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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118)

2010.05.16 18:47

김유동 조회 수:1497

 

아랍의 반유대 선전


한 가지 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소비에트의 반유대 선전 내용과 아랍 세계의 러시아 동맹 제국이 내놓는 이런 류의 선전 내용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비록 양자 사이의 표현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에서는 별차이가 없다. 아랍 나라들 쪽에서는 이데올로기상의 전문 용어를 엄밀히 가려서 사용하는 일이 적었으므로, 러시아인이 ‘시오니스트’라는 상투 문구를 사용할 때, 아랍인은 으레 ‘유대인’이라는 말을 때때로 공공연히 사용했다. 러시아인이 몰래 <시온 장로 의정서>에서 인용하는 데 비해, 아랍인은 출전을 감추는 일 없이 당당히 출판했다. 실제로 이 소책자는 1920년 초부터 줄곧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판수를 거듭하며, 아랍 세계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 같은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아랍 지도자들도 모두 이 책을 읽고 있다. 나세르 대통령은 아무래도 그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1957년에 회견한 인도의 저널리스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니, 꼭 읽어 보시오. 사본 하나를 드리겠소. 서로 잘 알고 있는 300 명의 시오니스트가 유럽 대륙의 운명을 지배하고, 후계자를 그들의 측근에서 뽑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증명하고 있단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나세르가 이 책에 매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지, 1967년경에는 그의 형제가 새로이 아라비아어로 된 신판을 출판했다. 그리고 그 발췌와 요약이 아랍의 학교 교과서와 군대의 훈련 자료로 사용되었다. 1972년에는 다시 하나의 신판에 세상에 나왔는데, 베이루트에서 베스트 셀러 리스트의 톱을 장식했다. 덧붙이자면, 이 판들은 모두 아랍인 독자를 위해 개정되었고, 시온의 장로들을 팔레스티나 문제의 문맥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 후 아랍 사회에서 살아남은 반유대 대표작은 <시온 장로 의정서>만이 아니다. 예를 들면 1890년에 카이로에서 출판된, <자유를 구하는 정결한 아이의 절규>라는 제목의 ‘피의 중상’에 관한 책은, 1962년에 들어서자 <탈무드의 인신 희생물>이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아랍 연방 정부의 공식 간행물로 다시 발행되었다. 실제로 ‘피의 중상’은 이것뿐이 아니라 아랍의 신문에 그 후에도 종종 실리곤 했다.


그런 가운데, <시온 장로 의정서>의 인기가 계속해서 높았는데 이는 아랍 이슬람 나라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1967년에는 파키스탄에서 출판되었고, 이란 정부와 그 대사관 공관에서도 대대적으로 이용했다. 안티세미티즘적 음모 이론의 열렬한 신봉자인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1979년 권력을 쥔 것이 그런 일의 계기가 되었다. 1984년 5월, 그 때까지는 이미 <시온 장로 의정서>의 발췌를 게재하고 있던 그들의 잡지 <이맘(이슬람 지도자에 대한 호칭)>에서 호메이니는 영국 기동 부대가 포클랜드 섬에서 시온 장로들의 조언을 받아 잔학 행위를 했다고 비난했다. 호메이니의 선전은 종종 시오니즘(즉 유대인)을 악마의 짓이 표면화한 것이라고 했다. 여러 세기에 걸쳐 도처에서 인간 사회와 인간의 가치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호메이니는, 유대인이란 것은 인간이 아닌 존재, 아니 오히려 반인간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멸절시켜도 상관없는 생물이라는 중세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안티세미티즘은 다분히 혼란된 것이기도 했다. 단순한 반유대교의 입장, 이슬람교의 교파주의(순니파가 지배하는 적국 이라크는 시오니스트의 꼭두각시이며, 동시에 그것 자체가 악마라는 생각), 그리고 ‘대악마’인 미국에 대한 증오—이들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악마가 유대인을 통해 워싱턴을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워싱턴을 통해 유대인을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랍의 안티세미티즘에도 종교적 요소와 세속적 요소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와 나치가 저지른 역할에 대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예루살렘의 이슬람법 최고 권위(Grand Mufti)는 히틀러의 ‘최종 해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이를 환영했다. 히틀러는 그에게 독일군이 중동에 도달하는 날에는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입식지를 일소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전쟁 후 많은 아랍인들은 줄곧 히틀러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1961년부터 1962년에 걸쳐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요르단의 영자 신문 <제루살렘 타임스>는 ‘인류에게 참다운 은혜를 가져다주었다’면서 아이히만을 축복하는 편지를 실었다. 이 재판은 ‘어느 날엔가는 반드시 살아 남은 600만 명의 유대인 말살로 이어져서, 당신이 흘리는 피가 보상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아랍의 반유대 선전 담당자들은 ‘유대인과 나치가 짝짜꿍이었으며, 시오니스트는 나치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소비에트의 공식 견해에도 종종 동조하곤 했다. 특히 서방측에 대해 선전할 때면, 아랍의 여러 정부는 이스라엘 공군을 나치 시대의 독일 공군으로, 이스라엘 국방군을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로 빗대곤 했다. 홀로코스트는 다행스럽게도 유대인과 나치가 공동으로 기획한 악마적 계획이었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건만 시오니스트들이 그렇게 공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 아랍 나라 사람들은 갖가지 설명을 바꾸어 보기도 하고, 이를 동시에 내놓기도 했다. 안티세미티즘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는 데 대해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일까.




