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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21세기 선교: 제7강 초기 한국교회와 선교

2002.09.18 10:55

이계준 조회 수:842 추천:5

어떤 교회사가는 한국의 개신교 역사를 3시기로 구분한다. 발아기(發芽期):1885-1930년; 수난기(受亂期): 1930-1960; 서장기(成長期).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19세기 말에서 8.15 해방까지, 다음 강좌에서는 해방 후부터 오늘까지 둘로 나누어 한국교회의 선교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복음전도, 사회참여, 문화운동 등 선교의 통전성(統全性, integrity)을 보여주므로써 오늘과 내일의 선교를 위해 귀한 모델이 되고 있다.

1. 선교의 시작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74년 가톨릭교회를 통해서 였다. 개신교는 100년 후인 1885년 부화절 아침에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가와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하므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성경을 나눠주는 매서인(賣書人)인 이수정과 서상윤이 일본과 만주로 부터 번역된 복음서를 비밀리에 반입, 배포하므로써 기독교는 전파되었다. 서상윤을 비롯한 평신도들이 교회도 설립하였는데 1882년에 만주 서간도, 1883년 평북 의주, 1883년에 황해도 소래에 교회가 세워지고 1885년 이전에 300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교회사가인 민경배 교수는 한국개신교회가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고 하여 소위 "민족 교회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게 된 간접적 원인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이었다. 그 직접적 원인은 한국에 관심을 가진 미국의 가우처 목사가 일본에 온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 박사에게 한국 선교를 권유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김옥균을 통해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기독교를 전파하지 아니하는 조건으로 교육 및 의료 사업을 시행하는 윤허를 받았다. 이에 따라 두 미국 선교사가 1885년에 제물포에 도착하게 되었덩 거이다.

2. 선교의 전개
1)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선교사들은 황제의 윤허를 따라 교육과 의료 사업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는 동시에 간접으로 전도와 교회 설립을 진행하였다. 학교 설립: 아펜젤라는 1885년에 2 학생을 가지고 배재학당을 시작하였고 1886년에 고종황제가 배재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하였다. 매리 스크랜톤 은 1886년에 여학생 1명을 이화학당을 시작하였고 언더우드는 1886년 고아를 모아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 전신)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애니 엘리스는 1887년에 정신여학교를 시작하였다.

교회설립: 아펜젤라는 1887년에 벧엘교회(현 정동교회)를 설립하고 언더우드는 같은 해에 현 예원중학교 위치에 장로교 정동교회(현 새문안 교회)를 설립하였다. 의료 선교사들은 주로 감리교 소속으로 동대문 부인병원(현 이대 부속병원), 상동병원 등을 설립하는 동시에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두 전도도 하였다.

교회의 부흥: 1907년은 한국교회 발전을 위한 축복의 해이다. 원산에 주재하던 카나다 감리교 선교사인 하디 목사의 요한 1서 강해는 교회부흥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 운동은 길선주 목사가 뒤를 이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교회와 신자 수가 급결히 증가하였다. 이 운동은 1909년에 "백만명 구령운동"으로 발전하였고 1919년 3.1운동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예배당이 설립되어 교통 통신이 열약한 때 교회는 3.1운동의 연락망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2) 교회와 사회참여
우리는 흔히 교회와 사회는 관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사회 안에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교회는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도피하지 말고 그 속에서 정신적, 윤리적 누룩이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선교란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개인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전파하여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 일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9세기말 사회의 암적 요소는 성 차별과 사회 계급이었다. 교회는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므로 남녀 및 계층의 차이를 초월하여 예배,친교, 봉사 등의 활동을 통해 봉건적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힘썼다. 즉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구원받은 귀한 존재라는 복음의 진리가 인간성 회복과 주체성 확립에 기여한 것이다. 또한 낙후한 농촌의 계몽과 개발을 위한 농촌운동, 가난 속에 무절제한 민족을 깨우치는 젤제운동을 전개하므로 의식전환과 사회개발에 공헌하였다.

교회가 사회참여에 개입한 대표적 사건은 항일투쟁이다. 1910년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교회의 세력확장을 차단하려는 음모로써 700명의 신자들이 체포되고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상동 감리교회 전덕기 목사가 순교하였는데 독일 신학자 J. 몰트만은 그를 한국교회가 낳은 본회퍼 목사(반 나치운동의 희생자)라고 말하였다.

