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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21세기 선교: 제10강 다원사회와 다원선교

2002.10.09 14:33

이계준 조회 수:950 추천:5

인류역사에는 발전 단계가 있었다. A. 토플러는 그것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즉 농경사회, 산업사회, 전보사화 등. 농경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인구가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단순한 생활을 하였다. 18세기에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직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지난 20세기에는 직업의 다원화 시대라고 말할 정도로 분업화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70-80%가 산업지대 또는 대도시로 이동하게 되었고 댜양한 생활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농경사회에서는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쉬던 형태에서 주말에도 일하거나 또는 여가를 즐기는 형태가 나타났다. 그리고 정보사회에 들어오면서 IT산업이나 서비스산업이 발전하면서 직종이 더욱 다원화되고 또한 노동시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주 5일 근무제가 확산되면서 가정이나 사회생활의 유형이 복합적으로 다양화되었다.

기독교는 초대교회 이후 근 2000년 간 농경사회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부락중심적 목회 또는 선교에 충실하였다. 이 때 선교란 개인과 가정을 신자화하는 것을 지상 모표로 하였고 이에 더하여 18세기부터는 소위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전개는 다양한 직종과 함께 다양한 특수 집단들을 낳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농경사회 중심의 선교는 이제 특수 집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을 특수선교 또는 다원선교라고 한다.

1. 다원선교의 기원
우리는 먼저 다원선교의 기원을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구약의 고아와 과부를 특별히 보살피라는 교훈과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배곺은 자들은 먹이고 소외되 자의 친구가 되며 비인간적으로 취급되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회복하련는 시도는 모두 다원선교의 성서적 기초가 된다. 그리고 중세기 교회가 대학과 병원을 설립하고 사회사업에 참여한 것은 다원선교의 역사적 기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의 다원선교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 죤 웨슬리는 회심 이후 제도화로 인해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 영국 성공회를 비판하므로 성직에서 파면당하였다. 그는 교회 내의 일터를 잃게 되자 교회 밖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시장, 광산, 군대, 부두 등 어느 곳이던 간에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말씀을 선포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적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런던에 있는 철공장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개조하는 한편 거기에 실직자들의 일터, 고아원, 진료소를 만들었다. 그는 이에 더하여 노예제도 페지, 빈자들의 세금 인하, 형무소 개선 등 사회개혁운동도 전개하였다. 고로 웨슬리 전기를 저술한 스케빙톤 우드는 웨슬리를 현대 다원선교의 시조라고 불렀다. 과연 그는 복음을 말씀과 실천으로, 교회 안과 밖에서 그리고 교회 자체와 사회를 개혁하는 총체적 다원선교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2. 다원선교의 유형과 중요성
가. 다원선교의 유형은 사회의 변동과 다양화에 따라 증감하기도 하고 그 중요성의 차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원선교의 현장은 학원, 군대, 병원, 형무소, 산업체, 고아원, 양노원 등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변화는 새로운 선교적 요청을 불러왔다. 사회의 치열한 경쟁과 갈등 및 가정파괴는 정신병, 가출 청소년을 유발하므로 근자에는 상담소, 청소년보호소같은 기관이 등장하게 되고 특히 IMF사태 이후 실업자와 노숙자의 문제도 시급한 선교의 대상이 되었다.

21세기는 교회가 접근할 수 없는 인구가 급증할 전망이다. 기존의 하층구조와 함께 젊은 층과 지식 계층이 그렇다. 이들은 기성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극빈자들은 미신이나 무교에 심취하는 반면에 중류 이상의 젊은 층과 지식인들은 TV, 영화, 스포츠, 여행 등 다양한 대체종교로 대리만족이 가능한 것이다. 이제 전 근대적, 교회중심적 선교정신이나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나. 현재 한국교회는 해외선교에 비하여 다원선교에 대한 관심이 극이 미약하다. 근자에 나타나는 선교의 대상 말고도 기존의 학원, 병원, 군대 등에 대하여도 별 관심이 없다. 비록 기관의 선교자들이 좋은 이상과 방법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기관 자체의 예산으로는 바람직한 선교활동을 버릴 수가 없는 현실이다.

기독교 계통 중 고등학교의 사례를 보면 대개 1-2명의 교목이 성경과목과 예배를 인도한다. 열약한 시설과 자료를 가지고 싸이버 세대를 교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진학문제로 대부분의 십대들이 교회에 접근할 수 없어서 교회 중고등부가 고갈되어 가는데도 교회는 대신 교회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기독교학교에 선교비를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중심주의는 선교의 황금어장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거이 모든 다원선교 현장의 문제이기도 하다.

군사독재 시대에 있어서 다원선교의 백미는 산업선교이었다. 현재 노동운동이 선교의 울타리를 벗어났지만 그 근원은 산업선교에 있었다. 당시 열약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익을 위해 교역자들이 복음을 들고 산업선교에 투신하였을 때 그 일을 뒷바침해 준 것은 한국교회가 아니라 서구교회이었다. 우리 교회는 시대적으로 절박한 선교문제를 외면한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버리고 멀리 도망간 제자의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 참으로 수치스런운 교회의 역사이
다.

다. 우리 사회의 산업발전과 경제성장은 소위 3D현상 곧 danger, dirt, diffidulty에 속하는 업종에 대한 내국인의 기피 형상을 불러이르켰다. 그 대안으로 동남아의 연수생들과 중국교포들을 대거 초빙하여 그 수효가 거이 30만에 육박하는 듯 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불법 체류자들로써 가혹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제 교회는 그들의 법적 지위의 향상 및 적정한 노동과 임금을 통한 삶의 질을 높이는데 진력해야 한다. 그들에게 포괄적 선교활동은 그들이 복음을 수용할 가능성을 확대하는 것이며 여기서의 신학교육은 그들의 귀국과 함께 선교활동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지인 교육과 선교는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장벽을 극복하는 동시에 교회가 무모하게 지출하는 재정부담을 극소화하고 한국선교사들의 능력부족으로 할 수 없는 선교의 질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라. 예수께서는 인간의 다양한 요구에 대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근거로 하여 말씀과 행동으로 응답하였다. 이 처럼 우리 교회는, 만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면 선교현장의 다양한 요청에 응하려는 신앙적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교회는 이를 위해 먼저 자기가 선교현장속에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확인해야 한다. 즉 선교신학적 견지에서 볼 때 선교하는 전방부대는 다원선교에 투신하는 선교집단이고 교회는 일선에서 싸우는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후방부대인 것이다. 후방부대인 교회가 전방부대인 다원선교를 충분히 지원하면 전쟁은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재정적 지원이 미약하거나 없을 때 전쟁은 패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전방과 후방 모두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

마. 날로 변하는 다원선교의 성공적 결과를 위해서는 전문인력의 양성이 절실하다. 신학교육 자체가 교회중심에서 선교중심으로 그 축을 이동하므로 다원선교 지향성적 교역자를 육성해야 하며 동시에 교회는 다원선교 현장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교인들에게 선교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모여서 예배를 통해 영적 능력을 배양하고 교육을 통해 선교훈련을 실시하며 흐터져서 봉사와 선교에 임하는 "하느님의 선교"(The misson of God)를 위한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자기중심적 교회와 교인은 자기부정적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와 교인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며 미래 다원사회를 위해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 다원사회에 나타나는 다원선교의 필요성을 생각해 보았다. 부단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자기가 있는 위치, 목적, 사명을 자각하고 확인해야 한다. 나아가서 상황의 진정한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겸허하고도 분명한 선교정책과 전략을 구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될 때만 참 그리스도의 교회로, 항상 새롭고 개혁하는 교회로써 자기 정체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