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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본문: 시편 116:1-19

설교: 홍정호 목사 (2017.4.30. 부활절 제3/봄철 야외예배)

 

[주님, 주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기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니, 내가 평생토록 기도하겠습니다.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얽어 매고, 스올의 고통이 나를 엄습하여서, 고난과 고통이 나를 덮쳐 올 때에,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간구합니다. 이 목숨을 구하여 주십시오하였습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주님은 순박한 사람을 지켜 주신다. 내가 가련하게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 주님,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때, 몹시 두려워,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하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서원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루겠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조차도 주님께서는 소중히 여기신다. 주님, 진실로,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나는 주님의 종, 주님의 여종의 아들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결박을 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께 감사제사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서원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루겠습니다.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서 주님의 성전 뜰 안에서, 주님께 서원한 것들을 모두 이루겠다. 할렐루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예배당 문을 닫고, 온 교인이 밖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올해로 네 번째 신구식물원에 오는데, 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네요.

 

1.

 

여러분, 우리교회가 왜 일 년에 한두 번 주일에 예배당 문을 닫고 야외예배를 드리게 되었는지 이유를 아니나요? 저는 왜 이런 전통이 생겼는지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저 이 목사님과 손 목사님께서 해 오시던 일이라 별 뜻 없이 목회계획에 포함시켜 이를 실행해 왔습니다. 솔직히,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봄가을 야외예배의 의미가 우리교회의 개방적인 신학적 지향의 한 표현이겠거니, 꽃과 단풍 좋을 때 답답한 예배당을 벗어나 예배를 드리자는 정도의 의미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향린동산 별장에서 야외예배를 드리던 시절에는 그저 교인들끼리 일 년에 한두 번 모여 바비큐 파티하면서 친교 하는 정도 이외의 야외예배의 별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예배당 문을 닫으면서까지 여기에 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품어왔던 게 사실입니다.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할 수 없는 교인들도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 창립기념주일 예배를 준비하면서, 저는 이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지 올해로 9년 만에 야외예배의 의미를 제 나름대로 찾았습니다. 그것은,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본래의 뜻이 사라진 채 하나의 의례로 굳어진 예배에 생기를 불어넣은 사건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발견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야외예배의 초점은 선교활동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래된 교회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저는 우리교회가 일주일에 단 한 번 뿐인 예배를 교회에서 안 드리고, 이렇게 밖에 나와 드리게 된 이유가 선교활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80년대 고아원이나 농촌교회 등을 방문하여 거기에 계신 분들을 정성껏 돕고, 그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야외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교인들 간의 친교는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였지 야외예배의 주목적은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밖에는 예배가 없으니, 외진 곳까지 찾아가 돕고 함께 예배드리려면 불가피하게 예배당 문을 닫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일을 위해 여선교회에서는 바자회를 열고, 필요한 물품을 모았습니다. 여선교회가 앞장서서 바자회 등을 열어 선교기금과 물품을 마련하고, 그것들을 전달하는 목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온 교인이 방문하여 거기에서 그분들과 더불어 예배드리고 친교하기 위해 우리가 일 년에 한두 번 예배당을 떠나, 이렇게 바깥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맞습니까?

 

2.

 

만약, 야외예배의가 이렇듯 소외된 지역을 방문하여 그들과 더불어 예배드리는, 선교와 친교가 어우러진 활동이라면 일 년에 한 번만 아니라, 매주일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라면 말입니다. 이렇게 지역을 방문하고, 선교비를 지원하고, 물품을 보내고, 때로 온 교인이 함께 참여하면서 보람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비이고, 예수님의 복음적 삶을 닮은 실천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뚜렷한 복음적 지향과 선교적 목적을 지닐 때에 우리교회가 추구해 온 자유로운 신앙이 알찬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십년에 가까운 시간을 돌아보건대 우리의 야외예배는 처음 뜻에서 적잖이 벗어난 것 같습니다. 야외예배에서 선교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사라지고, 교인들끼리 친교 하는 게 주목적이 된 반쪽짜리 실천으로 이 야외예배가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야외예배가 이렇듯 본뜻을 잃어버리고 반쪽짜리 실천으로 전락한 데에는 무엇보다, 그리고 누구보다 목회자인 저의 책임이 큽니다. 여러 갈등들을 우려해서, 그저 해 오던 일을 무의미하게 답습하는 정도에서 지난 시간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뜻이 야외예배 안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제가 게을리 한 탓입니다. 해서, 오늘을 계기로 저부터 회개합니다. 내년부터는 야외예배의 본뜻을 살려, 선교와 친교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예배가 되도록 장로님들과 운영위원회와 협의하여 목회계획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간이 연약한 이들과 더불어 더욱 즐겁고 뜻 깊은 예배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시인은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노래합니다. 그는 인생에서 큰 고통을 겪은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죽음의 올가미에 얽매이고, 죽음보다 더한 지옥의 고통에 사로잡힌 채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했던, 큰 고난과 고통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고난과 고통은 이미 편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마음에 쌓인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 다른 이에게 다 털어놓을 수 없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의 고백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고난당하는 이들의 공통의 고백입니다.

 

그런 그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8) 그는 죽음과도 같았던 고통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기라고 한 것일까요?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은 여기에 없습니다. 대신 시인은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경험, 받아들임의 체험입니다.

 

그가 겪은 큰 시련은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두려움과 의심을 그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의 불행은 너무나도 큰 것이어서, 두려움과 의심은 그의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것만큼 큰 불행이 있을까요? 타인을 잠재적 협력자가 아닌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가 아닙니까? 반복되는 거절의 체험, 두려움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확고한 자기방어벽을 세우게 만든 것입니다. 그 벽이 고립을 자초하는 벽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4.

 

그러나 시인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체험을 합니다. 바로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는주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이 체험이 왜 그를 변화시켰을까요? 달랐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만나는 체험이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만나 그가 자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자기 몫의 짐을 그들에게 떠넘기려는 순간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짐을 대신 짊어지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만나는 체험은 정반대의 경험을 그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무거운 짐을 넘겨드리는 순간, 하나님과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며 고난과 고통 속에서 날선 마음으로 살아가던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임의 체험, 구원의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받아들임의 체험이 그로 하여금 삶의 고난과 고통을 대면하는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든 것입니다.

 

성도들의 죽음조차도 주님께서는 소중히 여기신다.” 시인은 이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지금 하는 일을 망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던 삶으로부터 이제는 사나 죽으나, 심지어 성도들의 죽음조차도소중히 여기시는 주님과 만나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린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던 그는 이제 든든한 삶의 반석을 만났습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을 든든한 중심이 그에게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 노래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13) 두려움의 잔, 고통의 잔, 절망으로 가득 찬 잔을 내려놓고, 구원의 잔을 손에 들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제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자기를 온전히 내어맡김으로써 참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으며,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5.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계신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당 밖으로 나와 자연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있는 분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귀하다는 사람을 만나려 해도 예를 갖춰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 뵈옵기를 바라면서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뵙기를 바랄 수야 있겠습니까. 만날 만한 때와 만날 만한 장소에서 그분을 뵙기 바라야 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주님 계신 곳으로 우리가 가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 곁에 계신 주님께 우리가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돌보실 때 우리도 돌봐야 합니다. 이 일이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고, 주님을 뵙기 원하는 이들의 참된 바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손에 구원의 잔을 들려주셨습니다. 세상이 끊을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이 믿음 가지고 한 주간도 우리의 이웃을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이끌어내는 일에, 복음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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