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본문: 시편 23:1-6; 사도행전 2:42-47

설교: 홍정호 목사 (2017.5.7. 어린이주일)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어린이는 줄고 어버이는 늘고 있다고 하는데, 교회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신앙 안에서 건강히 자라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해 주시고 더 많이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감리교회가 어린이주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은 어린이들이 약자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돌봄과 사랑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섬김으로써 연약한 이들을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복을 나 혼자 다 누리고 사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복은 헤아려 감사하면서, 자기보다 못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손을 펴는 사람이 구원 받는 믿음의 사람, 참된 신앙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린이주일은 일 년에 하루입니다만,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매주일이 어린이와 같은 이들을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익히는 날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하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모든 신자들에게 익숙한 시입니다. 예배는 공동체의 고백입니다. 한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같은 말씀을 경청함으로, 한 마음으로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는 언제나 우리의예배이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떠난 신앙인이란 물 밖으로 나온 고기와 같습니다. 그 공동체가 교회이든, 혹은 교회같은곳이든,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 기댈 만한 언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두 발이 어디에 있느냐, 누구와 같은 땅을 딛고 있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어떤 공동체에 몸담고 있느냐, 하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 이들과 함께 우리의예배를 드리느냐가 나의하나님 체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의예배는 동시에 나의예배이기도 합니다. 태어나고 죽을 때 혼자가 아닌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혼자가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하나님에 대한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의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체험과 고백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러분의 나의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시인은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하고 고백합니다. 시인의 나의하나님은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을까요? 여러분은 부족한 게 없으십니까? 모든 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게 현대인의 삶 아닌가요? 시간과 돈과 건강, 이 셋 중에 하나는 항상 없다고 합니다. 시간과 건강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과 건강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도 있고 돈도 있으면 건강이 없답니다. 자족함이 없는 사람에게 불평거리는 많고도 많습니다. 불평도 습관입니다. 자꾸 하다보면 불평도 늡니다. 불평만 습관이 아니라, 감사도 습관입니다. 자꾸 감사하다보면 감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일상의 구석구석을 감사로 채우는 사람이 됩니다.

 

2.

 

주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부족함 없게 하시는 분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건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허락된 것에 감사하면서, 오늘을 선물로 여기는 마음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한 탓에 뜻을 세우지 못해서 그렇지, 믿음을 가지고 뜻을 세우면 하나님은 협력하여 그 뜻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심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뜻은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비로소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세우는 뜻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선한 목자, 부족함이 없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건 하나님의 때와 방법에 따라 뜻을 세우지 않고, 내 뜻과 방법에 따라 세우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대로 행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 탓을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기나 한 것이냐며 볼멘소리로 불평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가짜 믿음입니다.

 

지난 달 우리교회에 모신 고진하 목사님을 통해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소개받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는지, 신이 가느다란 명주실로 잡아당기는 대로 기꺼이 따라가는지, 순리로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고진하, “신은 우리를 명주실로 당기신다,” 중앙선데이, 2016.9.4.)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끊어지기 쉬운 가느다란 명주실로 우리를 묶어서 잡아당기신답니다. 우리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코너로 몰아가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하도록 만드는 그런 가학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인내와 사랑으로, 자비와 권면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 그분이 명주실로 우리를 당기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분의 뜻 안에서 행하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몸과 정신의 감각이 무뎌지지 않도록, 깨어 그분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명주실로 이끄시는 분이라면,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려고 해도,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으신 겁니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시려고 해도, 그길로 가지 않으려고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안 보이시는 하나님, 저 멀리 계신 철학적인 개념에 머무는 에 불과한 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의 하나님, 특히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그런 철학적 관념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양떼를 푸른 초정으로 인동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목마를 때 우리를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3.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한결같이 선한 목자이신데, 우리가 양이였다 늑대였다 한다는 데,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되곤 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을 탓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닙니다. 도대체 어디에 계시느냐고,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시느냐고 하나님을 힐난하는 건 이 자유의 과잉 시대에 어울리는 문제제기이긴 합니다만, 자기 존재의 자리를 망각하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입니다. 남이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목자가 아니라 목자를 자기 뜻대로 쥐락펴락하려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무리가 언제나 문제입니다.

