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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충만하게

 

본문: 시편 106:1-5; 사도행전 2:1-13

설교: 홍정호 목사 (2017.6.4. 성령강림절)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매주일 아침마다 여러분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만, 주변으로 조금만 눈을 돌려도 우리는 평화 없는 세상의 현실과 마주합니다. 지난 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의 외교공관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 테러가 일어나 90여명이 숨지고 460여명이 다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또 그 전주인 522일에는 영국 맨체스터 아레나의 한 공연장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22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다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이른바 소프트 타깃(soft target)’이라는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행위였고, IS(이슬람국가)가 배후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은 더 큰 문제입니다. 이민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고, 그들을 이웃이 아닌 잠재적 적으로 보는 시각이 일상화되고 있는 현실은 정말 우려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을 감고 평화를 말한다면 몰라도, 현실에 눈을 뜨고서도 평화를 말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눈을 뜨고 평화를 말하는 것의 어려움을 생각하다 문든 서준식 선생의 옥중서한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이분은 1971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긴 시간 옥고를 치루고 나온 인권운동가입니다.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는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서준식, 옥중서한, 야간비행, 2002, 569.)

 

2.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큰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같은 분을 처형하는 악한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한편, 그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속에서 두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20:19)고 말합니다. 예수의 처형으로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곳인지를 경험하게 된 제자들은 이전의 열정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을 따라 생명과 평화가 넘실대는 하나님나라를 이뤄나가겠다던 그들의 위대한 꿈과 열정은 냉소와 환멸,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b) 주님은 평화 없는 세상에 절망하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시어, 그들을 다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런데 그냥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20:22) 말씀하셨습니다. ’, ‘바람’, ‘을 지칭하는 헬라어가 바로 프뉴마’(πνεμα)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거룩한 숨을 받으라, 거룩한 바람, 거룩한 영을 받으라는 의미와 통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건 예수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불어넣어주시는 생명의 숨을 들이마심으로써 생기를 갖게 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까? 낙심하고 절망하여 주저앉은 자리를 그만 털고 일어나 하나님나라를 위해 가던 길을 계속 가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한 그분은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약속이 아니겠습니까? 평화는 순진한 이들이나 말하는 것이라고,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인간은 모두 그렇고 그런 존재라는 그 깊은 냉소와 절망을 거두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함께 길을 가자는 강권하심이 아니겠습니까?

 

한 인간 존재를 면밀히 관찰하면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깊이 사색하면서도 단순 소박함을 잃지 않고,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도 낙천적이고, 세상의 악과 부정의에 맞서면서도 적개심과 원한을 품지 않는 사람. 그가 누구입니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예수의 숨결로 그 존재를 가득 채운 사람입니다. 그는 눈을 뜨고 살면서도 평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안다고 돌아서는 사람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다가서는 진리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인간적인노력으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고, 교양을 쌓고, 풍부한 사회경험이 있다고 해서 진리의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남들보다 좀 더 알고,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경험했기 때문에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아예 진리를 떠난 사람이 되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진리 같은 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죠.

 

3.

 

신앙도 그렇습니다. 문자주의적 믿음이 헛되다는 걸 알아서 신앙을 떠나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알았으면 안 만큼 더 충실히 책임을 감당하는 길에 나서면 좋을 텐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알기 때문에, 남들이 못 보는 걸 보기 때문에 신앙을 경시하면서 저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간혹 어떤 분들은 눈 감고 믿는 게 편하지, 눈 뜨고 믿기가 참 힘들다는 한탄 아닌 한탄을 제게 하곤 합니다.

 

가나안 교인이니 하는 그런 분들이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십수 년 사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사실 서구교회에서 이런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계몽의 시대를 지나면서 이성, 개인, 주체성 등을 강조하고, 거기에 다원적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까지 자리 잡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 주장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유럽에서 영향력을 점차 잃고 지구촌 남반부 국가들로 중심을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위기의식을 갖고 서양 기독교인들이 뒤늦게 눈을 돌린 주제자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에 관한 논의는 계몽주의적 신학의 유산 아래에서는 미신이나 신화적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성령(체험)에 관한 논의는 이른바 엘리트 신학교육을 받은 주류 신학자들보다는 느슨한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 교회 내에서 오랜 차별을 받아 온 여성들과 주류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일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곤 했습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이들은 좋은(?)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체험을 중시하는 비주류에 속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신학교육의 영향도 컸습니다. 신학교육은 성서에 나타난 성령체험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춘 나머지 정작 이런 체험을 삶에서 이끌어 내는 데는 무력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도권 신학교육과정을 잘 이수하면 할수록 성령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쪽으로, 성령체험에 관한 이야기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나 하는 말로 치부함으로써 자기를 이성적으로차별화하는 방향으로, 교육의 커리큘럼이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는 체험 없이, 예수님의 숨결이 우리를 가득 채우는 실존적 변화의 체험 없이는 신앙생활에 있어 진보나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윤리/도덕과는 다른 차원에 속한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윤리/도덕은 자기존재의 변화 없이도 가능한 실천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자기존재의 근원적 변화 없는 윤리/도덕적 실천을 도리어 위선이라고 꼬집어 말합니다. 신앙의 궁극적 관심은 존재의 근원적 변화에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게 궁극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윤리/도덕을 초월한 신앙이 지향하는 변화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바울의 고백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4.

 

오늘 사도행전의 이야기 역시 성령이 임하여 일어나는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장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 누가의 문학적 장치들이 동원되고 있습니다만, 본문의 핵심은 성령이 임하여 그곳에 있던 이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변화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영, 그분의 숨결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어도 달라졌습니다. 일상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던 그들의 말이 성령이 임하자 달라졌습니다.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악한 세상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지만, 이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말이 달라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냉소에 가득 찬 말을 버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말,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다른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방언이란 이렇게 달라진 말의 은유이겠습니다. 저 말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일까, 혹시 술에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낯설게 들린 말, 그 말을 성령 받은 이들이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순진한 바보이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자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모든 게 불투명하고, 여전히 모든 게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령에 힘입어 진리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알고도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게 되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저는 감히 말합니다. 세상을 알고서도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성령과 하나 된 삶으로부터 온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5.

 

성령강림절기는 교회력에서 가장 긴 절기입니다. 한 해의 절반에 가까운 기간이 성령강림절기입니다. 그만큼 성령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교회가 다른 무엇보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제자들의 삶 가운데에서 새날 새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 낙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앞서 부르신 희망의 노래, 사랑의 노래를 우리시대에도 부를 수 있습니다. 모쪼록 주님의 이 은총과 평화가 거룩한 성령강림절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각 사람과 가정, 그리고 우리교회 가운데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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