유엔, 테러리즘과 이스라엘의 반응


소비에트 블록과 아랍 제국의 양쪽에서 온 세계로 향해 발신되는 반시오니스트 문서는, 1967년의 6 일 전쟁과 때를 맞추어 한껏 극성을 부렸다. 이 전쟁이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소련을 강하게 자극해서 선전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973년의 속죄일 전쟁에 이어 석유 위기가 닥치자, 이런 문서가 더욱 더 늘어났다. 반시오니스트 선전으로 쓰이는 아랍의 자금 사정은 원유 값의 폭등으로 매우 윤택해졌다. 그 결과, 집요하고 대대적인 이스라엘 공격이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경향은 특히 유엔에서 두드러졌다.


양대 전쟁 사이의 시대, 그 당시의 국제 연맹이라는 존재는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유대인 박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75년에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안티세미티즘 정당화의 일보 직전까지 다가가게 되었다. 그 해 10월 1일, 총회는 아프리카 통일기구 의장 이디 아민 우간다 대통령을 공식으로 환영했다. 당시 아민은 우간다 국민의 대량 살육을 지휘했고, 개인적으로 손을 대기도 했다고 해서 악평이 무성한 처지였다. 그리고 난폭한 안티세미티즘 발언으로도 곧잘 알려져 있었다. 1972년 9월 12일에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홀로코스트를 찬양하는 전보를 보내고, 히틀러의 동상이 아직 독일에 세워져 있지 않으므로 우간다에 하나 세우기를 제안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유엔 총회는 아민을 환영해 주었다. 소비에트 동구권, 아랍 제국의 전 대표를 포함하는 다수의 유엔 대표들이 연설을 시작하려는 아민을 기립 박수로 맞이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세계를 향해 ‘시오니스트와 미국의 음모’를 탄핵하고 유엔에서 이스라엘을 추방하자는 것과 그 절멸을 요구했다. 이 그로테스크하고도 격한 공격 연설 도중, 가끔씩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연설을 마치고 그가 착석하자 다시 기립해서 박수가 보내졌다. 이튿날, 유엔 사무총장과 총회 의장은 아민을 주빈으로 하는 공식 만찬회를 열었다.


