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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21세기 선교: 제6강 서구교회의 선교

2002.09.13 23:31

이계준 조회 수:900 추천:12

1. 초대 교회의 선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향해 선교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교회는 그 명령을 실천하므로써 2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곧 선교의 역사가 된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선교하고 직계 제자가 아닌 사도 바울은 로마 세계에 3차 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였다. 특히 그의 선교의 방법은 대도시 주심적이었고 설립된 도시 교회에서 자방으로 확산되는 전략을 지녔다.

AD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황제의 기독교 박해는 그 강도의 차이에도 북구하고 계속되었다. 특히 60년 이후 로마의 참화를 기독교인들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씨우고 모든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소위 디아스포라(diaspora)가 시작되면서 기독교의 선교도 약화되는 듯 하였고 교회는 모두 카타쿰으로 들어가 지하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예일대학의 세계적 선교사학자 라투레트가 지적한 것과 같이 박해가 극심하고 이단 사상이 난무할 수록 선교적 열정은 더욱 가열되었고 기독교는 로마 세계로 계속 전파되었다.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소위 밀라노의 칙령( 勅令)을 발포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당시에 로마의 국교는 황제승배이었다. 그가 개종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왕후가 몸종에 의하여 먼저 개종했고 왕후의 영향으로 황제도 개종하여다는 것과 또한 화제승배가 퇴조 현상을 보였기 때문에 정치적 생명을 위해 기독교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에 로마 시민의 10% 정도가 이미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틴 대제는 325년에 니케야(Nicaea)종교회의를 소집하여 당시 정통과 이단의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니케야 신조(信條)를 채택하였다. 아다나시우스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라는 동질설(同質說)과 아리우스의 이질설(異質說)의 신학적 논쟁에서 전자의 승리한 것이다.

2. 중세교회의 선교
5세기에 이르러서 로마 세계 전체는 기독교화 되었고 이제 아시아와 아일랜드로 선교의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이렇듯 유대교 분파를 출발한 기독교가 5세기내에 지중해 연안의 그레코 로마 세계를 정유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로마제국이 1세기에 주변 국가들을 하나로 통일하였고 완벽한 도로망을 가추었으며 그리스어를 국어로 사용하였다는 점 등이다.

우리가 중세교회의 발전을 말할 때 잊어서는 아니될 내적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곧 성 어거스틴의 공헌이다. 그의 많은 저서가운데 "신의 도성"(Civitas Dei, The City of God)이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역사철학으로써 세상에는 두 세력 즉 선과 악이 있는데 교회는 선을 추구하고 세상은 악을 추구한다고 한다. 지상의 교회는 이 악과 싸워 종말에 승리한는 것이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이 학설을 해석하기를 교회는 모든 곳에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기독교화하므로써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 정치적 해석이 선교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된 것이다.

교회의 다른 내적인 원인으로써는 수도원 운동과 교황 제도를 들 수 있다. 암흑기(500-950년)에 기독교가 쇠퇴의 위기에 처했을 때 수도원 운동이 전개되어 베네딕트, 프랜시스칸, 도미니칸 수도원 등이 등장하여 부패와 타락으로 생명을 잃은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에 헌신하였다. 또한 베네딕트 수도원 출신인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영국 선교에 성공한 다음 서구 세계를 기독교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중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교회는 교황권의 부패와 합께 쇠퇴하면서 계속적으로 분렬하게 되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세계의 기독교화라는 광대한 이상을 추구하였으나 그 자체의 부패와 분렬로 인하여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무릎을 끓게 된 것이다.

3. 개신교의 선교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교회의 선교는 정지상태에 있었다. 특히 루터교의 창시자인 M. 루터와 개혁교(장로교)의 창시자인 J. 칼빈에게서 선교 사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선교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에수의 선교적 명령인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란 말씀은 오고 오는 세대의 크리스쳔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직계 제자들에게만 하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가 16:20절 처음에 "그들은 나가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중세 교회는 모든 곳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니 더 이상 선교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하신 바이고 선교는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일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H. 케인이란 선교학자는 종교개혁 시대에 선교에 무관심한 이유를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종교개혁 시대에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중요시하는 예정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교는 하느님의 예정에 따라 이르어지는 것이지 교회의 일이 아니다. 2) 개혁 직후의 개신교는 매우 나약할 뿐만 아니라 개혁자들 사이의 극심한 갈등으로 생존문제를 놓고 고민하였기 때문에 선교에 대한 비젼이나 열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3) 유럽의 국가들이나 개신교는 약소국가의 식민지화나 선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상업에만 치중하였다. 4)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에 비해 질서가 없고 선교사들이 지성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열광적이고 무식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선교사는 독신이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고 반면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정을 거느리고 훈련도 미약하였다.

개신교의 선교는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북미 인디안 선교를 위해 "영국선교회"와 미국 백인 이주민의 선교를 위하여"기독교지식전파협회"가 생겼다. 이 단체의 뒤를 이어 수 많은 해외 선교집단이 나타났는데 모두 평신도가 주도하는 초교파적 모임이었다. 당시 교회는 계몽주의 사상과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교회 밖에 있는 선교단체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교회으로 흡수되었고 19세기에는 선교가 교회의 전유물이 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개신교의 선교운동은 18세기 지젠도르프가 주도한 독일의 모라비안교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교파는 매우 경건주의적이고 인간구원을 위한 선교적 열정과 활동이 대단하였다. 영국의 개혁자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교의 지도자 P. 뵐러에게 큰 영향을 입었다. 그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작은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뜨거운 신앙체험을 한 다음 생명 잃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 개혁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는 악전고투 끝에 성공회에서 추방당하고 강단을 잃는다. 그는 좌절하지 아니하고 야외, 장터, 광산, 군대, 항구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복음을 실천하기 위하여 당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공장, 진료소를 마련하고 형무소 개혁, 노동자들의 세금 삭감, 노예해방 등 사회선교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영국과 함께 미국 감리교회의 창시자가 되었다.

서구 개신교의 해외선교운동은 식민지 확장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 국가의 정부와 교회는 상부상조하였다고 해서 과언은 아니다. 물론 서구교회는 피선교지의 약소민족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함과 더불어 근대 기술과학과 의료시설과 교육기관 설립 및 발전에 크게 공한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원주민의 문화와 종교를 부정 또는 죄악시하고 그들의 인권을 도외시하였으며 그들을 자기네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가 아니라 죄악이다. 물론 개중에는 개인적으로 선교적 사명에 충실하려는 선교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자국의 외교정책과 연계된 식민지 정책의 우산 아래서 활동하였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서구교회의 모든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게 되고 그 선교의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