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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만행과 한국역사책 비방

2015.09.22 20:25

김유동 조회 수:431

2015. 7월호 일본 <文藝春秋>


중국, 한국, 러시아의 ‘역사 교과서’

일본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佐藤 優(사토 마사루)

 

 *지난주 권미경 권사님이 빌려 주신 일본 <文藝春秋> 를 번역해서 올립니다 관심 있는분은 읽어 보십시오.

 

테러리스트 예찬의 한국, 리얼리즘을 철저하게 그리는 중국과 러시아.

우리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세 나라는, 어린이들에게 일본을 이렇게 가르 치고 있다.

 

전후 70 년이라는 길목을 넘어선 2015년, 역사 인식을 둘러싼 문제가 크게 그로스업되고 있다. 우선 이웃인 중국, 한국, 러시아는, ‘역사’를 유효한 외교 카드로 이용해서 일본과의 긴장 상태를 조성해 놓았고, 일본 국내에서는 아베(安倍) 수상의 ‘전후 70년 담화’를 비롯한 역사를 둘러싼 논의들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란, 그리스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구성되어 있다. ‘크로노스’란 시간의 계열이라는 뜻으로서,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키고, ‘카이로스’는 타이밍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그 앞뒤에서 세상이 크게 변화한 순간을 가리킨다. 이 ‘카이로스’를 비교함으로써 그 나라의 역사관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텍스트가 바로 역사 교과서다. 역사 교과서에는 그 나라의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알아 두어야 할 지식과 사고가 들어 있다.

이번에는 중국, 한국, 러시아의 역사 교과서를 읽어 보며, 그 세 나라가 어떤 사상과 역사관 위에 입각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들이 중등 교육(일본의 중학, 고교에 상당)의 현장에서 어떠한 일본관을 심어 놓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 2012년에서 2014년에 걸쳐 각국에서 사용된 고교 수준의 교과서를 편집부에서 독자적으로 번역한 것과 明石 서점이 간행하고 있는 세계의 교과서 시리즈로부터 각 나라의 것들을 아울러서 이용했다.

 

‘가다 막히면 바꿔라’

우선 중국의 것부터 살펴본다면,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계급 투쟁사관과 철저한 리얼리즘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역사와 유럽의 종교 개혁 등 동서고금의 개혁을 다룬 고교 교과서 <역사상 중대 개혁 회모(回眸)>의 서문에 이렇게 쓰이어 있다.

“중국의 고전 <주역(周易)>에는 ‘가다가 막히면 바꿔라. 바꾸면 통한다. 통하면 계속한다’라고 쓰이어 있다. 개혁이란 바꾸는 일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구제도와 구문화와 구사상을 제거하고, 풍부한 활력이 넘치는 신제도와 신문화와 신사상을 창조하는 일이다”(<歷史 選修 1 歷史上重大改革回眸> 인민 교육 출판사)

간단히 말한다면 ‘닥치는 대로 해도 좋으니까, 잘 하라’는 말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적인 발전사관이 아니라 임기응변이라는 것이야말로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역사 교과서 자체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교과서로 공부하면서, 가다 막히는 일이 생기면 그 곳은 잘라 버리면 된단, 자신의 형편에 맞는 것으로 바꾸어도 좋다는 것이다. 중국이 공산당의 1당 독재를 하면서도 사살상으로는 자본주의화하고 있는 것 또한 이 말을 가지고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로 ‘가다 막혔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여기서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영국의 역사 교과서다. 이 책의 마지만 챕터에서 ‘이 교과서는 대영제국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만을 정리한 것’이라고 내용에 대한 불비를 일부러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학대받은 자에 대한 챕터가 적다는 것, 여성에 관한 기술이 적다는 것 등이 열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교과서에서는 역사가 단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는 것임을 저절로 깨닫게 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교과서는 영국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공부하는 자에게 쉴 새 없이 생각하기를 요구하면서, 어떤 사물에 대해서나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원리 원칙에 사로잡힐 것 없이 끝장만 맞추어 놓으면 된다는, 매우 리얼리즘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을 육성하고자 한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明治維新을 철저히 연구

이 ‘중대 개혁’을 다룬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메이지(明治) 유신도 다루어지고 있다. 교과서에는 으레 챕터마다 설문이 마련되어, 학습에 대한 정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에는 교과서 제작자의 의도가 가장 장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국내외 환경과 결합되어 있는 것들을 자료를 사용해서 살펴보고, 메이지 유신이 어떻게 성공을 거두었는지 토의를 하라’

메이지 유신을 철저하게 연구해서 단기간에 일본이 제국주의의 나라가 된 이유를 분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고도 ‘5개조의 어서문(御誓文)’을 읽고 생각해 보자라든지, 영국의 권리 장전과 대일본 제국 헌법을 비교하라는 등 상당히 고도한 설문이 마련되어 있다.

