이시 크로니클’지는 이산 유대인이 내놓은 신문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들은 귀족원의 의석도 착실하게 증가시켜 놓고 있었다. 1980년대 중엽, 적어도 5 명의 유대인이 같은 시기에 영국의 각료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대단한 에너지가 다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산 유대인 전체 혹은 시오니스트 국가에 대해, 한 덩이가 되어 지도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도 없었다. 이 점 영국의 유대인 사회는 영국 자체와 같은 행동을 취했노라고, 혹은 취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도적 입장을 미국에 넘겨주고 말았으니 말이다.



미국의 유대인 사회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한층 확대와 통합을 실현했다. 이는 유대인의 역사 중에서, 이스라엘 국가 창설 못지않은—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박해로 고통을 당해 온 유대인들은, 시오니즘 운동을 성공시킴으로써 언제든지 도피할 수 있는 안전한 토지를 확보했고,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방어할 주권을 쟁취했다. 이에 대해 미국에서의 유대인 사회의 성장은 그들에게 아주 다른 성격의 힘을 부여했다. 이 지상 최강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 관여하고, 중요하면서도 정당하고 항구적인 역할을 다해 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날 궁정 유대인이 지니고 있던 취약한 영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민주주의적 신조와 유대인 인구 동태에서 볼 수 있는 특수 성격의 결과이다.


1970년대 말, 미국의 유대인 인구는 578만960 명이었다. 이는 이 나라 총인구의 겨우 2.7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도시부, 특히 대도시에 집중해 있었다. 그런데 그 대도시는 작은 도시나 마을 혹은 시골에 비해, 문화, 사회, 경제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지도력을 발휘하기가 쉽고, 정치적 영향력도 큰 법이다.