그로부터 약 2 주 후인 10월 17일, 소비에트와 아랍의 홍보 조직에 속하는 안티세미티즘 전문가들은 결정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유엔총회 제3 위원회가 찬성 70 표, 반대 29 표, 기권 27 표, 결석 16 표로 시오니즘을 인종 차별의 한 형태로서 규탄하는 동의안을 가결한 것이다. 총회도 11월 10일, 찬성 67 표, 반대 55 표, 기권 15 표로 이 위원회의 결의를 승인했다. 이스라엘의 유엔 대사 하임 헤르초그는 이 날이 나치가 유대인을 박해하던 ‘수정(水晶)의 밤’ 37 주년에 해당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미국의 대표 대니얼 P. 모이니언은 싸늘한 경멸을 곁들여서 ‘아메리카 합중국은 이 곳 유엔 총회의 자리에서, 세계를 향해 선언한다. 미 합중국은 이 파렴치한 결의를 인정하지 않고, 따르지 않고, 결코 묵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 : 1938년 11월 9~10일 독일 Ober Ramstadt의 200여 시나고그와 유대인 소유 건물들을 불태우면서, 91 명의 남녀노소를 살육했으며 2만5천~3만 명의 유대인을 잡아서 강제 수용소에 가두었다. 이것을 히틀러의 유대인 절멸 작전의 시작으로 본다. Kristall은 수정이 아니라, 불타는 가옥의 유리창이 터져 나오는 광경을 뜻하는 것이므로 흔히 Night of Broken Glass라고 번역한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큰 교훈 중 하나는, 말에 의한 중상이 나왔다 하면, 그 다음으로는 조만간에 폭력 행위가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몇 세기 동안 수많은 안티세미티즘 문서가 무서운 기세로 나왔다 하면, 으레 오래지 않아 유대인 살육으로 이어지곤 했다. 히틀러의 ‘최종 결정’은 그 잔학성이 역사적으로도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지만, 19세기의 안티세미티즘 이론 가운데 이를 예감시키는 것이 있었다. 전쟁 후 소비에트 진영과 아랍 제국에서 뿜어져 나온 안티세미티즘의 분류 역시 독특한 형태로 폭력을 빚어 내었다. 바로,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리즘이다. 이 수단이 시오니즘을 표적으로 해서 사용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고도로 조직화한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형태의 테러리즘을 발명한 것은 아브라함 슈테른과 메나헴 베긴 같은 전투적 시오니스트들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 테러리즘의 칼끝이 한결 향상된 규모로, 자신들이 생사를 걸고 이루어 놓은 나라에 겨누어진다. 이는 하느님의 벌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이상주의자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마련이라는 좋은 본보기로 보아야 할 것인가.


전쟁 후 소련과 아랍의 안티세미티즘으로 움터 나온 국제 테러의 시대는 사실상 1968년에 시작되었다. 이는 팔레스티나 해방기구(PLO)가 그 주요 정책으로서, 테러와 무차별 살인을 공식으로 채용한 해다. PLO와 그 경합 조직과 모방자들은 주로 이스라엘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했는데, 이럴 때면 이스라엘 시민, 시오니스트, 그 밖의 유대인을 구별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통적인 안티세미티즘의 살인자들이 신앙심이 돈독한 유대인과 기타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소비에트의 반유대 선전에서 영향을 받은 독일 파시스트의 좌익 조직 바더 마인호프 일당은 1976년 6월 27일 파리발 텔아비브행 에어 프랑스기를 납치해서 이디 아민의 나라 우간다에 강제 착륙시켰다. 이 때 테러리스트들은 유대인만 죽일 생각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주의 깊게 가려 내었다. 그들이 죽이려 한 유대인 중 한 명은 나치 친위대의 강제 수용소에 갇혔을 때 팔에 문신되어 있던 죄수 번호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PLO가 고안해서 구사한 테러리즘의 규모와 수법은 확실히 새로운 위협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테러의 본질 그 자체에 새로울 것은 없었다. 좌우간 그들은 과거 1500 년 이상에 걸쳐 공포 속에 살았으니까 말이다. 포그롬은 유대인에 대한 테러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것은 살해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공포심과 학대에 대해 인종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순종이 습성이 될 정도로 유대인을 몰아 가는 데에 있었다. 유대인이 거의 저항다운 저항을 보이지 않은 채 ‘최종 해결’에 따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테러리즘은 여전히 유대인을 표적으로 해서 일어나지만, 더 이상 그대로 간과되는 일은 없게 되었다. 하이재크당한 에어 프랑스기의 유대인 승객 살해 계획이 그 좋은 예다. 이스라엘군은 엔테베 공항을 습격해서, 아민에 의해 죽음을 당한 한 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구출했다. 시오니스트 국가는 그 국경에서 1000 마일 이상 떨어진 지점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유대인을 구출할 수 있는 능력을 온 세계에 보여 준 것이다.