이 교과서의 기술을 보고 있느라면, 전쟁 전의 일본 제국주의를 단순한 침략 사상으로서 잘라내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은 반면교사로 삼아, 중국의 근대화를 진전시키고 있다는 의도를 강하게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일본은 제국주의가 발전되어 가는 와중에 ‘학살’을 벌인 일이 있는데, 역으로 말한다면, ‘학살’ 같은 행위를 제외하고 본다면, 일본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스탠스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중국의 교과서는 ‘제국주의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리얼한 구조 분석이 매우 확고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제국주의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간 ‘카이로스’(타이밍)은 언제라고 기술되고 있는 것일까.

‘1872년에 일본은 중국 대만 섬과 일본 사이에 있는 류큐(琉球) 제도에 진출해, 류큐 국왕에게 자국을 일본령이라는 것을 인정시키기를 촉구했다. 류큐는 종래 중국의 속국이었고, 청나라 정부에서 작위를 얻고 있었다. 2 년 후, 일본은 해난(海難)을 당한 선원이 대만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출병했다. 대만 인민은 용감하게 저항했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일본은 이를 놓고 청나라 정부에 배상을 요구했다. 약골인 청나라 정부는 양보해서 일본에 50만 냥의 백은(白銀)을 지불했다. 1879년, 일본은 정식으로 류큐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오키나와(沖繩)현이라고 했다’.

오키나와를 일본의 판도로 끌어들인 ‘류큐 처분’은 ‘중국 침략’의 첫걸음이었고, 일본의 ‘제국주의’ 과오의 시초라고 규정하고 나서 이렇게 계속된다.

‘1893년에 일본은 갑오전쟁(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청국 정부에 승리해서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대만과 펑후(澎湖) 제도는 할양되면서, 일본에 2억 냥 이상의 배상금을 치렀다. 이로부터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었다.’

청일 전쟁의 패전으로 대만을 할양했고,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의 일본의 중국 진출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일’ 교육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기술은 별로 없고, 오히려 단촐한 문장이 눈에 뜨인다.

‘1931년, 일본 침략군은 9.18 사건을 일으켜, 중국 동북군 주둔지를 포격하고 선양(瀋陽)을 점령했다. 반 년도 지나지 않아 동북부 온 땅을 점령했다’

‘1932년 3월, 일본 제국주의는 폐지된 청나라 황제 푸이(溥儀)를 도와, 괴뢰로서 이용하면서 중국 동북부에 가짜 만주국을 만들어 내었다.’

‘일본의 전면적 대중국 침략 전쟁의 위협에 대해, 국-공(國共) 양당이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온 국민이 분연히 일어서서 항쟁을 시작했다.’(역사①必修)

이상은 만주 사변, 상하이 사변, 만주국 건국, 국-공 합작에 대한 기술이다. 이 언저리의 관점은 얼만 전의 일본 ‘진보주의 사관’과 대차가 없다. 그 가운데서 내가 주목한 것은 ‘다나카 상주문(田中上奏文 : 상소문)’에 대한 취급이다. 이것은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수상이 쇼와(昭和) 천황에게 ‘중국 침략과 세계 정복을 위해 만몽(滿蒙)을 지배하에 두자’고 상소했다는 것이다. 이 ‘상소문’은 반일 프로파간다로 작성된 위서(僞書)로 알려지고, 쇼와 초기부터 일본 정부는 강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를 마치 사실(史實)이었던 것처럼 다루고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다나카 상소문’에 관한 글을 볼 수가 있다.