20세기 말이 도고서도, 유대인은 여전히 대도시 거주자였다. 텔아비브-야파에 39만 4000명, 파리에 30만 명 이상, 모스크바에 28만5000 명, 런던과 그 주면에 28만 명, 예루살렘에 27만2000 명, 키예프에 21만 명, 레닌그라드(현 상크트 페테르부르크)에 16만 5000 명, 그리고 몬트리올과 토론토에 각각 11만5000 명씩이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현저한 도시 집중을 보이는 곳은 미국이다. 199만8000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뉴욕과 그 주변은 지상 최대의 유대인 도시이고, 그 수는 단연 돌출해 있었다. 두 번째로 큰 것은 로스앤젤레스의 45만5000 명, 그리고 필라델피아(29만5000 명), 시카고(25만3000 명), 마이애미(22만5000 명), 보스턴(17만 명), 워싱턴 DC(16만 명)으로 이어진다. 1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도시가 모두 69 개이다. 유대인 인구 집중은 주 단위로도 살펴볼 수 있다. 뉴욕주에 사는 214만3485 명의 유대인은 주 인구의 12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 비율은 뉴저지주에서도 6 퍼센트, 플로리다주에서 4.6 퍼센트, 메릴랜드주에서 4.5 퍼센트, 매사추세츠주에서 4.4 퍼센트, 펜실베이니아주에서 3.6 퍼센트, 캘리포니아주에서 3.1 퍼센트, 그리고 일리노이주에서는 2.4 퍼센트가 된다. 각각 허투루 볼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민족별 정치 조직 중에서도 유대인 표는 가장 잘 조직되고, 지도자의 지시에 가장 잘 호응하는 바람에, 가장 효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대인 표가 아무리 잘 통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과장된 감이 있다. 1932년 이후 유대인은 그 압도적 다수가 민주당에 표를 던지고, 때로는 85~90 퍼센트라는 높은 지지율을 보여 왔다. 민주당의 대통령과 그 정책에 대해 유대인이 지지율에 상응하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실제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유대인 투표자가 줄기차게 보여 온 민주당에 대한 충성은 유대인 사회의 이해보다는 오히려 정서적, 역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경향은 점차로 강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선거 전문학자가 조금 놀랐을 정도로 1980년대에 들어가서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비율은 60 퍼센트 전후로까지 낮아지고 있다. 1984년 선거에서 유대인은 무신론자를 제외하고 보면, 민주당 후보 지지가 다수를 차지한 유일한 종교 그룹이며, 흑인을 빼 놓고 보면, 유일한 소수 민족 그룹이었다. 유대인은 자신들에 관한 경제와 외교 정책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빈곤층과 사회의 약자에 대해 늘 품고 있는 동정심을 바탕으로 투표했다. 20세기 최후의 4반세기에 이르고 보니, 미국 정계에 대한 ‘유대 로비’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단순한 신화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유대계 시민이 미국에 관여하는 방식 전반에는, 이전과는 현저하게 양상이 다른 훨씬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즉 유대인 소수파가, 미국 사회의 중추적 존재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20세기를 통틀어 미국의 유대인은 이 나라가 그들에게 제공해 준 기회를 줄곧 최대한 이용해 왔다. 대학에 다니고, 의사, 변호사, 교수가 되고,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전문적 직업을 가졌다. 정치가와 관리가 되고, 종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금융과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특히 사(私)기업, 예를 들면 신문, 출판, 방송, 오락 분야에서 강점을 발휘했고, 지적 분야 전반에 강했다. 소설 저술 등 몇몇 분야에서는 압도적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특정 영역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진출해서 성공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어느 사이에인지 성공한 유대인 엘리트가 도처에서 출현했다. 그리고, 백인, 앵글로샌슨, 프로테스턴트라는 한 시대 전의 엘리트 집단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영향을 사회 모든 측면으로 서서히 침투시켜 갔다. 그들은 미국 사회의 한 이익 단체이기를 마다하고 미국이라는 유기체의 일부, 즉 수족, 그것도 힘찬 수족이 되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내부로가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민주 정치, 관용, 자유주의라는 역사적 전통을 지닌 그들은, 지난날 영국에서, 휘그당원이 하던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역할을 미국에서 짊어지게 되었다. 즉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계몽적 원조의 손길을 내뻗음으로써, 그들의 특권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엘리트의 입장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더 이상 권리를 추구하는 소수민족이 아니라, 소수 민족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다수파의 일부였다. 그들의 정치 활동은 어느 사이엔지 정책에 대한 영향력 행사로부터 실행 그 자체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 문화에서의 유대적 요소를 가려내고 구별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 나라의 문화에서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미국의 정책에서 유대인의 이익을 배려한 것을 찾아내기란 더더욱 어렵다. 전체로서 미국의 이익과 겹쳐지는 부분이 자꾸만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향은 특히 대이스라엘 정책에서 현저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미국의 지도자를 설득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스라엘은 법의 지배와 문명화한 행동 기준이 어정쩡해지기 쉬운 지역에서, 그런 가치를 높이 치켜들고, 자유 민주주의의 거점으로서 고고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이스라엘이 미국의 지지를 얻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오직 한 가지 남겨져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지지를 어찌하면 슬기로운 방법으로 제공하느냐는 것뿐이다. 1980년대의 세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설혹 미국 안에 유대인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중동에서의 미국의 가장 신뢰할 만한 우방으로 머물렀을 것이고, 미국은 이스라엘의 가장 신용할 수 있는 친구로서 계속 행동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저 규모가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성격 때문에 이산 유대인 전체 중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확립하고 있다. 완전히 미국에 동화하면서도 유대인으로서의 자각을 유지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동시에 유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날 이런 현상이 유대인의 역사에 존재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의 성립과 그 인구 구성에 관한 특이한 상황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히 ‘나그네요 기류하는 자’인 유대인이 최종적으로 발견한 안주의 땅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나그네로서 온 나라, 미국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그네였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거주에 관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동등한 권리를 모두가 누리는 시점이 되면, 모든 사람이 그 곳을 자신의 나라로 삼게 마련이다. 미국은 유대인이 이주한 숱한 나라들 가운데, 종교와 그 계율을 지키기에 유리한 유일한 나라였다. 시민 도덕을 심어 주려는 종교는 이 나라에서 존경을 받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미국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율법’이라고나 할 자신들의 포괄적 종교를 존중하는 나라였다. 유대인처럼 이 세속적 토라를 준수하는 데 적합한 사람들은 달리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미국의 유대인 사회를 단순히 이산 유대인 사회의 하나로만 보다가는 오해가 되고 말 염려가 있다. 미국의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유대인이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도 더 강하게, 나는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을 창조해 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 흔히 말하는 이산 유대인과 함께 미국의 유대인은 삼위일체 중 한 요소가 되어 있다. 유대 민족 전체의 안전과 장래가 이 3자의 손에 맡겨져 있다. 애초에 이산 유대인이 있었다. 이스라엘에 귀환한 유대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미국에는 가진 자로서의 유대인이 존재한다.



