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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은혜 (2017.4.14. 성금요일)

2017.04.17 11:15

홍목사 조회 수:33

망하는 은혜

 

본문: 시편 22:1-11; 요한복음 19:17-30

설교: 홍정호 목사 (2017.4.14. 성금요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하고 대답하였다. 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곳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 제자에게는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오늘 고난주간 성금요일입니다. 목요일 저녁 최후의 만찬에서 부활주일 저녁에 이르는 성삼일(聖三日)은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3일입니다. 지금은 삶과 죽음, 말과 침묵, 절망과 희망이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특히 오늘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래서 웃고 떠드는 것을 삼가고, 음식도 간소하게 먹거나 금식하고, 옷도 소박하게 입습니다. 강단을 장식했던 보와 초도 모두 치웠습니다. 오늘은 연중 가장 애통해야 할 날입니다.

 

1.

 

저는 고난주간 내내 망하는 은혜라는 말을 떠올리며 지냈습니다. 흥하는 것만 은혜가 아니라, 망하는 것도 은혜라는 나름의 각성입니다. 어떤 일이 잘 되는 데에만 은혜가 필요한 게 아니라, 망하는 데에도 은혜가 필요하다는 다소 낯선 생각입니다.

 

기독교신학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누구의 탓인지를 오랫동안 물어 왔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탓이라고도 하고, 로마 식민지배의 하수인들의 탓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미워하고, 빌라도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집어넣어서 지금까지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유대사회의 종교기득권세력과 로마 식민지배세력의 눈밖에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빌라도도 주님을 돌아가시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아니라면 조무래기 병사들이 주님을 능욕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망하게 하신 겁니다.

 

2.

 

일상의 경험입니다만,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일이 될 만한 조건이 무르익어야 하고, 여러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손길이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그 일이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주체적으로 그 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그것은 그렇게 일이지, 자기가 이룬일은 아닙니다. 일이 되려면, 일을 되게끔 만드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우연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제가 여기서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도 셀 수 없이 많은 우연이 조화를 이룬 결과입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우연의 조화를 일컬어 우리는 하나님의 뜻혹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그렇게밖에는 이 우연의 조화를 달리 지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우리가 바라는 일이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대를 갖고 오늘 본문을 보면 참 난감합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아니,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십자가 처형은 결코 일이 조화롭게 잘 된경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잘 안 된 일, 망한 일의 대명사가 아닙니까. 주님을 따르던 이들은 모두 그분을 외면했고, 3년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도망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을 위해 사람들과 더불어 걸어오신 지난 3년여의 시간은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주님의 일은 완전히 망한 셈입니다.

 

누가 예수의 일을 그르쳤습니까? 누가 주님의 일을 가로막고, 그 일을 안 되게 했습니까? 빌라도입니까, 유대 종교지도자들입니까, 로마 병정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밀고한 유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들이 안 되게 했습니다. 권세 있는 그들이 예수의 길을 가로막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그들을 탓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주님의 가심,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 또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되는 일에서만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지, 안 되는 일에서, 망한 일에서 찾으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3.

 

저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안 될 일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안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망해야 할 일 앞에서는 망하는 게 은혜입니다. 망해야 할 일 앞에서 망하지 않으려고 버티지만 말고, 망할 때 잘 망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성숙한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망하는 것도,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처럼 말입니다.

 

되는 일만 은혜가 아니라, 안 되는 일도 은혜입니다. 어떤 일은 뜻대로 안 되는 게 더 큰 은혜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에 눈 뜬 이들은 잘 되는 일 뿐만 아니라, 잘 안 되는 일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일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만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의 주인공이 나와 내 가족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 병사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주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제발 죽이지 말아 달라고,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저는 안 됩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러셨더라면 저는 그분을 제 인생의 구원자로, 스승으로 모시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도 그분은 하나님께로 고정된 시선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던 것처럼, 그분은 죽음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주님이라고 삶의 의지가 없으셨을까요. 주님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이라고 그렇게 허무한 실패로 당신의 일을 끝맺음하고 싶으셨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이 일이 아버지의 뜻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그분은 그때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하셨기에 주님은 순한 어린양처럼 당신의 목숨을 그 포악한 이들에게 온전히 내어 맡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때 주님은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굴복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죽기까지순종하셨습니다.

 

4.

 

실패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지는 번을 배운 적 없는 사람, 좀처럼 실패하지 않는 사람, 높은 데로 올라갈 줄만 알고 도무지 내려오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실은 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기는 길, 올라가는 길, 쌓아가는 길이 아니라, 지는 길, 내려가는 길, 덜어내는 길 가운데 체험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 이러다 망하겠다하는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생각입니다.

 

망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저도 망하려고 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너무 다 알아서 하는 건, 일을 계속 그르치는 것만큼이나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고, 질 때는 깨끗이 질 수 있도록,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래야 내가 스스로 열 수 없는 미래가 우리에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축복 주시겠다는데 마다하는 사람 없는 것처럼, 망하는 은혜를 허락하신다면 그것도 마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망하는 걸 은혜로 여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런 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망하는 것도 은혜라는 건 제 경험과 깨달음에 비춘 신앙고백이지,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 있는 말은 아닐 겁니다. 더욱이 어렵게 고난을 해쳐나가려는 애쓰는 이들에게 망하는 것도 은혜라는 말은 그저 현실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체념하라는 말로 오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남은 살도록 도와주고, 자기는 죽음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드는 삶이 주님의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입니다. 신앙인의 길은 예수의 길을 가는 것이지, 그 길을 역행하면서 남에게 절망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자기는 끝까지 죽지 않으려는 삶이 아닙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망하는 것도 은혜라는 말은 남에게 할 말이 아니라, 자기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어떤 고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되는 것만 은혜 아니라, 안 되는 것도 은혜고, 사는 것만 은혜 아니라, 죽는 것도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마다하셨다면, 죽음의 그 쓴 잔을 마시지 않으셨다면, 부활과 영생도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8:35) 이것이 신앙의 신비, 믿음으로 사는 인생의 비밀입니다.

 

5.

 

벽을 대면하고 서 있는 것 같은 절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잘 해보려고 했던 일이 계속 어긋나는 고통스러운 체험 앞에서 괴로운 날들을 보내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고난이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더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십시오. 실패의 상징인 십자가가 가장 위대한 사랑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스스로 앞길을 열 수 없을 때, 하나님은 뼈아픈 실패를 통해서 새날을 열어 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의 쓴 잔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약할 그 때가 은혜의 때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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