 

난징(南京) 사건의 기술

난징 사건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일본 침략자는 도처에서 방화, 살육, 강간, 약탈 등 나쁜 짓들을 마구 저질렀다. 1937년 12월, 일본군은 난징을 함락시킨 후, 난징의 평화적인 주민에 대해 비인간적이며 비참하고 처참한 학살을 자행했다. 6 주간 만에 30만 명이 넘는, 촌철도 지니지 않은 평민과, 무기를 버린 군인들을 학살했다’(<역사 選修 3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인민교육출판사)

학살의 피해자 수 30만 명은 중국이 제멋대로 주장하고 있는 숫자이지만, 그 수는 ‘일본의 침략’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를 머리에 입력한 다음에 다음 글을 읽어 보기 바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각각 한 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각각 약 20만 명, 약 7만 명이었다고 일본 교과서에 기재되어 있다. 그랬는데, 중국에서는 희생자 수를 합산해서 30만 명 가까이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숫자의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즉, 난징 사건과 원폭 희생가가 같은 인원수였다고 표시함으로써 ‘일본군은 원폭 2 발분의 살육을 했다’고 가르치기 쉽게 되고, 30만 명이 원폭으로 죽음을 당함으로써 일본은 보복을 받았다고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종전(終戰)에 관해서는 이렇게 쓰이어 있다.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 북부에 있는 관동군에 파멸적인 공격을 가했다. 중국 항일군민도 전략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궁지에 빠진 일본은 투항을 선언했다. 1945년 9월 2일의 항복문서의 서명으로써 전쟁이 끝났다는 것만을 기술하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와는 달리, 여기에는 8월 15일이라는 날짜는 들어 있지 않다. 9월 2일의 항복 문서에 대한 서명으로써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것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전후의 일본에 대한 언급은 극단적으로 적어지고, 중-일 국교 정상화에 관한 사실이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전체를 통해 볼 때,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반일 교육으로 내셔널리즘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중에서 중국이 어찌 행동해 왔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영토를 빼앗긴 것도 일시적으로 약했던 시절의 일이었노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절절이 전해져 온다. 그들은 경제가 발전했다고 해서 마침내 대국의 일원으로 가입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다음 글은 현대 중국의 위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국제적인 반파시즘 통일 전선이 성립하고 나서, 동맹국은 경제면으로 서로 지원하고, 군사면으로 서로 협력하는 일은, 승리로부터의 결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제적인 통일 전선은 공통의 적을 타파하는 강한 무기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설문도 준비되어 있다.

‘세계의 반파시즘 전쟁은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정의의 전쟁이었고,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교훈은 남겨 놓았다---장쩌민(江澤民). 당신은 제2 차 세계 대전은 인류에게 어떠한 소중한 경험과 교훈을 남겨 놓았다고 생각합니까?’

지난날에는 ‘일본 군국주의’라는 낱말을 쓰고 있었지만, 근년 들어서는 굳이 ‘파시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치스의 홀로코스트와 일본이 중국에서 범한 ‘죄’를 동렬의 것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주목거리일 것이다.

‘브란트 수상은 바르샤바 게토의 기념비 앞에 무릎 꿇고, 독일이 범한 죄를 사죄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1975년에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수상이 참배한 뒤로, 수많은 수상이 임기 내에 A급 전범이 모셔져 있는 위령 시설을 참배하고 있다. 일본과 독일의 전쟁의 죄과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대해 당신은 어찌 생각합니까?’

즉, 중국은 단순한 반일이 아니라, 반파시즘 진영으로서 미국과 영국 등과 더불어 커다란 전쟁에서 겪었고, 여기서 이겼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세계 질서를 만들어 놓은 플레이어라는 자부가 강하게 전해져 온다.

 

‘테러리스트 사관’의 한국

이어서 한국의 교과서다. 이번에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이 한국의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관이었다. 이 나라의 역사관은 일본으로서는 위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 세계 교과서 중에서고 지극히 진귀한, ‘테러리스트 사관’으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이처럼 몰리는 바람에 테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 있는 것이다.

북조선과의 친화성은 예상 이상으로 강하게 느껴지고, 북조선의 역사 교과서보다도 과격한 내용이 되어 있다.

‘테러리스트 사관’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역사를 고쳐 쓰기도 하고 요긴한 일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한국의 역사 교육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예컨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출병이라는 ‘적대의 역사’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에도(江戶) 시대의 조선 통신사 같은 ‘우호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한일 합병에 관해서는 지금의 한국 정부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서 새로운 부분은 없다. 을사조약(제2 차 한-일 협약)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권을 지닌 황제의 재가를 얻지 못했으므로’ 무효라는 것이 그 한 예이다. 한일 합병의 그 날은 이렇게 쓰이어 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한일합병 조약을 공포했다. 이로써 대한 제국은 주권을 찬탈당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고등학교 한국사> 志學社)

한국의 교과서에서 알짜배기 특이성을 볼 수 있는 것은 한일합병 전후부터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테러리스트라고 하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암살한 안중근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취급은 ‘앗사리’하다.