러시아의 유대인과 스탈린의 안티세미티즘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러시아의 유대인 사회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국의 유대인은 나라 만들기와 나라를 세우는 일을 거들었다. 러시아의 유대인은 나라의 소유물이다. 소련의 유대인은 중세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자산으로 취급되고 있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안티세미티즘은 이에 물든 사람들과 사회 그 자체를 부패시킨다는 사실이다. 욕심사나운 왕도 그리고 도미니코 수도회도 모두 부패했다. 나치는 썩어 문드러진 꼴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처럼 부패의 자취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나라는 없다. 러시아 황제의 반유대법에 의해 소규모 오직(汚職)이 모든 방면으로 퍼져 나간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긴 눈으로 볼 때 좀더 중대한 것은, 국가 권력의 정신적 부패였다. 유대인을 계속 박해해 나가는 동안에, 제정 러시아 자신이 폐쇄적이고 위압적이며 고도로 관료적인 관리 체제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체제 아래서, 유대인은 국내의 이동, 거주, 학교와 대학으로의 진학, 학습 내용, 전문직과 연구직의 선택, 노동 계약, 비즈니스의 개업, 회사 설립, 신교, 조직의 가입, 기타 한도 없을 정도로 모든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는 데 대해 규제를 받았다.


이 제도는 남들의 업신여김을 받고 권리라는 것을 거의 갖지 못한 소수 민족이었던 유대인의 생활을 그 구석구석까지 괴물처럼 철저하게 관리해서, 그들의 가정과 가족 속으로까지 인정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렇게 해서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관리 체제는 러시아 관료 기구의 한 모델이 되었다. 뒷날, 레닌이, 이어서 스탈린이 러시아 황제를 대신하게 되자, 모든 인민을 관리하는 기구로 확대되어 하나의 완결된 제도가 되고 말았다. 인민 모두가 고통을 받고 인권을 빼앗긴 이 제도 아래서, 유대인은 한층 더 심한 억압을 받아, 구정물 웅덩이라고나 할 하층 계급을 형성했다. 나라에 의한 지독한 억압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었다.


1920년대의 권력 투쟁과 1930년대의 숙청 때 스탈린이 안티세미티즘을 이용한 방식은, 그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전시 중 그가 ‘유대인에 의한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결성시켜, 이디시어로 된 잡지 <아이니카이트>(단결)를 발간한 것은 전술적 움직임이었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이 어떤 유대인과 개인적인 유대를 가지고 있었던가를 글로 쓰고 있다. 이에 따르면, 스탈린의 자택에는, 소련 외무성의 관료 솔로몬 로조우스키 등 몇 명의 유대인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당시 17 세였던 스베틀라나가 어떤 유대인 각본 작가와 사랑에 빠지자, 그 사나이를 유배지로 보내 버리고 만다. 나중에 그녀는 그레고리 모로조프라는 유대인과 결혼을 하지만, 스탈린은 모로조프가 병역을 피하고 있었다고 비난했다. ‘국민이 전쟁터에 나가서 마구 쓰러지고 있는 마당에, 저 녀석을 보라구. 전쟁터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느긋하게 지내고 있지 않나’. 스탈린의 장남 야코브도 유대인 여성을 아내로 맞았는데, 야코브가 포로로 잡히자, 스탈린은 그녀가 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유대인을 좋아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전쟁 후처럼 악랄하게 나타내지는 않았다’고 스베틀라나는 써 놓았다.


