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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21세기 선교: 제2강 전도와 선교

2002.08.13 15:23

이계준 조회 수:812 추천:7

에수께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짝을 지어 선교여행을 시켰으며 또한 부활 후에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라고 제자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주셨다. 예수는 하느님이 세상에 보내신 선교사이고 교회는 예수께서 세상에 보내신 선교사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궁극적 이유는 선교에 있다. 신학자 E. 부르너는 "불이 타므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교회는 선교하므로 존재한다"고 역설하였다.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곧 전도와 선교이다. 이 두 낱말은 서로 다른 뜻을 말하기도 하고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더욱이 20세기에 있어서는 전도와 선교에 대한 신학적 견해의 차이로 오랜 동안 논쟁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먼저 전도와 선교란 말의 뜻과 그 뜻의 변화 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전도(evangelism)
전도란 말은 본래 희랍어 성경에 복음 곧 기쁜 소식(euaggelion, good news)을 전한다는 뜻이다. 특이 동일한 언어화 문화권에 속하는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을 믿게 하고 세례를 받으며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모든 행위를 전도라고 칭한다. 따라서 교회는 전도를 통하여 기독교인의 수가 증가하고 교회가 성장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지난 2000년간 교회는 전도란 수단을 통하여 그 명맥을 이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
다. 전도란 말은 초대교회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의 변화가 없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2. 선교(mission)
선교란 말은 원래 라틴어인 Missio에서 유래된 것으로 파견 또는 임무란 뜻이 있다. 선교란 말은 중세교회에서 사용되었으나 개신교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 해외 선교의 막이 올라가면서 부터이다. 서구 강대국들이 식민지 확장을 일삼을 때 서구교회들은 피식민지국가에 선교사의 파송과 재정 지원을 통해 전도, 교회건축, 교육 및 의료활동을 개시하였다. 즉 해외의 비기독교 민족들에게 기독교의 복음과 서구문화를 전달하는 행위를 선교라고 하였다. 특히 근대선교신학의 아버지이자 독일신학자인 F. 슐라이엘맛하는 기독교의 복음과 서구문화를 동일시한 나머지 선교를 서구문화를 비서구세계에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선교란 말의 뜻은 급변하는 사회와 함께 급속히 변하였다. 먼저 기독교 국가라고 자처하던 서구사회 속에 비기독교적 인구 및 영역이 증가하므로 선교란 말이 "국내 선교"와 "국외 선교"로 이원화되었다. 그리고 해외 선교 초기에 주로 복음 전파와 문화활동을 선교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 급격한 사회-역사의 변동과 이에 따른 인간-사회의 심각한 요청에 따라 과제가 자연히 달라지게 되었다. 즉 선교는 사회개혁, 민족해방운동, 인권운동, 반핵운동, 빈곤퇴치, 환경운동. 인간복제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갖고 직, 간접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선교란 교회나 기독교의 발전에 극한된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영역 곧 우주 전체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느님의 주권인 사랑, 정의, 평화를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신학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3. 전도와 선교의 갈등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줄기는 다양하지만 선교신학에 관한 한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보수주의 또는 복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주의 또는 급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 속하는 교회나 신학자들은 개인구원을 위한 전도와 교회성장을 교회의 최고목적으로 간주하고 선교는 주로 교회와 기독교를 비기독교 민족 내지는 지역에 전파하여 세계를 기독교화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고로 이런 보수 세력은 국내외적으로 가급적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고 재정을 지원하는데 열정을 쏟는다. 그것이 기독교 국가이건, 타종교가 지배적인 국가이건 상관없이 또한 합법적이건, 비합법적이건 상관없이 선교를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한다. 이것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므로 세계를 기독교 왕국으로 만들면 된다는 십자군적 신앙의 발로라고 하겠다.
이와 반면에 후자에 속한 교회와 신학자들은 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교회증가나 기독교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도록 사회와 역사 속에 참여하여 현실적인 문제 곧 가난, 인권유린, 억압, 인종 및 성 차별, 핵과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해결하여 이 땅을 평화의 세계로 바꾸는 것이다. 세계의 주권은 하느님의 것이고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자기의 거륵하신 뜻을 이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회-역사적 구원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미와 아푸리카, 미국의 흑인과 한국 등에서 많은 교회 지도자, 신학자, 그리스도인들이 반독재시위와 인권운동과 해방운동에 참여하였고 많은 고통과 회생을 당하였
다.

4. 전도와 선교의 통전적 이해
우리 인간의 복음의 이해나 실천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개인의 신앙이나 신학을 극단화한다면 아집과 독선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가급적 포괄적인 이해와 실천이 요청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개인 구원이나 사회-역사 구원 어느 하나에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개인과 역사 모두를 구원하는 통전적인 말씀이다. 하느님의 선교사인 예수께서는 복음의 주제를 "하느님 나라"로 삼고 구체적으로 실천하실때 전도와 선교를 구분하시고 우열을 가린적이 없다. 가령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 전도와 병 고치시고 배고픈자들을 먹이시고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선교를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분리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 상황과 요구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응답하신 것뿐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전도와 선교는 하느님 나라 선포외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제 전도와 선교의 논쟁과 갈등은 거륵을 가장한 인간의 신앙적-신학적 오만의 산물에 불과하다. 전도를 통해 개인의 구원과 교회의 성장은 계속 진행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망각하므로 역사를 악마의 손에 너겨주는 것을 허용해서는 아니된다. 나치하에서 독일교회와 군사독재하에서 한국교회처럼 말이다. 이와 반면에 개인의 구원과 교회를 무시하고 오로지 사회구원을 위해 투재하는 것만이 진정한 하느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극단화도 용납되어서는 않된다. 전도와 선교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수단이고 그것들은 상황과 요청에 따라 창조적이고 신축적으로 활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1973년 태국 방콕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선교 및 전도위원회가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이란 주제하에 개최되었다. 이 때 소위 보수파와 진보파 신학자들이 극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전자는 개인구원, 영혼의 구원, 사후의 구원을 주장한 반면에 후자는 사회구원, 육신의 구원, 현재의 구원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끝 없는 논쟁 후에 종합적인 성명서에 함께 동의하게 되었다. 즉 "구원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육적인 동시에 영적인 것이며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다"고 한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위임받은 하느님 나라 선포의 수단인 전도와 선교는 분리되고 독단화되어서는 아니된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지니고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하게 활용될 때 궁극의 목적인 하느님 나라는 더욱 가까이 닥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