‘장인환(張仁煥)과 정명운(田明雲)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침략을 미화하고 있던 스티븐스를 저격했고, 안중근은 만주의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1909同社)’

그리고 안중근 이외의 테러리스트의 행동에 관한 글이 이어진다.

‘박열(朴烈)은 1923년 일본에서 국왕 암살을 기도했다. 조명하(趙明河)는 1928년 대만에서 일본 황족을 칼을 가지고 습격하는 의거를 했다’

‘1932년에 한국인 애국단원인 이봉창(李奉昌)이 도쿄(東京)에서 일본 국왕이 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실패했지만, 이에 대해 상하이(上海) 신문에서는 실패를 애석해하는 논조가 보도되었다’

‘한국인 애국단원이었던 윤봉길(尹奉吉)은 기념식 단상으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군과 고관 등을 암살했다. 윤봉길의 의거는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특히 중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같은 책)

한이 없으므로 여기까지만 하겠는데, 요는 천황과 정부 고관을 암살하고자 하는 테러리스트를 기다랗게 소개(이봉창과 윤봉길은 사진을 곁들여)하고 있다. 안중근의 ‘공적’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수상이라고는 하지만, 나라의 원수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옥(玉)’이다. 일본의 국가 원수인 천황과 황족의 목숨을 노린 자가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가장 위대하게 치이고 있는 것이다.

문명한 나라에서, 테러에 의해 현상황을 타파하고자 하는 시도를 찬양한다는 것은 흔히 생각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한 안중근보다도, 천황 암살에 ‘실패’한 테러리스트에 관해 상세하게 써 놓고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런 글에서는 천황 암살이라는 동기를 쳐들기만 해도 상찬할 가치가 있으며, 수단이나 결과는 아무래도 좋다는 따위의 사고도 들먹거려지고 있다.

이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테러리즘의 역사는 이처럼 길다’라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아일랜드에서도 그런 교육은 하고 있지 않다. 한국은 ‘한’의 문화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교과서도 분노에 충동받아 만들어지고 있다. 머리로 왈칵하고 피가 치솟고 분노의 감정이 그 저류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 문데는 해결되지 않았다’

일본의 조선 통치에 대해서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경제 수탈’에 대해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고 있다.

‘조선 총독부는 1910년에 회사령을 제정해서, 회사를 설립할 때에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는 한국인의 회사 설립을 억제함으로써 민족 자본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중략)1915년에는 조선 광업령을 제정해서, 광업권에 대한 허가제를 실시했다. 한국인의 광산 경영을 규제하면서 금, 은, 철, 석탄 등 경제성이 있는 광산은 거의 일본인이 독점했다. 한편, 고려 인삼, 담배, 소금 등에 대해서는 전매제를 실시해서, 조선 총독부의 수입을 늘려 놓았다(같은 책).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같은 대기업은 물론이고, 일본의 수많은 중소 기업도 조선으로 진출했다. 이들 기업은 조선의 싼 노동력을 이용해서 큰 이익을 올렸다’(<세계의 교과서 시리즈 39 검정판 한국의 역사 교과서> 明石書店)

수탈과 테러리즘, 그리고 다시 수탈의 되풀이로 일본 통치 시대의 기술은 끝난다. 일본이 ‘민족 말살 정책’을 벌이려 했다는 글도 여러 번 등장한다.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한다” 중-일 전쟁을 계기로 해서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말을 내걸고, 황국 신민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내선일체란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의미로서, 한국인을 일본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와 백성으로 삼자는 것이었다’(같은 책)

한국으로서의 8월 15일은, 광복절(독립 기념일)이다.

‘일본은 8월 15일에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36 년간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은 마침내 광복을 맞이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국인은 일제에 대항해서 끊임없이 투쟁했다. 그 결과, 나라를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같은 책)

독립 운동과 저항 운동에 대해 매우 상세히 언급하는 한편으로, 그 열량에 비해 독립의 날에 대해서는 뜻밖에도 냉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독자의 노력’만으로는 독립할 수 없었노라고, 여기서는 한 발짝 물러선 시선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의외라는 느낌을 준다.

