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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17)

2010.05.09 08:47

김유동 조회 수:1666


1953년 초, 사태는 최고조를 맞게 된다. 유대인 6 명을 포함한 스탈린의 의사 9 명이, 영국, 미국과 시오니스트의 앞잡이와 공모해서 스탈린 독살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이 의사단의 악행을 폭로하는 공개 재판을 계기로, 스탈린류의 ‘최종 해결’의 일부로서, 시베리아의 유대인 대량 유형이 시작될 참이었다.


공교롭게도, 의사단이 법정에 서야 할 미묘한 시기에 스탈린이 죽고 말았다. 이 바람에 스탈린의 후계자는 소송을 중지했다. 유대인의 대량 유형은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저 유명한 비밀 회의에서 스탈린 탄핵 연설을 하는 가운데, 스탈린의 안티세미티즘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비판도 없었던 일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우크라이나의 당 제1 서기로서, 흐루시초프는 그 지방의 풍토병 같은 안티세미티즘을 계승하고 있었으므로, 전쟁이 끝난 직후 우크라이나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던 집을 되찾으려던 일을 가로막았다. 그는 ‘우크라이나인이, 소비에트로의 복권과 유대인의 귀환을 관련 지어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익에 반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실제로, 흐루시초프에 의한 통치 아래, 전쟁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우크라이나인에 의한 포그롬이 일어나곤 했다. 흐루시초프는 일단 최고 권력을 거머쥐고 나자, 반유대 프로파간다의 화살을 ‘스파이 행위’로부터 ‘경제적 범죄’로 변경했다. 많은 유대인이 그들의 이름이 떠들썩하게 들먹거려지는 가운데, 9 회에 걸친 인민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많은 시나고그가 폐쇄되었고, 그의 통치 하에서 그 수가 450 개에서 60 개로 줄어들었다. 흐루시초프는 또, 공산주의자판 로젠베르크(나치스의 이론가)라고나 할 트로핌 키추코의 손으로 된 악명 높은 반유대 논문, <발가벗긴 유대교>의 출판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과학 아카데미에 허가해 주고 있다. 흐루시초프 시대에 일어난 ‘피의 중상’, 반유대 폭동, 그리고 시나고그 불태우기 등에 대한 증언이 수두룩하다.


흐루시초프가 1964년에 실각하자, 소비에트의 유대인 사회에 짧은 안식의 시대가 온다. 그러나, 1967년의 6 일 전쟁 후, 반유대 캠페인은 공개적이면서도 더욱 그악스러워졌다. 소비에트의 안티세미티즘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전통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중세사회와 14세기 끝 무렵까지 스페인 사람들이 하던 것처럼 소비에트의 지배자들은 충분한 수의 비유대인들이 유대인을 대신할 만한 기량을 익힐 때까지, 유대인을 경제 분야에서 활용했다. 혁명 정권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유대인 볼셰비키는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거의 전원이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 후로도 유대인 고급 관료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으나, 정치 분야에서 최고위를 차지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궁정에서 왕을 섬긴 유대인들처럼, 그들에게 통치자를 돕는 일만을 시켰지, 스스로 통치하는 일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분명, 1970년대에 들어서서도, 당 대회 대의원이 되는 유대인이 가끔씩 나타나기는 했다. 1971년에는 4 명, 1976년에는 5 명이 나왔다. 그리고 당 중앙 위원회의 자리에 오르는 자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격렬한 반시오니즘을 표방해야 했다.


1966년에는 학자의 7.8 퍼센트, 의사의 14.7 퍼센트, 작가와 저널리스트의 8.5 퍼센트, 재판관과 변호사의 10.4 퍼센트, 그리고 배우, 음악가, 예술가의 7.7 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이 비율을 당과 관료들이 기를 쓰고 끌어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47년에는 소련 과학자의 18 퍼센트가 유대인이었지만, 1970년에는 겨우 7 퍼센트로 줄어든다. 러시아 황제 치하와 마찬가지로, 이 쥐어짜기는 대학에서 특히 심했다. 유대인 학생의 절대수는 1968~1969년의 11만1900 명에서 1975~1976년의 6만6900 명으로 감소했다. 인구비로 볼 때 이 감소는 너무나 두드러진 것이다. 1977~1978년에는 모스크바 대학 입학이 허용된 유대인은 한 명도 없었다.


