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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하나 되게

 

본문: 시편 681-10; 요한복음 17:1-11

설교: 홍정호 목사 (2017.5.28. 승천주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나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승천주일입니다. 승천주일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과 함께 계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남기시고 하느님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일은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도들과 교회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예수님과 만나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했던 이들은 이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제자들과 교회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성서의 증언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입니다. 승천에 관한 성서의 증언도 각기 다릅니다. 우선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들려 올라가셔서,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6:19)고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승천에 관한 증언이 부활 목격 증언과 더불어 빠져 있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승천에 관한 기록이 아예 없습니다.

 

한편 같은 저자에 의해 기록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도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서로 다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일에 베다니에서 승천하셨다고 전하는데, 사도행전에서는 부활하신 후 사십 일 후에 올리브 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격려하시다가 그들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하늘로 들려 올라가셔서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은 사실관계에서 어긋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요새 종편에서 유행하는 팩트 체크(fact check)를 하면 다 거짓말로 드러날 것들 천지입니다.

 

2.

 

그러면 성서가 사실’(fact)이 아니라고 해서 거짓’(false)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이점에 대해서는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성서를 읽을 때에는 문자가 아니라 글을 읽어야 한다는 말씀을 재차 드립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문자가 아니라 글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갖춰야 합니다. 나아가 글의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성서를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안목 없이 성서를 읽으면 차라리 안 읽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잘못된 자세로 운동 열심히 해서 그 자세로 굳어지면 나중에 고치기 더 힘들지 않습니까? 성서를 문자주의적 자세’(attitude)로 읽는 습관이 굳어지면 웬만큼 노력해서는 돌이키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건 이제 어디에서나 부활하신 주님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말뜻에 다름 아닙니다. 그가 선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 서는 사람, 그 사람의 삶 속에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은 그 아래 있는 이들을 가르거나 배척하지 않고 넓은 품으로 품어 안습니다. 개신교에서 하느님을 하나님이라고 읽고 쓰는데, 하나 밖에 없는 님이라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 되게 하시는 님이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 되게 하시는 님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일천한 경험과 이해에 따라 사람들을 이리 가르고 저리 가르지만, 하나님은 왜 하나님이신가 하면, 그렇게 이리저리 갈라놓은 이들을 큰 품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님이시기에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에 오르신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란 하나 되게 하시는 님 안에서 사는 삶, 이편저편을 가르고 배척하고 적대하던 삶으로부터 회개하고 돌이켜, 더불어 화해하고 품어 안고 환대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하늘 아래 모든 이들을 품으시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니, 우리도 주님 계신 곳을 바라보며 넓은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을 대해야 한다는 말뜻입니다.

 

3.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17:1) ‘때가 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돌아가실 때가 가까웠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 사명을 완수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주님은 영광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어쩌면 이렇게 당신의 죽음을 담담히 맞이하실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주님처럼 이렇게 죽음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이시라고 생에 대한 미련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담담히 죽음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분의 삶 전체가 아버지의 뜻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마치 문지방을 넘나드는 것과 같았습니다. 문지방은 안방과 마루를 나누고, 이쪽과 저쪽을 나누지만, 가로막혀 있지 않은 열린 경계입니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언제든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고, 여기에서 저기를 볼 수 있는 그런 열린 경계가 문지방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에게는 여기에서의 삶이나 문지방 너머 저기에서의 삶이나 다 아버지 안에 있는 삶이라는 데 있어 차별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 함석헌 선생님의 1969년 요한복음 강연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어 처음으로 그분의 육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전체를 듣지는 못했는데, 중간에 이런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나중에 복 받고 천국 가고 어떻게 될 걸 기대하고 믿는 건 하나님 믿는 게 아니다. 이걸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 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이걸 믿는 것이다. 허망하다, 허탈하다 이런 말은 하나님 믿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다. 그건 여기에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니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지, 하나님께 다 맡긴 사람은 나중 결과에 상관없이 지금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글로만 읽다 그분의 생생한 육성으로 들으니 울림이 컸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결실을 지금 여기에서 다 맛보려고 하니까 조급증이 나고, 불안이 생기고, 안절부절 하게 되고, 작은 것 하나도 놓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 그 일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지금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 그것이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 대체로 낙심하기 쉽습니다. 낙심과 염려에 빠져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나중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우리에게 맡겨 주신 그 일을 믿음으로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셔서 매순간을 그렇게 살아오셨기에, 생의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도 담담히 아버지께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4.

 

그런데, 이렇게 온전히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살아오신 주님에게도 한 가지 큰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겨진 제자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이르셔서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6), 그분의 남아 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7: 9,11)

주님은 마치 어린 자식들을 남겨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는 젊은 아비처럼, 이 덧거친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마지막까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갈팡질팡하며 진리의 길에 굳게 서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버지께 기도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17:9)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시면서 남은 이들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전에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네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10:16)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잘 따르는 착한 양떼만을 양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양들을 대하시는 태도입니다. 무리에 속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그분에게는 똑같이 중요합니다.

 

서양의 어떤 철학자는 말하길, 그리스도교의 사목(목회)활동이 오늘날 근대복지국가의 모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로마의 정치는 전체를 통치하는 데 초점을 두고 부분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긴 반면, 히브리전통에 입각한 그리스도교회의 통치는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살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위해 한 마리의 희생이 불가피할 때도 있지만, 한 마리를 위해 아흔아홉 마리가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사목활동은 끊임없이 상기시켜왔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도 우리에 속한 양들만큼 중요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실 때를 앞두고 주님은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5.

 

승천주일 말씀을 앞에 두고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내가 쳐 놓은 담장 안에 있는 이들만을 친구로 여긴 것이 아니었는지. 내가 쳐 놓은 좁은 울타리 바깥에 여전히 내가 친구로 삼아야 할 이웃은 없는지.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교회의 담장 바깥에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남이 아닙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님 안에서는 남이 없습니다. 남을 남이 아닌 이웃으로 대하는 마음, 그 마음이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편을 가르고 상처 입히고 적대하는 이 땅으로부터 눈을 들어 주님 계신 저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고요해진 마음으로 이 땅과 이웃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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