이스라엘은 또, 테러리스트 기지에 대해 직접 행동할 수 있었고, 실제로 행동했다. 최대의 근거지는 1970년부터 1982년까지 PLO가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레바논 남부에 있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군은 작전을 개시해서 레바논에 있는 PLO의 기지를 파괴했고, 이 지역으로부터 PLO 세력을 몰아내었다. 그 결과 PLO는 그들을 받아들이는 일을 망설이는 튀니지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85년이 되자 그 튀니지에서조차도 PLO 본부가 이스라엘의 보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의한 자위권 행사는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했고, 때로는 그 수법이 시원치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가끔씩 이스라엘의 친구들까지도 비판의 소리를 내곤 했다. 1982년의 남 레바논 점령 때는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폭격 때문에 아랍측에 다수의 사망자와 난민을 만들어 놓는 바람에, 이스라엘과 그 우방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국내에서조차 심한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이 작전은 그 해 9월 16일에 사브라와 샤틸라의 난민 캠프에서 일어났고, 아랍계 우익 기독교 팔란지스트(Falangist : 원래는 1936~1939년의 스페인 내란 후 정권을 잡은 프랑코 장군하의 파시스트당. Falange-팔랑헤라고 읽는다)에 의한 이슬람교도 난민 살육 사건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아랍과 소비에트의 선전 기관에 의해  교묘히 이용되었고, 서방측 미디어에서도 이스라엘측에 책임이 있다고 소개되었다. 당시 아직 이스라엘 수상의 자리에 있던 베긴은 사건이 있은 지 3 일 후의 각의에서, ‘비유대인이 비유대인을 죽였는데, 유대인이 비난을 당하는군’ 하고 씁쓰름하게 말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현명하게 독자적으로 사법 조사를 하라고 명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한 후, 조사단은 살육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에게 응분의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대인이 죽이는 쪽에 서는 일은, 특히 그 살육이 부정한 것이었으면 더더욱, 유대인을 몹시 당혹하게 만들었다. 이 가능성은 1140년경에 쓰인 유다 할레비의 저작 <쿠자리>에 들어 있는 라비와 현명한 하자르의 왕 사이에서 교환한 회화라는 형식으로 이미 예상되고 있었다.




라비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광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한층 신에게          가까운 것입니다’


왕 ‘만약에 당신의 겸양이 자발적인 것이라면 그 말이 맞소. 하지만 그건 자발적인 말이          아니오. 만약에 그대가 힘을 가지게 된다면 당신은 사람을 죽일 것이오’


라비 ‘왕은 우리의 약점을 훤히 꿰뚫어 보시는군요. 오, 하자르의 임금이시여’




그러나 자기 방어를 위해 사람을 죽일 권리는 원래부터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권리를 지니고 있다. 국가는 그저 그 권리를 사람들을 대신해서 대규모로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줄곧 생명은 존엄한 것이라는 생각이 거의 몸에 배어 버린 유대인으로서는, 다른 나라 국민의 살육을 국가에 맡겨 버리는 일을 승복하기가 힘들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사울의 저주에 다름 아니다.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의 생애에 그늘을 던진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피로 물든 일 때문에 다윗은 신전을 건립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혹 사울의 저주가 있었다 하더라도, 아우슈비츠라는 현실을 앞에 놓고 보면 선택의 여지란 있을 수가 없다. 유대인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국가를 갖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대한 도덕적 책임 모두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세속적 시온의 역할


세속적인 시온 ‘이스라엘국’의 필요성은 그 최초의 역사 40 년 동안에 쇠잔하는 일 없이, 오히려 증가했다. 이스라엘은 유럽의 안티세미티즘으로 고통당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홀로코스트 종식 후, 모든 것을 잃고 만 유대인 생존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창설되었다. 그리고 아랍 세계에서 축출된 사람들도 받아들였다. 이들의 목적이 달성된 것만으로도 이스라엘이 존재할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새로운 과제가 부각되고 있다. 전후 수십 년 동안 소비에트 체제는 제정 러시아와 비해 볼 때 조금도 달라지는 일이 없었고, 유대 시민을 평화리에 소비에트 사회에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음이 분명해졌다. 러시아의 유대인은 전체로 놓고 볼 때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한층 위기적 상황에 처해 간다는 징후가 농후했다. 이런 상황 아래서, 175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에 있는 동포를 소비에트 체제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 이스라엘로서는 중대한 사명이 되었다. 지난날 제정 러시아의 잔혹성이 유발될 것에 대비해 이스라엘은 대량 이민을 한꺼번에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동시에, 만약 유대인에 대한 소비에트의 증오가 다른 형태를 취하는 일이 생긴다면, 전력을 다해서 이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스라엘에는 좀더 버거운 역할이 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 유대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이 도피할 수 있는 주권 국가였다. 그리고 이미 그 국경 안에 이주해 온 유대인도 지켜 주어야 했다. 홀로코스트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이 나라뿐이니까 말이다. 이제 소비에트와 아랍이라는 적이 끊임없이 벌이고 있는 흉물스러운 안티세미티즘의 선전을 통해 판단하건대, 기회만 있으면 따로따로, 아니면 공동으로 다시 한번 ‘최종 해결’을 밀어붙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가능성을 상정하고 이에 대항할 힘을 갖추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여차하면 미국에 의한 군사 개입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주권 국가인 이상 궁극적으로는 자기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지키지 않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침략자가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타격을 줄 수단을 필요로 한다.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투석기가 필요했듯이 말이다.