현재 한국 정부가 문제로 삼고 있는 사상(事象)이 매우 명확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점도 이 나라 교과서의 특징이다. 예컨대, ‘건국 신화’의 지경에까지 도달해 있는 ‘독도’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고 과제도 설정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독도를 자국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일본의 주장을 다음에 든 인터넷 사이트를 참고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해 가면서 비판해 보자, 또,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도 이야기해 보자’(같은 책)

이 과제에는 학생들이 일본의 주장을 알더라도, 이런 것을 모두 논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와 징용 문제 등, 오늘날 뉴스에 떠들썩한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일제는 징용제를 실시해서, 전시에 필요한 노동력을 강제적으로 동원했다. 한국인 청장년은 징용으로 일본뿐 아니라 중국, 동남아시아, 사할린 등으로 보내졌다. (중략) 상당수의 여성은 전쟁터에 보내져서 일본군의 군대 위안부로서 이용되었다’(같은 책)

이 글은 박정희 정권의 부분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일 협정을 비준했다. 그 결과 한국은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 일부를 충당할 수 있었고, 한-미-일 공동 안보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 반면,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 약탈 문화재의 반환,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같은 책)

교과서의 ‘한-일 문제는 해결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고 굳이 기술한 점에서 한국 역사관의 특이성을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자민족 내에서의 동질화 비중이 매우 높아서 보편성이 없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해 보았자 세계와 견줄 수 있는 객관적인 지성이나 역사관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중국과 러시아의 교과서와의 가장 큰 차이다. 그러나, 이웃에 이러한 역사관을 지닌 나라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새삼 확실하게 인식해 두어야 할 일이다.

 

가장 교활한 러시아의 교과서

 

이제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역사 교과서를 살펴보기로 하자.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내용이 압도적으로 어렵고, 대학 수준이라 할 만하다. 우선 재미있는 것은 러-일 전쟁을 제국주의국가끼리의 전쟁이라고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다양한 원료를 풍부하게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정치와 군사면으로는 매우 허약한 중국과, 또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다른 유럽 여러 나라로서는 비교적 손을 뻗치기 어려우며, 러시아하고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러시아는 생각지도 못한 라이벌 일본과 충돌하게 되었다’(<러시아의 역사> 교육 출판사)

전쟁 시작을, ‘전쟁은 러시아로서는 심각한 시련이었다’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군사력 분석을 하고 있다.

‘군 간부에 관에서도 일본은 대단한 강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활약은 매우 숙련된 에너지시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통수(統帥)는 그 반대로 소극성과 이니셔티브의 결여가 두드러져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만주군을 이끌고 있었던 A. N. 크로포트킨에게서도 엿볼 수 있었다’(앞의 책)

그리고 병사들도 전쟁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가 오르지 않았노라고 쓰고 있다. 이는, 방위 전쟁이라는 대의(大義)가 있었던 대조국 전쟁(독-소 전쟁)과는 대조적이다.

전투의 기록은 콘드라첸코 장군의 여순 방어, 마카로프 제독의 전사 등 꽤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인상에 남는 것이 포츠머스 조약에 관한 대목이다.

‘극동에서 일본이 지나치게 강대해진다는 일은 그 동맹 여러 나라, 특히 미국의 계획에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던 대목이다. 바로 그 미국 정부가 포츠머스(미국)에서 열린 화평 교섭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했다’(같은 책)

포츠머스에서는 미국이 일본을 억제하려 했기 때문에 교섭이 제대로 벌어졌다고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외교단의 승리라고 하지 않고, 외교의 리얼리즘을 올바로 분석한 대목이다. 그 뒤로 다음의 설문이 이어진다.

‘인터넷 정보를 사용해서 “러-일 전쟁 : 국민적 치욕이냐 아니면 견인(堅忍)의 배움터냐?”라는 테마로 발표하라’(같은 책)

여기서는 ‘인터넷 정보를 사용해서’라는 앞 부분이 중요한 포인트다. 어째서냐 하면, 러시아어로 ‘러-일 전댕’을 검색해 보면, 스탈린이 1945년 9월 2일에 행한 대일 승리 연설이 으레 나오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1904년 러-일 전쟁 때의 러시아군 패배는 국민의 의식 속에 암울한 추억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 오점을 남겨 놓았다. 우리 국민은, 언젠가 일본이 분쇄되어서 오점이 불식될 시기가 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연장자들은 40 년 동안, 그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온 것이다.’