소련의 반유대 정책에는 제정 러시아 혹은 1930년의 나치 정책을 방불할 정도의 혼란과 모순이 있었다. 유대인을 사역하고 이용하고 싶다, 가두어 두고 싶다, 그리고 또 추방하고 싶다는 상반된 욕망이 존재했다. 어느 경우에나 공통된 것은 경멸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이렇게 해서 브레즈네프는 1971년에 유대인 해외 이주를 인정하고, 다시 그 후의 10 년 동안에 25만 명의 유대인이 소련에서 나가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국외 이주가 늘어남에 따라 유대인을 피고로 하는 재판이 늘어나는 바람에 실제 출국 비자 얻는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번잡스러우며, 들들 볶는 꼴이 되고 말았다. 비자 신청자는 자신의 직장에서 인물 평가서를 받아 올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신청을 하면, 일종의 공개 재판 같은 일이 일어나 종종 공개적으로 토의의 대상이 되며, 비난을 받고 해고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비자 신청자인 유대인 대부분은 직장도 잃고, 빈털털이였으므로, 비자가 나오기 훨씬 전에 ‘사회의 기생충’으로서 투옥되어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출국 절차는 1980년대에 좀더 골머리아프게 변질되어. 미로와도 같은 복잡성을 지닌 제정 러시아 시대의 법률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비자의 발급 수가 줄어들고, 출국 허가를 얻기까지 5 년에서 길게는 10 년을 기다리는 가족이 아주 흔했다. 이 수속을 요약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된다. 신청자는 먼저, 공증인의 인증을 얻은 비조프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에 사는 가까운 친척의 초대장과, 이스라엘 정부의 입국 비자 발급 보증서를 얻어 놓아야 한다. 비조프를 얻고 나면, 비로소 이주 사무소로 갈 수 있고, 이 사무소에서 가족 중 성인들에게 2 통씩의 질문서가 주어진다. 신청자는 이 질문장에 답을 기입한 다음 이력서 1 통, 6 장의 사진, 대학 등의 졸업 증명서, 가족 각자의 출생 증명서, 결혼하고 있는 경우에는 결혼 증명서, 양친, 아내, 혹은 남편이 사망했다면, 이에 관한 사망증명서, 정당한 거주지 보유 증명서, 소련에 남는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그 사람으로부터의 인증 문서, 직장으로부터의 증명서, 만약 취업하지 않고 있는 경우라면, 거주지 주택 공급국으로부터의 증명서, 그리고 40 루블(약 60 달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두가 제출된 다음 비자 발급의 가부 결정에 몇 달이 소요된다. 승인되더라도 당장에 발급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해고되지 않았다면, 신청자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리고 살고 있는 아파트의 수리비 견적서를 관청에서 받아 그 액수를 지불하고, 소련 시민권을 포기하는 벌로서 가족 1인당 500 루블(750 달러)을 지불하고, 가지고 있는 여권, 군 등록 카드, 고용 기록서, 아파트 명도 증명서를 내고, 다시 출국 비자 자체를 위해 200 루블(300 달러)을 지불해야 한다. 비자 발급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에는 6 개월 후에 재신청을 할 수 있다.


소련의 반유대 캠페인은 1967년 이후, 체제의 일부로서 고정화해서, 코드명 반시오니즘으로 전개되었다. 이 낱말은 온갖 종류의 안티세미티즘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동구 유대 좌익 진영의 내부 분열이 낳아 놓은 소련의 반시오니즘 운동은 레닌의 반제국주의와 접목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뒷걸음질을 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그랬던 것처럼,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이라는 것도 반유대의 음모 이론에 뿌리박고 있음을 살펴보기로 하자.



남아프리카의 경제 발전과 반유대 ‘제국주의 이론’