제2 차 대전 중 유대인 과학자는 최초의 핵무기 제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히틀러가 핵무기를 먼저 개발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해 소비에트와 아랍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이 증대했을 때,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은 억지력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걸쳐 핵전력 개발에 성공한다. 핵무기의 존재는 비밀에 붙여졌지만, 어떤 효과를 드러낼지는 억지를 필요로 하는 나라들에게 잘 이해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상황의 변화에서 태어난 2 개의 새로운 과제 중에서 두 번째에 대해 충분히 대응할 만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역사를 이런 암울한 기술로 끝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이 사람들의 역사는 영광과 파국의 되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인내심 가득한 학문상의 연찬과 성과를 이루어 내는 근면성과, 공동체 운영의 끝없는 계속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 대다수는 기록에 남아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슬픔은 목소리로 표현되지만, 행복은 말이 없다. 역사가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4000 년 이상의 오랜 시간을 유대인은 그저 살아남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운명의 장난으로 내동댕이쳐진 이교도 사회에 멋지게 적응하면서, 그 곳에서 얻어진 소소한 자원을 유효하게 활용하곤 했다.


유대인처럼 가난을 풍요로 바꾸어 놓고, 인간에게 어울리는 부를 일구어 놓았으며, 역경을 독창성을 발휘해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놓은 민족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다. 이 능력은 그들의 확고하면서도 섬세한 도덕 철학에서 움터 나오는 것이다. 이 철학은 수천 년 동안 놀라울 정도로 변화하지 않은 채로 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목적을 위해 긍정적으로 이바지해 왔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무수한 유대인이 어느 시대에나 유대교의 무거운 짐 때문에 신음 소리를 토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이를 계속 짊어져 온 것은, 마음 한 구석에서 오히려 유대교가 그들을 지탱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한 율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역사가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대교는 언제나 유대교도 모두를 합쳐 놓은 것보다도 위대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유대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유대교다. 유대인이 유대교를 만든 것이 아니다. 철학자 레온 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선 유대교가 있었다. 유대교는 성과가 아니라 계획이다. 유대인은 계획 성취의 수단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형이상의 관념의 기록이기도 하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어, 비유대인에게 본이 되라는 명을 받은 것으로 믿어 왔다. 그리고 힘이 닿는 한, 이 명령에 복종해 왔다. 종교적으로 생각해 보나 세속적으로 계량해 보나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다.


유대인은 세상에 윤리적인 일신교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이성을 신성에다 적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근대에 들어 보다 세속적인 시대로 접어들자, 그들은 합리성의 원칙을 종종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 적용시켜 보았다. 그 빛은 사물을 비추어 훤하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한편으로, 인간 정신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이를 고양시키게 만들었다.


진실을 말하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은 위대한 존재였다. 그들이 그처럼 미움을 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언자’ 하면 으레 두려운 존재로 여겼고, 때로는 명예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을 받은 일이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래도 예언자가 예언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듯, 유대인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진실을 말할 것이다. 설혹 그것이 어느 길로 나아가게 되건 말이다.


유대의 역사는 이렇게 가르친다. 인간의 존재에는 목적이 있고, 사람은 짐승들처럼 그저 이 세상에 생을 받았다가 죽어 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하느님의 창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유대인은 여호수아 첫머리의 장엄한 제1 장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되는 하느님의 명령을 들으며 평안을 얻는 것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느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1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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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유대인의 역사(106) 김유동 2010.02.15 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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