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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로 가자 (2017.4.16. 부활절)

2017.04.17 11:16

홍목사 조회 수:81

갈릴리로 가자

 

본문: 시편 118:14-24; 마태복음 28:1-10

설교: 홍정호 목사 (2017.4.16. 부활절)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님의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에 다가와서, 그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 그 천사의 모습은 번개와 같았고, 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었다. 지키던 사람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떨었고,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고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미국에서는 부활절에 ‘Happy Easter’ 하고 인사를 한다지요? ‘기쁜 부활절입니다. 또 이날에는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은 왜 기쁘고, 축하할 일인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부활의 선포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을까요? 모두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부활의 선포가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불길한 소식이었을 겁니다. 누구에게 기쁜 소식이고, 누구에게 불길한 소식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에 앞서, 부활의 의미를 간략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점검해 보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부활신앙은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복음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제자들이 만질 수 있었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었고, 함께 식사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자유주의신학의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복음서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부활절의 핵심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 입장 다 문제는 있습니다. 먼저, 육체의 부활을 문자주의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 다수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 말씀을 잘 믿어보려고 하는 이들에게도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 문제는 신앙의 걸림돌이 되곤 합니다. 반면에,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지적으로 정직하지만, 실천적으로는 무력하고, 때로 기만적이기까지 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이 빠지는 가장 큰 함정은 지적 허위의식과 교만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 믿는 것이 '믿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을 갖곤 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허위의식에 안주하는 것으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현대성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긴 하지만, 기독교를 실천이 배제된 관념으로 추락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부활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못지않게 폐해가 크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선포는 믿는 자의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정신이 계승되고 실천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날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은 부활의 정신이 아니라, 부활의 ’, 주님의 라고 생각합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드실 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은 현대성의 사유에 힘입은 것입니다. 서양 현대철학,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몸에 관한 철학적 성찰은 인간의 정신을 육체보다 우월하고 본질적으로 간주해 왔던 지난 시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철학에 관한 깊은 얘기를 할 자리는 아닙니다만, 레비나스라든지, 퐁티나 낭시 같은 현대철학자들은 관념이 아니라, 땀과 피와 눈물을 지닌 /로부터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노력에 나섭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말일 수 있겠습니다만, ‘생각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하지 않고, ‘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인식론의 전환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유들에 의하면 그동안 간과되어 온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다시금 중요한 맥락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지성적이라는 인식이야말로 근대 이성중심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역전됩니다. 이로써 몸의 부활을 믿는신앙은 문자주의적 지평을 넘어, 더욱 레디컬한 신앙실천의 지평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무튼 부활신앙의 초점은 육체의 부활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

 

본문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거기에서 이들은 한 젊은 남자와 만납니다. 마태복음은 이 젊은 남자와의 만남을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28:5-7)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길에서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고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28:10) 여인들은 돌아가신 예수님께 향료나 발라 드리려고 무덤을 찾았지만,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셔서, 먼저 갈릴리로 가 계셨습니다.

 

복음서에서 갈릴리는 예루살렘과 대척점에 있는 장소입니다. 갈릴리는 대도시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세력의 장소와 대비되는 주변화 된 공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이 갈릴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거기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1세기 갈릴리의 정치경제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헬레니즘의 수탈 방식에 주목합니다. 헬레니즘 제국의 수탈 방식은 새로운 식민 도시를 건설하거나 재건해서, 그 도시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의 물자를 조공의 형태로 빼앗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활동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헤롯 가문의 왕들은 세포리스를 재건했고,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 티베리아스라는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세포리스는 예수님의 고향이었던 나사렛과 가까운 곳이었고, 티베리아스는 예수님의 선교가 이루어진 가버나움과 갈릴리 호수를 두고 맞은 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도시의 성격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로마 제국의 착취와 그 아래에서 고난당하던 갈릴리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선교 활동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마가와 마태가 전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 앞서 갈릴리로 가 계시면서, 그리로 형제들을 오라고,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고난으로 가득한 땅 갈릴리가 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힘과 권세로 만드는 로마의 거짓 평화의 기만성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하나님의 샬롬이 임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예수의 갈릴리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에도 그 고난의 땅에서 일상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그분의 죽음으로 가장 큰 상심에 절망에 빠져있을 갈릴리를 먼저 찾아가시어, 거기에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맞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그리로 헤롯 안티파스와 총독 빌라도 무리에게는 불길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를 처형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안심했던 이들은 곳곳에서 예수의 부활이 선포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새로운 순교의 각오로 모여들고, 예수께서 행하셨던 치유의 기적을 그들이 행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을 보며 불길함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다는 선언만큼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가 또 있었을까요? 예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평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의 꿈은 죽음조차 막을 수 없다는 믿음의 선포가 부활의 선언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로 기뻐했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갈릴리의 민중들, 몸과 마음이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갈릴리의 가난한 농부와 어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삼중의 착취를 당하던 이들이었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조공을 바쳐야했고, 그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라는 작자에게는 세금과 노동력을 착취당해야 했고, 또 이들 기득권 세력에 기생하면서 이 땅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른바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에게는 십일조와 헌물을 갖다 바쳐야 했던 그들, 길가에 널린 돌맹이 취급을 당하며 살던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했습니다.

 

왜 그들이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기뻐했겠습니까? 자신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인간으로 대해주셨던 유일한 분,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리, 병자, 죄수, 장애인, 성매매 여성 등 그 사회가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보았던 이들도 주님의 부활을 기뻐했습니다. 누구도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신 분, 그런 분을 예수 말고는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께서 살아나셔서 사도들과 더불어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소식이 어찌 복음이 아니었겠습니까! 이제 예수의 길은 성령의 길이 되어, 성령과 동행하는 사도들과 교회에 의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눈물 흘리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고난당하는 이들 편에서 세상의 권세자들과 싸우는 일에 이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있는 사도들과 교회가 나서게 된 것입니다. Happy Easter! 그래서 부활은 기쁜 날, 축하해야 할 날인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난 줄 알았던 예수의 꿈이, 부활과 더불어 고난당하는 모든 이들의 꿈이 된 날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4.

 

부활의 어제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의 사건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세계의 갈릴리,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난의 땅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의 폭력과 지배에 맞서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곳에서, 거기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예수처럼 자기 목숨을 던져 애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주님의 부활은 어제의 일이 아닌 오늘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아직 고통이 끝나지 않은 곳, 눈물이 마르지 않은 이 땅의 갈릴리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로 3주기가 되는 세월호 9명의 미수습자들과 그 가족과 함께, 부활하신 주님은 시리아 화학무기 공격으로 피를 토하며 죽은 수십 명의 어린이들과 무고한 마을사람들과 함께, 부활하신 주님은 저 남대서양 바다에 침몰한 스텔라데이지호 22명의 실종자들과 애끊는 가족들과 함께, 거기에서 울고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보다 앞서 갈릴리에 가 계십니다. 그분은 고난의 자리에 앞서 가시어, 거기에서 우는 이들과 함께 울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새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무덤은 비었고, 그분은 살아나셨습니다. 무덤 앞에서 경배를 드리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도 주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계신 곳,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 계신 곳, 갈릴리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그곳은 어디입니까? 눈물 흘리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 사회의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주장하며 그들의 곁이 되어주고, 말을 잃어버린 이들의 입이 되어주는 곳, 그곳이 우리 시대의 갈릴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간절히 바라기는 주님의 부활이 그들의 기쁨이 아닌 우리의 기쁨,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쁜 이 부활절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이 절망의 땅을 희망의 자리로, 하나님의 참 평화의 열매가 맺히는 옥토로 일궈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한 주간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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