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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자녀인가

 

본문: 요한복음 14:1-14

설교: 홍정호 목사 (2017.5.14. 어버이주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이며, 감리교회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날이기도 합니다. 전직 대통령의 탄핵으로 갑작스레 치러진 선거전이 끝나고 41.1%의 득표율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결과를 두고 여느 때처럼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민낯으로 드러난 한국사회의 부조리에 큰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리더십이 우리사회 오래 쌓여온 폐단들을 청산하고 깨끗한 나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기대보다는 냉소에 찬 시선으로 여당세력과의 일전을 벼르고 있는 듯 보입니다.

 

기독교인은 성서에 입각한 시선으로,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의 그 어떤 정치세력도 기독교인들의 무조건적 지지와 반대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되든 주권을 위임받아 정치 일선에 나선 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세상,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열어가도록 약자들의 편에서 이를 요청하고, 격려하며, 비판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1.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인으로 일곱 차례나 뽑힌 피에르 신부님(1912-2007)정치는 사람을 분리시키지만 연대행동은 결합시킨다.”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젊은 시절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피에르 신부님은 전후 빈민과 노숙인들 위한 환대의 집 엠마우스를 설립하여 일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제몫의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연약한 이들과 더불어 하나님나라를 일구는 삶을 살다 94세로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 가운데 제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있지 않은 믿음은 불 꺼진 등대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종류의 믿음이든, 그것이 정치경제적 체제에 대한 믿음이든 종교적 신념체계에 대한 믿음이든지 간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말씀의 생명력이 그 안에 있지 않은 믿음은 거기에 있으나 마나 한 불 꺼진 등대에 다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피에르 신부는 말합니다. “유일한 신성모독은 사랑에 대한 모독뿐이다.”

 

신성과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체계들이 있습니다. 절대화된 우상의 지위를 누리는 신념의 체계들이 우리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채 사람들의 생각과 도덕관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피에르 신부님에 따르면 종교적 신념체계를 포함하여, 그런 모든 종류의 신념체계에 대한 도전은 신성모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을 모독하는 것만이,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만이 신성모독이 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분은 신자와 비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는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숭배하는 자타인과 공감하는 자의 구분이 있을 뿐이랍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랍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을 뿐이랍니다.

 

엠마우스는 공동체를 찾아 온 이들에게 신자세요, 교회에 다니십니까? 우파세요 좌파세요? 투쟁가이십니까 협력가이십니까?”하고 절대로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이렇게 물었답니다. “배고프세요? 졸리십니까? 샤워를 하시겠습니까?” 그 다음에 미사에 가든지 다른 모임에 가든 그건 전적으로 자유에 맡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실천이 가능하겠습니까? 역설적이게도,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입니다. 모든 사회정치경제적 신념을 상대화하는 가운데에서도 사랑 가운데 있지 않은 믿음은 불 꺼진 등대와 같다는 신앙의 신념만큼은 버리지 않고 굳게 붙잡고 살았기에 사람을 이념과 지역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이런 급진적 실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결국 사랑의 힘을 믿는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뽑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우리 각자가 사랑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불 꺼진 등대들을 세우는 일에, 그 안에 빛이 없는 공허한 건축물들을 우리 삶 곳곳에 세우는 일에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불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의 빛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사랑 없는 세상에 사랑의 사도로, 평화 없는 세상에 평화의 일꾼으로, 정의가 유린당하는 세상에 정의의 파수꾼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2.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신 후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한 마디로 시작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주님께서 앞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3:38b)는 말씀의 무게에 제자들이 눌려있다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었을까요? 주님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6-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니 무슨 말씀인가요? 도마의 의심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빌립이 한술 더 떠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8)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9-10a)

 

주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길을 이미 알고 있으며,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을 이미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다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제가 공동번역으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잘 들어보시고 차이점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 53-12(공동번역)

 

 

다른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모든 행복이 미래 시제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와 마지막 행복만 현재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첫 번째 행복이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마지막 행복입니다. 다른 행복의 약속들은 미래에 성취될 것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의 행복은 미래가 아닌 지금 누리는 행복입니다. 누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인가요? 자기가 가진 것을 늘 나누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인가요? 힘센 자가 약한 이를 억누르려할 때 그 앞을 가로막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늘나라를 사는 이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당신이 어디로 갈지 이미 알고 있으며,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을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계실 때, 갈 곳 없고, 병들고, 제때 먹지 못하고, 감옥에 갇히고, 온갖 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그들과 거기에서 그들과 더불어 새날을 열어 가실 때, 너는 이미 나의 아버지를 보았다고 주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그렇게 살아오셨듯이 이제 부활하셔서도 그 길로 가실 것이라고 주님은 도마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3.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의 신비는 육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체 안에 머물러 있지도 않습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육신에 갇힌 옛 생명으로부터 부활의 새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입니다. 부모님의 자녀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육신의 부모님이 있고, 부모님 덕에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모님에게서 났든 기독교인인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거듭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에 동참하며, 옛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옛 생명을 좀 교정하고 수선하고 더 나은 생명으로 개선되기를 바라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 부활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가 그리스인이요,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기독교가 세속의 도덕관념과 동일시되거나 그것에 대한 실천으로 간주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기독교인들도 효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유가 다릅니다. ‘부모공경이라는 도덕관념과 신앙을 동일시해서가 아니라, ‘부모공경이라는 실천이 이웃을 돌보는 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 가족이야말로 긍휼과 자비의 대상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 지구 반대편에 있는 모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고 힘든 일은 지금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는 사람, 같은 공간에서 서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들도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인정하면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이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부활의 새 생명을 입은 사람의 일입니다.

 

주님은 누구의 자녀이셨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의 자녀로 나신 주님은 또한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입니다. 그분을 만난 이들은 그분과 온전히 하나이신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자녀입니까? 우리를 만난 이들은 우리를 통해 누구를 봅니까? 주님을 만난 이들은 그분을 통해 마리아와 요셉이 아닌,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부모님을 보았다면 그분은 나사렛의 가난한 청년에 불과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들은 그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와 만나 진리이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사랑이신 하나님과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이편저편을 가르고, 서로를 정죄하고, 인정욕구와 이기심에 물든 세상 한가운데에서, 주님은 당신이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심으로,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신 하나님으로 교회에 의해 고백되고 있는 것입니다.

 

4.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주님 곁에 있다고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나도 하고,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을 나도 사랑해야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압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주님의 이 말씀은 믿을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믿을 것을 강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하나님나라를 일구나가시는 그 일이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는 일임을 보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어떤 이들은 그 길을 가로막으며, 온갖 비난의 말로 예수의 길을 훼방할지라도, 주님께서 가고 계시는 이 길이야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길,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길임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버이주일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 드러나기를 희망하는 날, 우리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웃 가운데 드러나기를 희망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청은 기독교인들에게 당신들이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세상 사람들의 요청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행실로, 사람들이 그어놓은 온갖 경계를 뛰어넘어 인간을 사랑하는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것만이 이 믿음 없는 시대에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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