 

20세기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값비싼 은혜를 구분하면서, 오직 값비싼 은혜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죄인이 아닌 죄를 용서합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하나님은 연약한 죄인인 우리 모두를 다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보장받았으니 무슨 일을 해도 안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거짓 위로와 평안의 종교가 말하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값비싼 은혜는 죄가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시는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용서받은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은 안심하고 죄를 짓는 대신 죄와 싸우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죄와 싸우는 길이 험난하여도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의지하여 죄와 담대히 싸워나가는 사람, 그가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 값비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와 싸울 마음이 없는 죄인에게,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라갈 마음이 없는 기독교인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값비싼 은혜만을 은혜로 여기는 이에게, 죄와 싸우는 죄인에게,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5:11-12) 오해하지 마십시오. 남들에게 박해를 받는다고 다 예언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남들이 나를 박해한다고 자기를 예언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최악의 자의식은 없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자기 혼자 역주행을 하면서도 나는 고독한 예언자라고 생각하는 건 정도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생각입니다.

 

방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가다가 박해를 당할 때만 그는 예언자이고, 주님께 받을 상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시선과 무관하게 자기 뜻대로 싸워야할 를 정해놓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열심 있는 사람이긴 하겠습니다만, 예언자와는 무관한 사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직 성서가 말하는 진리의 한길로 걸어가는 사람, 예수님의 발걸음을 바짝 쫓아가면서 그분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만이 주님께 받을 칭찬이 있는 사람입니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인의 이 고백은 값비싼 은혜를 경험한 이들, 주와 더불어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이들에게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죄와 싸울 마음이 없는 이들,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자기와 싸우지 않는 이들은 이 시인의 고백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아니, 얻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값싼 은혜, 거짓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 전하는 모두의위로는 값싼 은혜를 파는 종교상인의 일, 종교를 상품으로 구매하는 종교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일일 뿐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는 아닌 까닭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길을 따라가다 지치고 낙심한 이들을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죄와 싸우는 길에서 원수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를 당신의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시는 분, 그분이 선한 목자이신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입니다. 예언자는 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주님께 받을 환대의 몫이 큰 사람입니다. 그는 사망의 골짜기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가신 길이라면 피하지 않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의 삶 가운데에서 이미 당신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과 위로 안에서, 우리는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습니다.

 

5.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과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나요?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시다가, 시몬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17) 이후로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21:22) 본회퍼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 이 두 번의 걸친 부르심 사이에 놓여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인으로 사는 삶의 처음과 마지막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거짓 위로와 평안이 아닌, 하늘의 참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분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시인의 이 고백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를 따라, 예수와 더불어 나와 우리의 삶이 잔치가 되는 기적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한 주간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 위로와 평안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43 공생(共生)의 길 (2017.7.23.) 홍목사 2017.07.23 84
742 순례자의 길 (2017.7.16.) 이원로 2017.07.17 76
741 문화종교를 넘어서 (2017.7.9.) 홍목사 2017.07.09 181
740 주님을 모시는 사람 (2017.7.2.) 홍목사 2017.07.02 86
739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017.6.25. 청년헌신예배) 이원로 2017.06.26 100
738 희망의 사람 (2017.6.18.) 홍목사 2017.06.18 102
737 주님의 대사 (2017.6.11. 삼위일체주일) 홍목사 2017.06.12 76
736 성령으로 충만하게 (2017.6.4. 성령강림절) 홍목사 2017.06.04 85
735 그들도 하나 되게 (2017.5.28. 승천주일) 홍목사 2017.05.28 83
734 사탄을 이기는 사랑 (2017.5.21.) 이원로 2017.05.22 96
733 누구의 자녀인가 (2017.5.14. 어버이주일) 홍목사 2017.05.15 83
»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2017.5.7.어린이주일) 홍목사 2017.05.08 79
731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2017.4.30.야외예배) 홍목사 2017.05.01 94
730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교회의 중심 (2017.4.23. 창립 35주년 기념주일) 이원로 2017.04.23 92
729 갈릴리로 가자 (2017.4.16. 부활절) 홍목사 2017.04.17 81
728 망하는 은혜 (2017.4.14. 성금요일) 홍목사 2017.04.17 72
727 겟세마네의 기도 (2017.4.9.) 홍목사 2017.04.10 82
726 참사람의 길 (2017.4.2.) 홍목사 2017.04.02 85
725 참으로 눈 뜬 사람이고자 (2017.3.26.) 홍목사 2017.03.26 107
724 빌라도의 판결 (2017.3.19.) 이원로 2017.03.21 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