제국주의 이론은 1860년대 이후 남아프리카가 발전하는 가운데 태어났다. 남아프리카의 발전은 대규모 자본 투자에 의해 원시적 경제가 근대적 경제로 변모한 두드러진 예였다. 남아프리카는 1860년대 킴벌리의 다이아몬드 광산 발견과 그 20 년 후의 란드(요하네스버그 부근의 Witwatersrand가 원이름인데, 흔히 the Rand로 통한다) 금광 발견에 의해 내륙의 매장 광물 자원이 개발되기까지는, 침체된 후진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내수와 금속에 의한 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남아 발전의 독자성은 채굴권으로 집약되고 고도한 기술을 요하는 깊은 갱에서도 채굴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을 모아, 이에 투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광산 금융 회사라는 새 제도를 채용한 데에 있다. 제도 자체는 영국인 세실 로즈(Cecil Rodes 1853~1902년 : 1890년 Cape Colony 수상)가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그 이전부터 줄곧 보석, 특히 다이아몬드와 금괴의 거래에 관여해 왔기 때문에, 남아의 깊은 갱도 채굴과 이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는 금융 제도 양쪽에서 큰 역할을 해 왔다. 알프레드 베이트, 바니 버나토, 루이스 코엔, 라이오넬 필립스, 율리우스 베르너, 솔리 조엘, 아돌프 게르츠, 조지 알부, 에이브 베일리 같은 사람들이 남아에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풍요한 광업 경제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어네스트 오펜하이머(Sir Ernest Oppenheimer 1880~1957년 : 독일 태생 남아공 기업가. 죽을 때는 세계 다이아몬드의 95 퍼센트를 공급하는 회사를 경영)로 대표되는 공업 자본가의 제2 세대가 이 위업을 단단하게 뒷받침하면서 한층 확대해 놓았다.


유대인이 란드 광산에 대한 투자에서 단기간에 얻은(때로는 잃은) 부는 엄청난 질투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비판자의 한 사람으로 좌익 논객 J. A. 홉슨이 있었다. 그는 1899년에 일어난 보어 전쟁 취재를 위해 <맨체스터 가디언>지의 특파원으로 남아에 부임했다. 홉슨은 유대인은 ‘사회 도덕이 거의 완전히 결핍된 자들’이라고 보았다. 유대인은 ‘민족적 전통이라는 우수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사는 사회가 지닌 취약함과 어리석음과 악덕의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남아의 도처에서 유대인이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고 쇼크를 받고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공표된 숫자에 의하면 요하네스버그에는 유대인이 7000 명밖에 살지 않는다. 그러나, 상점, 사무소, 시장, 술집, 세련된 교외 주택의 현관 등 거리의 광경은 여기에 선택된 자들(유대인)이 많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고 썼다. 특히 불쾌하게 여기게 된 것은 요하네스버그의 증권거래소가 속죄일이면 쉰다는 것을 알았을 때다. 1900년에 홉슨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전쟁, 그 원인과 결과>를 출판했다. 보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주로 독일 출신의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국제 자본가 그룹이다. ‘광산 소유자나 투기가 등 소수의 국제적 실력자에게 프레토리아(남아공의 행정 수도)에서 권력을 쥐게 하기 위해서’ 영국의 군대는 싸우고, 죽어 갔다. ‘함부르크도, 빈도, 프랑크푸르트도 아니고, 요하네스버그야말로 새로운 예루살렘이다’ 하고 그는 혐오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보어 전쟁의 원인에 대한 홉슨의 설명은 틀렸다. 예측된 바와 같이 전쟁은 광산 소유자로서는 참담한 것이었다. 유대인에 관해서 언급해 본다면, 근대사를 통해 증명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 성향으로 보나, 이해 관계로 보나, 그리고 특히 금융업자의 입장에서 보나 평화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모략 이론가와 마찬가지로, 홉슨은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훌륭한’ 생각에 관심이 더 많았다. 2 년 후 그는 <제국주의 연구>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식민지와 전쟁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주로 국제 자본가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론의 핵심이라 할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생충’이라는 챕터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대목이 들어 있다.



‘은행, 증권, 어음 할인, 금융, 기업 육성 등 대형 비즈니스가 국제 자본주의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단단하기 짝이 없는 조직적 유대로 묶여서, 언제나 밀접하고도 신속하게 서로 연락될 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의 상업 중심지에 터전을 잡고 있다. 유럽에 관해서 이야기해 본다면, 과거 몇 세기를 지나 오는 동안 금융에 관한 경험을 축적해 온, 단일하고 특이한 민족에 의해 컨트롤되어 오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 국제 금융 자본은 국가의 정책을 좌우할 수 있는 특이한 지위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들의 동의 없이는, 그리고 그들의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는 대규모 자본 이동이 불가능하다. 만일 로스차일드가와 그 측근이 단호히 외면한다면, 유럽의 어떤 나라가 감히 큰 전쟁을 일으키거나 대량의 국채를 공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사실을 의심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레닌은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이 주제에 대해 그 자신의 이론을 쓸 생각이었는데, 참고할 문헌이 적은 것을 놓고 한탄했다. ‘그러나 나는 제국주의에 관한 영국의 주요한 문헌 즉 J. A. 홉슨의 저서를 샅샅이 이용했다. 내 생각에는 이 책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써 놓았다. 실제로 홉슨의 이론이 레닌의 이론의 알맹이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제국주의—자본주의의 궁극적 단계>(1916년)이며, 이 저작은 191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제국주의에 관한 기초적 교의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제3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독립을 획득함에 따라, 레닌의 이론은 이들 나라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에 대한 태도를 형성했다.