실제로, 전쟁 중을 포함해서, 소련에서 안티세미티즘이 중단된 일은 한 번도 없다. 특히 붉은 군대 안의 안티세미티즘이 지독했다. 소비에트 육군의 전 대위 하나는 ‘소련방에서의 안티세미티즘은 도처에 만연해 있었다. 저 저주받은 나라에 살아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전쟁 종결이 다가올 무렵, 외무부를 비롯한 몇몇 부처에서는 유대인이 거의 배제되었고, 연수생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8년 1월의 미호엘스(Solomon Mikohels 1890~1948 : 스탈린상까지 탄 인민배우, 무대 감독) 살해되더니 이를 효시로 그 해의 9월에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개시된다. 나치 친위대가 유대를 헐뜯을 때에 유대인 특별 부대를 사용한 것처럼, 스탈린은 종종 비유대적 유대인을 자신의 안티세미티즘의 앞잡이로 사용하곤 했다. 그 중의 하나, 일리야 에렌부르그가 <프라우다> 지상에 이스라엘은 미국 자본주의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는 논설을 발표한 것이 공격의 신호였다.


유대인 안티파시스트 위원회는 해산되고, 잡지 <아이니카이트>가 폐간으로 몰리고, 이디시어 학교의 문이 닫혔다. 그리고서 나치의 악마학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평초의 국제주의자’ 따위의 용어를 구사해 가며 매도하면서, 유대인, 그 중에서도 특히 작가, 화가, 음악가,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지성인에 대한 조직적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디시어 작가 페레츠 마르키시, 이치크 페퍼, 다비드 베르겔손 등을 포함하는 몇천 명의 유대인 지성인이, 로조우스키 등 어쩌다 재수없게 스탈린의 눈에 뜨인 유대인 등과 마찬가지로 살해되었다. 이 반유대 캠페인은 체코슬로바키아에까지 미친다. 1952년 11월 20일에는 체코 공산당 서기장 루돌프슬란스키와 기타 체코 공산당 지도자 13 명―이 가운데 11 명이 유대인―이 트로츠키 성향의 티토주의자 시오니스트의 의혹이 있는 자라며 기소되어, 유죄로 처형되었다. 1948년에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 일이(사실은 스탈린 자신의 명령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음모의 결정적 증거의 일부였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8 유대인의 역사(120) 김유동 2010.06.17 1971
127 유대인의 역사(119의 3) 김유동 2010.05.22 4191
126 유대인의 역사(119의 2) 김유동 2010.05.22 2468
125 유대인의 역사(119) 김유동 2010.05.22 10598
124 유대인의 역사(118) 김유동 2010.05.16 1497
123 유대인의 역사(117) 김유동 2010.05.09 1665
» 유대인의 역사(116) 김유동 2010.05.01 1447
121 유대인의 역사(115) 김유동 2010.04.27 1574
120 유대인의 역사(114) 김유동 2010.04.27 1517
119 유대인의 역사(113) 김유동 2010.04.11 1528
118 유대인의 역사(112) 김유동 2010.04.04 1713
117 유대인의 역사(111) 김유동 2010.03.28 1800
116 유대인의 역사(110) 김유동 2010.03.21 1551
115 유대인의 역사(109) 김유동 2010.03.14 1643
114 유대인의 역사(108) 김유동 2010.03.08 1607
113 유대인의 역사(107) 김유동 2010.02.28 1722
112 유대인의 역사(106) 김유동 2010.02.15 2578
111 유대인의 역사(105) 김유동 2010.02.07 1791
110 [re] 유대인의 역사(105) 주암동 2010.02.14 1852
109 유대인의 역사(104) 김유동 2010.01.31 2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