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슬람 수피 루미(Mewlānā Jalāl ad-Dīn Muḥammad Rumi, 1207~1273)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번역․출판되었다. 국내에는 <이슬람의 이해>(분도출판사)라는 책으로 소개된 바 있는 수피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안네마리 쉼멜(Annemarie Schimmel)의 <루미 평전 : 나는 바람, 그대는 불>(원제 Rumi : Ich bin Wind und Du bist Feuer, 늘봄)이 바로 그 책이다. 비교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루미, 이슬람 연구의 최고 권위자 안네마리 쉼멜 교수, 내가 평소 존경하는 여수 돌산섬 김순현 목사의 번역, 이 셋이 삼위일체가 되어 이루어진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 <루미 평전 : 나는 바람, 그대는 불> / 안네마리 쉼멜 지음 / 김순현 옮김 / 늘봄 펴냄 / 332쪽 / 1만 8000원

루미 연구의 또 다른 권위자인 캠브리지 대학의 레이놀드 니콜슨(Reynold A. Nicholson)에 의해 루미의 대표적인 교훈 시집 <마스나비>(Mathnawi) 전권이 영문으로 번역·출판된 이후로 루미는 영미권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수피문학의 꾸란', '페르시아어로 된 꾸란'이라는 별칭을 얻은 <마스나비> 이외에도 3만 6000구에 이르는 서정시, 그리고 루미의 설교와 서간을 모아 엮은 산문집 <피히 마 피히>(Fīhī mā Fīhī) 등도 유럽과 북미의 독자들에게 소개되면서 루미는 그야말로 이슬람 문화의 '전도사'가 되었다. 이에 유네스코는 루미탄생 80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을 '세계 루미의 해'로 선언하기도 했다.

 

2.
국내 독자들에게 '루미'는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루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의 영성에 관한 관심이 지속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영성 신학에 대해서도 이른바 '정통 신학'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단성 운운하는 신학계의 보수적 풍토를 감안할 때 이웃 종교의 신비주의 사상가인 루미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신학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김순현 목사가 각고의 노력 끝에 번역하여 소개한 쉼멜의 <루미 평전>이 돋보이는 이유다.

번역자 김순현 목사는 최근 에버하르트 부쉬의 칼 바르트(Karl Barth) 전기 <칼 바르트>(복있는사람)를 번역·출판해 낸 손성현 박사와 더불어 내가 가장 신뢰하는 기독교 번역자 가운데 한 명이다. 에릭 메텍시스의 <디트리히 본회퍼>, 메튜 폭스의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분도출판사)와 <영성-자비의 힘>(다산글방), 스텐리 존스의 <순례자의 노래>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공역, 이상 복있는사람) 등이 그의 손끝을 거쳐 국내 독자들에 소개되었다. '영성 신학'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가 부족한 국내 상황에서 그가 번역하여 소개한 책들은 기독교의 영성을 보다 넓은 틀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에 보탬이 되었다. <루미 평전>을 소개한 맥락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본다.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이른바 '정통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정도에서 주변에 머무는 것과 달리 루미는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의 범주 자체를 벗어난 이웃 종교의 신비가라는 점에서 더욱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알라'와 '야훼'라는 신의 이름에 새겨진 차이에 주목하는 이들이 루미를 기독교 영성의 심화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름의 차이보다는 그 초월적 지평이 지닌 보편성에 주목하는 독자들은 루미가 사랑한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길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3.
쉼멜은 루미의 <마스나비>의 구절들을 '범신론적 신지학'(pantheistic theosophy)이라는 개념적 틀로 읽어 내려고 했던 19세기 한 독일 신학자의 주장을 언급하며 이를 "무미건조한 개신교 신학의 입장에 서 있었던(216쪽)" 전통으로 일축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에 대한 개신교 신학의 주류적 시각은 여전히 인식론적 합리성을 중심으로 하는 19세기의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과의 하나 됨의 기쁨을 추구하며 이를 표현할 적절한 (비)언어적 수단을 모색하는 대신 인식론적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적 작업에 얽매여 있는 개신교 신학은 온갖 종류의 '신비'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의 이른바 '본질'은 문자를 떠나 임의 숨결과 만나는 데 있다. 상상해 보라. 그토록 기다리던 임이 곁에 계신데, 그이가 보낸 편지를 뒤적거리며 사랑의 '본질' 따위나 논하고 있는 과똑똑이의 진지함을. "무미건조한 개신교 신학(216쪽)"의 전통에 속한 이들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기쁨의 경험 그 자체에 주목하기보다 이 경험을 대상화하여 분석하는 일에 탁월함을 보인다. 그러나 사랑과 이성은 어느 정도 대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살찌면 지성은 야위고, 사랑이 통치자가 되면 지성은 교수대에 매달린 도둑(251쪽)"이 되기 마련이다.