이것을 읽어 보면, 제2차 대전의 일본과의 전쟁이 러-일 전쟁의 복수전이었음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러시아의 교과서 집필자는 이런 점까지 확실하게 계산을 한 끝에 설문을 작성해 놓고 있는 것이다. 복수전이 되고 만 제2차 대전에서의 대일 전쟁 대목에서는 러시아라는 국가의 교활한 부분을 읽어낼 수가 있다. ‘얄타 회담에서의 근본적인 합의에 따라 소비에트 정부는 1945년 4월 5일에 일본과의 중립 조약 파기를 통고하고,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러시아의 역사>)

러-일 중립 조약 파기를 통고하고 있는 터라 일견 정정당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 조약이 이듬해까지 유효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소련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보를 봉쇄해서 일본에 연락이 되지 않도록 책략을 꾸미고서 기습 공격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불난 집의 도둑놈식의 갑작스러운 참전이었던 것처럼 다루고 있지만, 용의 주도한 준비를 했음을 내비치고 있다.

‘8월 19일에 관동군 사령부는 항복할 준비가 있다고 표명했다. 동맹 제국군의 공동 공격을 받아, 1945년 9월 2일에 일본은 완전히 항복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을 내리는 사건이었다. 사할린 남부와 크릴 열도가 소비에트 연방의 손으로 넘어갔다’(같은 책)

마지막에 쓰이어 있는 쿠릴 열도란 지시마(千島) 열도와 북방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다. 러시아에서는 8월 19일이 되고서야 비로소 일본이 항복 준비를 시작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지시마 열도의 최북단에 있는 占守島에, 소련군이 상륙을 시작한 것은 8월 18일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무장 해제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히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전했던 것으로 일본인들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전쟁은 9월 2일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일본령을 공격해서 점령한 것은 통상적인 전투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쿠릴 열도의 점령도 정당화되고 있다.

전후, 러-일 공동 선언 이야기와 북방 영토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약간 있을 뿐, 일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교과서가 역사를 세세하게 기술할수 있는 것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5 년쯤 걸려서 학습할 수 있도록 커리큘럼이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일본처럼 뜀박질로 근현대사를 배우는 나라하고는 이런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시대의 교육을 하는 일본

이번에는 일본의 교과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나는 지금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과거에는 화세다(早稻田), 게이오(慶應) 등에서 연수를 담당했던 경험이 있다. 여기서 세게사의 중요한 항목 ‘러시아 혁명’ ‘진주만 공격’이라든지 ‘소련 붕괴’ 등의 연호(年號)에 관해서 100문의 소테스트를 해 보았다. 그랬는데, 영 아니올씨다였다. 100점 만점에서, 와세다에서는 평균 5.0 점, 게이오에서는 4.8 점이었다.

어쩌다 이런 사태에 빠졌는가. 그것은 일본의 교과서에는 이야기가 없이 단순한 사실과 용어의 나열만이 기다랗게 이어져서, 수험 공부 이외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험이 끝나고 말면, 지식이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사그리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중국, 한국, 러시아 등의 교과서는 독자의 이야기성이 있어서, 읽어 보느라면 매우 재미가 있다. 그런 것이 일본에서는 거대한 연표밖에 없다 보니 읽어 나가기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일본 엘리트 양성 시스템이 후진국성이라는 증명에 다름 아니다. 기억과 그 재생을 더할나위 없이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구시대의 교육이 아니고 무엇인가.

교과서를 놓고 각국의 역사관과 사고법의 포인트를 살펴보았다. 러시아, 중국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하고도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철저한 리얼리즘과 보편성을 지닌 역사를 가르치고, 한국은 독자색이 강해서,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안쪽으로만 향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단순히 연표를 암기시키는 후진적인 역사 교육을 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 교육은 1 년간에 통사(通史)를 공부할 수 있는 암기 중심의 쟁여넣기 유형으로부터 한시바삐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성을 중시하고, 지금보다 분량이 많은 교과서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 교과서를 러시아처럼 여러 해에 걸쳐 배운다는 것이, 앞으로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사고를 익히게 될 유효한 방법이 될 것이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가 가르치는 일본

 

‘청인전쟁 때의 ‘뤼순(旅順) 대학살’

