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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의 길 (2017.4.2.)

2017.04.02 14:43

홍목사 조회 수:69

참사람의 길

 

본문: 시편 130:1-8; 로마서 8:5-11

설교: 홍정호 목사 (2017.4.2. 사순절 제5)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덕목을 잘 실천하고 계시는지요? 올해 사순절도 중반을 넘어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가 강조해 온 기도와 금식과 자선을 통해 하느님 중심으로의 삶의 전환이 일어나고, 더욱 공고해 지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보낸 편지, 로마서 8장의 내용입니다. 미국 듀크 대학교의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라는 성서학자는 이 로마서 8장을 두고 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대한 바울의 묵시적 비전이 가장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는 장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지금 여기에 임하는 하느님나라와 장차 맞이하게 될 하느님나라 사이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 땅의 시간에 얽매여 살아가는 존재인 동시에 초월을 지향하며 영원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삶과 영에 속한 삶을 구분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추구하는 이들이 이 땅에서 겪는 갈등과 모순을 표현하고, 이를 통합해 나가는 데 있어 적절한 구분이 되기도 합니다. 땅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없듯, 욕망이라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의 두 발이 중력에 이끌려 이 땅과 맞붙어 있듯, 우리의 삶도 욕망의 중력에 이끌린 채 지속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덧입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중력을 거스르는 존재들, 땅의 구심력에서 벗어나 초월을 지향하는 존재들입니다.

 

2.

 

종교는 인생과의 한판 씨름입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끄는 중력과도 같은, 그래서 언제나 자연스럽고’ ‘바람직한것으로 간주되는 세속의 욕망과의 한판 씨름이 종교적 삶의 본질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교리적 신조에 대한 투박한 긍정이나 세련된 반대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기독교신앙에 있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삶의 다른 차원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믿음은 강을 건너기 위한 배와 같은 것, 큰 바다를 건너기 위한 비행기와 같습니다. 믿음은 삶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여러분, 외국 갈 때 비행기 타고 가시는데,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비행기에 계속 앉아 계시는 분 안 계시지요? ‘우와 이 비행기 진짜 좋다, 어떻게 열 두 시간을 날아오지?’ 이러면서 목적지 도착 해서도 비행기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죠. 왜 이상한 사람인가요? 여행의 목적은 비행기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일상의 다른 차원에 이르러 그 삶을 즐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아무리 좋아도, 그건 여행의 목적이 아닙니다. 여행의 목적은 일상의 구심력에서 벗어난 삶의 다른 차원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믿음을 갖는 이유도 같습니다. 삶의 다른 차원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일상의 욕망이라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다른 차원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믿음을 갖습니다. 믿음 그 자체에 탄복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 삶의 다른 지평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하나님 주시는 복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은 순례에 비유되곤 합니다. 우리는 저 본향에 이를 때까지 믿음의 순례를 계속하는 자들입니다. 건너야 할 강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강을 건너면 또 다른 강이 나타나고, 그 강을 건너면 또 다른 강을 만나 건너가야 하는 것이 순례자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불행히도, 신앙생활에는 끝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정답을 얻고 졸업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갱신해 나가는 과정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강을 건너 삶의 차원에 이르러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삶에 관한 물음이 달라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음의 순례자로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삶의 지평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예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2:20)고 선언합니다. 이 땅에 발붙이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순례의 연속일 뿐, 우리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저 하늘에 속해 있다는 새로운 존재의 선언인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8:9) 우리를 기독교인 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세속의 구심력에 이끌려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세상의 질서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질서와 온전히 하나 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긴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3.

 

사랑하면 닮고 싶고, 가까이에서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은 가혹하게도,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서는 안 되는 이 모순과 긴장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울에게는 예수님에게 없는 복잡한 신학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명쾌하고 쉽게 하나님나라 진리를 밝히는 대신 신학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치기 때문에 그 말이 다소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학이 영어로 theology인데, theoslogos의 결합입니다. theos에 관한 말logos이 신학입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서양전통에서 신학을 ‘logos’의 결합으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왜 하필 logos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세 가지 기술을 말하는데, logos, pathos, ethos가 그것입니다. logos란 이를테면 합리성, 자기기 의견을 논리에 부합하게 설명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한편, pathos는 공감과 소통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 말이 상대방으로부터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가 설득에 있어 pathos의 역할입니다. pathos가 결여된 logos, 상대방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논리는 제아무리 심오한 것이라 할지라도 변화의 능력은 없는 것이죠. 마지막은 ethos입니다. 윤리학ethics이라는 말의 어원이 이 ethos인데, 이것은 말하는 이의 인격이나 인품을 말합니다. 그 말이 논리에 부합하느냐, 혹은 상대방과 소통이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믿을 만한 존재인가 하는 점입니다. logos가 탁월하고, pathos가 넘쳐도, 결국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믿을 만 하지 않으면 그 말은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말 하는 사람의 인품이 믿을 만하면, 그 말은 logospathos가 다소 결여되어 있더라도 변화의 능력을 지닌 말이 되는 것입니다. 논리나 공감능력은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이죠.

 

긴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logos와만 결합되면 유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논리가 아닙니다. 설득의 기술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한 삶에 뿌리내린 실천입니다. 신앙은 logos보다는 pathos, pathos보다는 ethos에 기초한 것이 될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습니다. 쉽게 말하면,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본을 보일 때 그 말에는 힘이 실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logospathos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서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4.

 

바울처럼 말이 아닌 십자가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울의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에 내 마음을 조율하고, 예수의 시선에 내 시선을 맞추고, 그래서 예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사람, 하나님의 영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과제는 세상에서 더 높은 성공을 거두는 데 있지 않고, 예수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십자가의 ethos를 지닌 존재로 날마다 성숙해 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런 삶의 과정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육신에 매여 있지만,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땅의 일들은 때로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주저앉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잠시 낙심하고, 실망한다할지라도 결코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 길은 주님이 앞서 가신 길이고, 십자가 부활의 영원한 생명으로 오늘도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5.

 

참사람의 길은 우리가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갖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여기가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는 순례자로 이 땅을 살아가지만,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의 목적지는 여기에 없습니다. 천국 가는 게 신앙의 목적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여기에 속하면서도 여기에 속하지 않은 자처럼 살아가야 할 이중의 책임이 우리에게 놓여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세속의 욕망에 사로잡혀 모두가 그 길만을 바라보며 달려갈 때, 우리 신앙인들은 다른 길이 있음을 보고, 그 길로 걸어갈 용기를 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다른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겸손의 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과 하나 되지 않고, 세상을 거슬러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지닌 이가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습니다, 아멘을 아무리 외쳐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마음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참사람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을 따라, 그분의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한 주가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