안티세미티즘


이 이론이 안티세미티즘에 기원을 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시오니즘이 식민지주의의 한 형식이요 시오니스트 국가는 제국주의의 전초 기지라는 시각을 이해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스탈린이 이스라엘의 탄생을 도와 준 중요한 인물 중 하나라는, 도무지 체면이 말이 아닌, 역사적 사실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다. 이 사실 자체 때문에 시오니즘에 대한 소련의 이론은 완전히 파탄이 나고 만다. 그러나 소련의 역사에서 이 밖의 많은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은 정부의 홍보 담당자가 모조리 은닉하고 지워 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안티세미티즘의 역사를 살펴보면, 거북살스러운 사실을 계속 깔아뭉개 온 사실로 넘쳐난다. ‘시오니즘’이라는 말이 실은 ‘유대인’을 뜻한다는 것은 그 후 금방 밝혀졌다. 1952년의 슬란스키(Rudolf Slánský : 1901~1952년 : 체코 공산당 서기장. 유대인으로서 트로츠키주의 티토주의자 시오니스트이며, 미 제국주의의 주구로 몰려 사형) 재판에서, 유대인이 세계적 규모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전통적 안티세미티즘에 근거한 비난이 공산당 정부에 의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뿐 아니라, 아메리카 유대 공동 공급 위원회와 이스라엘 정부가 현대판 ‘시온의 장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으로서는 불길한 이정표가 아닐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실은 좀더 지독했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나서 1968년 ‘프라하의 봄’ 때 석방된 유대인 외무부 차관 아르투르 런던은, 그를 조사한 주임 검찰관 스모레 소령이 얼마나 반유대 감정으로 흥분해 있었던가를 석방 후 폭로하고 있다. ‘그는 나의 목을 틀어잡고,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는 너희들 더러운 민족을 싹 쓸어 버릴 거다. 히틀러가 한 일 모두가 올바른 것은 아니지. 하지만, 유대인을 이 세상에서 지워 없애 버리려 한 것은 훌륭했어.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많은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벗어나 버렸지만 말이야. 히틀러가 다 못한 일을 우리가 완수해 보일 거다.”’


소련의 반시오니스트 선전은 착실하게 강경해지면서 대상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그리고 1950년대 초부터 시오니즘과 유대인 일반, 그리고 유대교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다루기 시작한다. 1959년 12월 9일 코로보그라드에서의 우크라이나어 라디오 방송은 ‘유대교의 설교는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는 시오니스트의 설교다’라고 했다. 쿠이비셰프에서 발행된 신문 <볼슈스카야 코무나>는 1961년 9월 30일자로 ‘유대인의 종교는 시오니스트의 정치적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썼다. ‘시오니즘과 유대교는 불가분이다. ……양쪽 모두 유대 민족의 선민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1963년에 논한 것은 <코무니스트 몰다비아>지였다.