일본군은 뤼순(旅順)에서 가공할 대학살을 벌였다. 일본군은 ‘한 장소에 여러 명의 중국인을 묶어 놓고 창으로 찌르고, 칼로 신체를 자잘한 조각이 날 때까지 저며 놓았다.’ 성 안에서 약 2만 명이 도살되었고, 운 좋게 죽음을 모면한 것은 겨우 36 명이었다. 서양의 저널리즘은 이를 비판하면서 ‘일본은 문명의 옷을 두른 야만스러운 괴수다. 일본은 이미 문명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야만스러운 얼굴을 드러내었다’고 보도했다(<중국의 역사>)

 

‘만주 사변(9.18 사변)’

일본은 이전부터 중국의 영토를 침을 흘려 가며 탐내었다. 1927년 6월, 일본의 수상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는 ‘동방 회의’를 주재하고,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떼어 내어, 스스로를 하나의 구획으로 삼고, 일본의 세력하에 둔다’는 침략 방침을 확립했다. 2 년 후, 자본주의의 세계적 경제 위기가 일본에 파급, 1931년, 일본은 극단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일본 정부는 서둘러 중국의 북동쪽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고, 이렇게 해서 국내 인민의 시선을 딴 곳으로 쏠리게 했고, 계급 모순을 완화했으며, 아울러 중국의 부를 약탈함으로써 경제 위기가 만들어 놓은 상처를 치유하려 했다. (중략)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의 관동군은 남만주 철도의 류타오후(柳條湖) 지구의 궤도(軌道)를 폭파해 놓고는, 중국군이 파괴했노라고 그 죄를 덮어씌우면서, 동북군 주둔지를 포격, 선양(瀋陽)을 점령하면서 ‘9.18 사변을 일으켰다. (중략) 반년도 지나지 않는 사이 북동쪽 3개 성(省)은 모두 일본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일본은 청나라의 폐제(廢帝) 푸이(溥儀)를 도와 괴뢰로 삼고서 거짓 만주국을 세웠다. 중국의 북동 3성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같은 책).

 

‘노예화 교육 추진’

일본 침략자는 점력구에서 노예화 교육을 추진했다. 학교 교육 면으로는, 일본과 괴뢰 정권이 동북의 피점령구에서 초등 교육 단계의 비중을 전체 학습 연한 중에서 가장 크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청소년에게는 노예화 사상을 주입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같은 책)

 

‘3광(光) 정책’

1941년부터 일본은 중국 침략 병력의 반수 이상을 집중, 적 후방 항일 근거지에서 일대 ‘소탕’전을 벌였다. ‘소탕’을 하는 가운데, 일본군은 야만스럽게 불태우고, 몰살하고, 탈취해 대는 ‘3광 정책’(光은 ‘다하다’라는 뜻)을 벌였을 뿐 아니라, 독가스를 뿌리기도 하고 세균전을 벌이기도 하면서 무인 구역을 만들어, 항일 근거지의 소멸을 기도했다(같은 책).

 

‘일본의 무조건 항복’

항일 전쟁의 승리는, 중국 인민이 100여 년래 처음으로 획득한 제국주의 반대 투쟁의 완전한 승리다. 그것은 전국 인민의 민족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크게 증폭해 놓았고, 민주 혁명이 전국에서 승리하기 위한 견실한 기초를 다져 놓았다. 중국의 항일 전쟁은 세계의 반파시즘 전쟁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며, 중국 인민의 항쟁은 세계 반파시즘 전쟁의 승리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중국의 국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같은 책)

 

 

한국의 역사 교과서가 가르치는 일본

 

‘민족 말살 계획’

일제는 만주 사변 이후, 중국 본토로의 침략 전쟁을 확대해 가면서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시키려 했다. 게다가 한국인의 민족 의식을 말살해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 일본의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고등학교 한국사>)

 

‘종군 위안부’

일제는 1930년대 초부터 젊은 여성들을 일본 위안부로서 끌고 가, 성의 노예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청년들을 군대로 몰아내, 전쟁의 준비에 필요한 노동력을 수탈하기 위해 국민 징용령을 실시하고(1939년), 광산과 공장, 비행장 등의 전쟁 시설을 세우는 일에 한국인을 동원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징병, 징용, 여자 노동정신대 등의 명칭으로 한국인을 전쟁터와 군수 공장, 토목 공장, 광산 등으로 데려갔다(같은 책)

 

‘난징(南京) 대학살

(*아이리스 찬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 것인가>에서 인용한 글에 뒤이어) 이 글은 1937년의 난징 대학살을 다룬 책의 내용 중 일부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국민당군을 찾아낸다는 명분으로 노인과 부녀자를 포함한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중국에서는 이 때 희생된 사람이 3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살이 온 세계에 알려지자 일본은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당했다. 저자 아이리스 찬은 중국계 미국인인데, 책이 출판된 후로 일본의 우익 단체로부터의 위협에 시달렸다(<한국의 역사 교과서>)

 

‘전범(戰犯) 재판’

전쟁이 끝난 후, 도쿄에서 전범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이 재판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일본 국왕이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형 판결을 받은 A급 전범 7 명 말고는 전원이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라는 전범은 1950년대에 수상이 되기도 했다(같은 책).