1919년 3.1운동은 교회의 사회참여의 백미라고 하겠다. 독립선언 33인 중 기독교 지도자가 16명, 천도교가 16명, 불교가 1명이었다(가톨릭교회는 교황청이 일본과 의 외교관계 때문에 참여하지 못함). 이 때 전국 교회가 연락망이 되는 동시에 수 많은 교인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고 일제는 제암리 교회의 학살사건, 수 많은 교회건물 파괴를 자행하였고 많은 교인과 교역자들을 체포 및 살해하였다. 독립운동 및 독립협회에 참여한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일제하에 독립운동은 교회의 참여 없이 불가능할 정도이었다. 당시 2000만 인구 중에 기독교인은 5%미만에 불과하였으나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3) 교회와 문화운동
한국 근대화에 청음으로 공헌한 것은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이다. 기독교학교를 통하여 서양의 과학과 학문이 들어오고 문화가 전달되었다. 1910년에 전국에 기독교학교가 50개였다는 사실은 기독교학교가 서구문명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1903년 이후 YMCA와 YWCA가 창설되어 탈봉건주의, 남녀평등, 자주독립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고 강연회, 토론회, 음악회, 체육활동, 직업교육 등을 통해 근대 문화 발전에 선구자가 되었다. 1890년에 설립한 성서공회는 영국, 미국, 스코틀랜드 선교부의 지원으로 성서번역과 기독교 문서 발행으로 선교와 함께 우리말 발전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고 우리말 지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서양음악의 도입과 보급에는 교회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찬송가와 함께 성가대의 찬양은 서구음악의 수입과 보급의 수단이 되었고 초기 음악가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저명한 음악가들 중에는 이인범, 김동진 등 목사의 자녀들이 많다.

정동감리교회의 최병헌 목사는 배재학당의 한문 교사로쎄 후에 신학공부를 하였다. 그는 한국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와 기독교를 1920년대에 비교 연구하
므로써 1930년대에 동서 학문을 비교 연구한 서구의 신학자들 보다 앞서 갔다.

3. 일제의 탄압하의 교회
3.1운동 이후 일제는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으로 참여한 교회에 대하여 극심한 회유와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이로 인해서 교회는 위축, 침체, 분열의 시기로 들어간다. 일제는 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그것은 종교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우상숭배라고 말할 수 없고 단지 국가의식이라는 거짓 명목으로 강요한 것이다. 1930년대는 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다가 1940년 초에는 이에 불복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 투옥하고 저녁 예배를 폐지하고 교회를 통페합하고 빈 교회 건물을 군수품 공장이나 창고로 사용하며 드디어는 모든 교단을 묶어 소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란 꼭두각시를 만든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계속되었다. 1940년에는 주기철 목사가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하였고 그 뒤를 이어 50여명의 교역자가 순교했고 2000여명의 시도가 투옥되었으며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다.

일제의 억압과 교회의 쇄퇘에도 북구하고 새로운 차원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 대표자가 이용도 목사이다. 그는 1928년-1935년까지의 짧은 기간에 무기력한 교회를 부흥시키고 재건하려고 총력을 기우렸다. 회개, 기도, 사랑을 강조하면서 열정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걷었으나 폐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01년생으로 한국교회의 선구자 김재준, 함석헌과 함께 교회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문화신학회는 이 3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연군논문집을 간행한 바 있다.

한국교회는 강대국들의 식민지 확장 정책의 영향아래 서구교회의 선교와 일제의 식민지라는 아이로니 속에서 탄생하고 발전한 특유한 성격의 교회이다. 실상 정치적 시각에서 보면 서구의 선교와 일제는 모두 식민주의(colonialism)의 이념에 속한다. 미국 선교부는 외교정책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보수적 신앙의 전달과 정치적 불간섭주의로 일관하였고 소수의 지성적 선교사들만이 독립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교회는 교회 발전과 부흥, 민족 독립운동, 서구문화 도입과 우리 문화 고수와 발전 등 삼위일체적인 통전적 선교 모델을 창조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고 감사할 것은 일제의 가혹한 타압으로 많은 순교자들고 희생자들을 낳은 것은 그 개인적인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후대 한국교회의 부흥에 없어서는 아니될 거륵한 산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