초월적 존재와 사랑에 빠진 이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알고, 그분의 활동 방식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없다(108쪽)"고 고백한다. 사랑 안에서 만난 하나님은 매순간이 낯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에게서 그리스 철학의 '동일성(identity)' 따위의 개념을 찾으려는 노력은 허망한 실패로 귀결될 뿐이다. 그러므로 루미는 "하나님의 본질을 숙고하지 말고, 그분의 속성들을 숙고하라(119쪽)"는 이슬람 예언자들의 지혜를 따라 "99개의 아름다운 신명(神名)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속성들에 주목한다. 루미의 춤과 노래, 그리고 시는 문자를 떠나 "경동맥보다 가까이에 있는(124쪽)" 아름다우신 임의 숨결과 만난 이의 사랑의 찬가이다.

 

4.
사랑은 때로 타자와의 뚜렷한 경계를 무화(無化)시키곤 한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고, 물이 목마른 사람을 찾듯이, 사랑하는 이와 사랑 받는 이도 서로 의지한다(258쪽)." 신세를 지고 갚는 따위의 산술적 관계를 넘어서 '증여'의 무목적성이 일궈 내는 사랑 안에서의 일치는 사랑 받는 이와 사랑하는 이 사이의 경계를 급진적으로 해체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그토록 소중했던 '나'를 이름뿐인 존재로 몰락시킨다. "나는 당신 안에서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당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게 남은 것은 이름밖에 없습니다(285쪽)."

예언자 마호메트는 말했다. "죽기 전에 먼저 죽어라(202쪽)." 사랑 안에서 '나'는 길을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존재하던 '나'의 배타적 경계가 사라진 '이름뿐인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은" 존재의 '흔적'일 뿐이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사랑 안에서 '나'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로 여겼으며,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갈 2:20)"는 선언을 통해 '내'가 아닌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살기를 바랐다.

부서짐은 새로운 삶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루미는 "마음이 폐허가 되어야 그 속에서 값진 보화, 곧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172쪽)"고 말한다. "값진 기름을 품고 있는 호두 알맹이를 꺼내려면 껍질을 깨뜨려야 하고, 진주를 꺼내려면 조개를 깨뜨려야(199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미는 부서지지 않으려는 몸부림,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겠다는 치기 어린 다짐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그분은 그대 앞에 있는 모든 길을 닫으시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한 길을 은밀하게 보이신다(139쪽)."

 

5.
서구에서 루미가 환영받고 있는 현실의 맥락을 정확히 짚어 내기는 어렵다. 다만 신자유주의적 삶의 질서가 내면화된 가운데 겪게 되는 개인의 고통을 '내면의 변화'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일련의 개인주의적이고 감정주의적인 시도와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 볼 따름이다. 또한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고통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이웃의 비참함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정당화하고, 고통의 사적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루미와 같은 '신비로운' 영성가가 적극적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랑이 살찌면 지성은 야윈다(251쪽)"는 경험적 진실을 단순히 부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진실로,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잠 10:12b)." 그러나 사랑에 의해 갈수록 야위어 가는 것은 지성의 (인식론적) 폭력성이지 지성 그 자체가 아니다. '앎'을 통해 타인을 억압하며 그 위에 군림하려는 지성의 지배적 폭력성은 사랑의 통치에 의해 "교수대에 매달린 도둑(251쪽)"이 된다. 그러나 지성은 사랑의 빛에 의해 더욱 밝게 빛난다. 루미를 읽는 행위가 사회적 고통의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지적 세계의 투쟁과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겠다.

 

'신비'는 '저항'에 의해 그 사회적 맥락을 완성한다. 루미가 "오직 사랑, 사랑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242쪽)"고 외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나'를 이름뿐인 존재로 몰락시키는 동시에 '너'를 위한 존재로 거듭나게 만든다. 타인을 위한 존재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순절에 루미와의 뜻밖의 만남을 통해 그 뜻이 더욱 선명하게 새겨지는 것 같아 기쁘고 고마울 뿐이다.

 

 

홍정호 / 신반포감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