 

‘역사 교과서 문제’

일본 정부는 1990년대 말에 다시금 역사 교과서에서 전쟁 책임 문제 등을 삭제 혹은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동시에 전쟁을 미화하고 군국주의 부활을 기도하는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는 바람에 주변국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같은 책).

 

‘영토 문제’

영토 분쟁도 한-중-일 3 개국 사이에 마찰을 일으키는 중요한 문제다.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尖閣) 제도 : 중국에서는 釣魚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해서 대립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 나라의 영토인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를 분쟁 지역화하려 하고 있다(같은 책).

 

 

러시아의 역사 교과서가 가르치는 일본

 

‘러-일 전쟁의 경과(旅順 공방전, 奉天 회전, 東海 해전)’

뤼순(旅順)은 용감히 저항했다. 방위의 중심 인물은 R. I. 콘드라첸코 장군이다(1904년 12월 2일에 전사). 1904년 가을, 일본군은 요새를 향한 강습에 세 번 착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11월 22일에 일본군은 요새를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 203 고지 탈취에 성공했다. 12월에 관동군 사령관 A. M. 스테셀 장군이 뤼순을 내놓았다. 1905년 2월에는 만주군 역시 펑톈(奉天) 근교에서 뼈아픈 패배를 맛보았다.

역시 러시아로서는 기쁨을 결여한 채로 해상에서도 전투를 전개했다.(중략) 1904년 가을, 발트해로부터 뤼순 구원을 위해 먼저 제2 태평양 함대가, 그 다음 제3 태평양 함대도 출발했다. 극동에 제2, 제3 태평양 함대가 도착한 것은 요새를 내놓은 지 5 개월이 지난 후였다. 러시아 함대는 합류해서 쓰시마(對馬) 해협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1905년 5월 14, 15일) 패배했다(<러시아의 역사>)

 

‘러-일 전쟁의 총괄’

일본과의 전쟁은, 국내에서의 내정 상황의 불안정화에 대해 심각한 역할을 했다. 사회와 민중 모두, 패전을 국민적인 치욕으로 받아들였다. 군사행동의 모든 과정은 다른 강대국과의 경쟁 가운데서 러시아의 이익을 지켜 낼 수가 없다. 상층부의 무능을 확신시켰다(같은 책)

 

‘제2 차 세계 대전에서의 대일본 선전포고’

얄타 회담에서의 근본적인 합의에 따라 소비에트 정부는 1945년 4월 5일에 일본과의 중립 조약의 파기를 통고하고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중략)

이 방면에는 150만 명의 군사와 27,000 문의 대포와 박격포, 5,200 대의 탱크, 3,700기의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비에트군은 군사 행동을 개시해서 단기간에, 무장하고서는 통과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던 싱안링(興安嶺)을 급행군으로 넘어서 적의 배후로 나섰다. 태평양 함대와 아무르 소함대의 함정이, 탱크 부대와 보병 부대를 도왔다. 8월 19일에 관동군 사령부는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표명했다. 동맹 제국군의 공동 공격을 받아서 1945년 9월 2일에 일본은 완전히 항복했다.

이것은 제2 차 세계 대전의 막을 내리게 하는 사건이었다.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千島 열도와 북방 영토)가 소비에트 연방의 손으로 들어갔다.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은 한국 북부와 중국으로 확대되었다(같은 책).

 

‘북방 영토’

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의 호조로운 진전은 일본에까지도 이르렀는데, 여기에 적지 않게 기여한 것이 1991년 4월의 M. S. 고르바초프의 도쿄(東京) 방문이었다. 소비에트의 대표단은 상호 교류를 활발하게 벌일 준비가 있음을 내비쳤고, 영토 문제, 즉 남 쿠릴 4 개 섬의 국유화에 관한 문제의 존재를 정식으로 인정했다(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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