소련의 한 지역에서 몇백이나 되는 잡지와 신문의 기사가 지난날의 <시온 장로 의정서>와 같은 이론을 펴고, 시오니스트(즉 유대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세계 규모의 음모를 꾸미는 자로 묘사했다. 1967년 8월 5일 <소비예츠카야 라트비아>는 ‘그것은 공통의 본부, 공통의 계획, 공통의 자금을 가진 국제적인 코자 노스트라(Cosa Nostra : 미국 마피아의 비밀 조직)이다’, ‘이스라엘 지배 계급도, 그들의 세계 계획상 단순한 조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1967년에 일어난 6 일 전쟁 후의 20 년간, 소비에트 선전 기관은 온 세계에서 안티세미티즘 자료의 주공급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그리스 로마의 고대부터 근대의 히틀러주의에 이르기까지, 반유대 역사의 모든 시기에 대해 문헌과 자료를 모았다. 같은 소리를 집요하게 되풀이하는 논설과 방송을 비롯해서 많은 서적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함은 나치가 내놓은 분량 못지않을 정도였다. 트로핌 키추코의 저서 <유대교와 시오니즘>(1968년)은 신에게 선택된 자라는 유대 민족의 맹목적인 애국주의, 메시아 신앙의 프로파간다, 온 세계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사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베군의 <다가오고 있는 반혁명>(1974년)은 성서를 ‘잔인, 위선, 반역, 배신, 그리고 도덕적 퇴폐에 관한 걸출한 교과서’라고 했다. 시오니스트의 생각이 ‘거룩한 토라와 탈무드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깡패 집단이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1972년, 파리의 소비에트 대사관이 발행한 한 잡지는 ‘검은 100인조’가 1906년에 발행한 제정 러시아 정부의 안티세미티즘의 팸플릿을 부분적으로 다시 실었다. 이 ‘검은 100인조’는 전에(1914년 이전) 포그롬을 조직한 바로 그 단체다. 이 때만큼은 프랑스 법정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프랑스 공산당의 유력 간부였던 발행인이 다른 인종에 대한 폭력 행위를 충동했다고 해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고관들 사이에서 회람된 소비에트 정부의 반유대적 자료 가운데에는 믿을 수조차 없는 것들이 있었다. 1977년 1월 10일자 당 중앙 위원회의 각서에서 반유대 전문가 발레리 에멜리아노프는, 미국은 카터 대통령이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브네이 브리트(B'nai B'rith : 1843년 뉴욕에 설립된 유대인 우애 공제조합. 교육,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한 조직) 게슈타포라는 것의 지배하에 있는 시오니스트와 프리메이슨의 음모에 조종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에멜리아노프에 의하면, 시오니스트들은 각 구성원이 활동적인 시오니스트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프리메이슨의 조직을 통해 비유대 사회에 침투해 있는데, 시오니즘 그 자체가 유대와 프리메이슨의 피라미드 조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의 새로운 공상적 안티세미티즘의 체계는 1970년대에 들어, 그 핵심이 될 이론을 구성해 내었다. 시오니스트가 나치의 인종 차별 계승자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자체가, 시오니스트의 계획에 이용될 수 없는 가난한 유대인을 배제하기 위해 유대인과 나치가 공모해서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이 설에 의하면 히틀러 자신이 홀로코스트의 아이디어를 헤르츨에게서 얻은 것이 된다. 국제 금융 자본을 지배하는 유대인 억만장자가 내린 명령으로, 유대 시오니스트의 지도자층은 친위대와 게슈타포를 돕고, 불필요한 유대인을 가스실 혹은 가나안 땅의 키부츠에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의 선전 기관은 이 유대-나치 음모설을 특히 1982년의 레바논 작전 전후 이스라엘 정부의 잔학 행위를 비난할 때, 그 배경 성명으로서 이용했다. 1984년 1월 17일자 <프라우다>는 ‘시오니스트들은 기꺼이 히틀러와 행동을 함께 하면서, 불필요하게 된 동포를 절멸시켰다. 그런 형편인 만큼, 그들이 레바논의 아랍인들을 오늘날 학살한다고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런 소비에트 정부의 악의에 찬 반유대 정책 프로파간다에는 유대인에 관해 제정 시대에 되풀이해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날조된 이야기가 숱하게 들어 있었는데, 이런 전통으로의 회귀가 모두는 아니다. 양자간에는 변형된 것도 많았다. 차르의 제정 시대, 정부는 언제나 집단 이주로 유대인이 러시아를 떠나는 일을 허용하고 있었다. 또 하나, 소비에트 체제는 이데올로기라는 기치 아래 한 민족 모두를 멸절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히틀러 버금가는 존재였다. 유대인이란 소비에트의 교의상 죽어 마땅한 시오니즘과 동일하다고 함으로써, 소비에트 지도부는 175만 명의 유대인 박해를 어렵지 않게 정당화했다. 1952년부터 1953년에 걸쳐 스탈린이 기도했던 시베리아로의 유대인 대량 유형 계획을 부활시키기도 하고, 혹은 그 이상의 혹독한 정책을 채용하는 데에는 이데올로기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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