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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본문: 마태복음 16:13-20; 로마서 14:1-12   
신반포교회 이계준 목사 (2017.6.25. 청년헌신예배)

근자에 <신학이 변해야 교회가 산다>는 책을 펴내고 신학은 학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신학교육의 혁명을 주도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클레어먼트신학대학원 학장인 필립 클래이튼이라는 분인데 자기가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과정을 이수할 때 받은 충격적인 교훈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저명한 신학자인 한스 프라이 교수를 만나 신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신학 방법론에 관해 학위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대화를 마칠 때 프라이 교수가 “(자네가) 기독론을 쓰기 전에는 아직 신학자가 아닐세.”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마음 깊은 곳에 박혀서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인데 클래이튼 박사는 이것이 신학생들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대답해야 할 결정적인 질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늘의 본문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말씀이 바로 그 질문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인생관과 세계관의 중심문제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선택한 것은 교회와 사회의 희망인 젊은이들이 그 해답을 위해 고민하므로 크리스천 정체성의 확립과 새 역사창조에 도움이 되기 바라는 때문입니다.

1.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주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중에 떠도는 루머에는 별 관심이 없으신지 제자들의 직답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때 시몬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란 그리스어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번역한 말인데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은 여러 가지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다윗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선택받은 자 또는 구원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이것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라 마태공동체의 고백으로써 베드로의 입을 빌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고백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마태복음이 기록된 AD 70-80년대는 로마제국이 이스라엘 민족 특히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고 처형하며 황제숭배를 강요하던 엄혹한 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원자시다는 고백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예수께서 그들의 구원자임을 믿고 그분의 삶을 자기들의 삶에 접목시키고 재현하므로 구원의 확신을 얻고 이 진리를 만천하에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신앙 때문에 생명을 바쳐 순교하였고 그 순교의 피가 험준한 역사 속에서 교회를 살아남게 한 강력한 생명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2. 

만일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여러분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지금 주님은 21세기라는 물질주의, 과학주의, 폭력주의, 다원주의, 국가주의 등이 창궐한 세상에서 “현대인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현대인들은 당신을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현자라고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당신을 선생이라고도 하며 기독교인들은 당신을 유일한 구세주라고 믿고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입니까?  “주님, 지금 저는 취직문제로 골머리를 않고 있는데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따분한 질문을 하십니까?  로봇에게나 물어보세요.”  혹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그런 뜬금없는 질문은 처음입니다.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혹은 “예수님,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왜 그런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한 주님의 질문에 침묵하거나 이리저리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정답은 “선생님은 그리스도십니다.”는 것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애인의 고백과 같이 당신만이 나의 사랑이고 절대가치이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고백은 예수님의 교훈과 삶이 곧 우리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의 중심이라는 선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표현할 때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2:2)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지식과 지위와 명예란 스펙을 쓰레기처럼 여겼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주님이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의 노예라고 자처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기 때문에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다.’(로마14:8)고 말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자기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 그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관이 가능하겠습니까?  2000년 전 원시시대에 기록된 말씀과 신앙고백이 말할 수 없이 급변하고 복합적인 21세기를 살아가며 주체성을 과시하는 현대인들에게 타당한 길잡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등의 저자로써 톨스토이와 도스토이에프스키에 버금하는 작가로 인정받은 20세기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인간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지고 그의 골고다를 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걸음 나아가다가 여로의 중간에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지기 때문에 골고다의 정상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다른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처형이 두려워 ...부활에로의 길이 십자가뿐임을 모른다. 다른 길은 없다.”

카잔차키스는 예수의 십자가가 현대인에게도 절대가치라는 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은 그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므로 구원받는 동시에 이웃을 구원할 때 자기 구원도 완성된다고 암시합니다.  실로 문학가의 놀라운 신앙적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관념적으로나 교회에서나  하는 행위가 아니라 골고다같이 험난한 일상에서 주님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고민과 갈등, 대립과 분열이 난무하는 삶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삶을 재현하는 배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지업, 인간관계와 사회활동 속에 사랑과 용서, 관용과 인내, 자유와 평화가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사랑해 당신을”이란 노래의 작곡가는 크리스천이었는데 그것이 애창곡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란 단어 없이 사람들이 하나 되는 구원의 노래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은 이런 신앙고백의 재현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상담소에 갔을 때 상담자가 그에게 찾아온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우리 가정에는 돈도 많고 집도 많고 권력도 많고 어머니도 많고 학벌도 높은데 단 한 가지 사랑이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젊은이의 가정은 지금 우리 사회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세속주의, 유물주의, 허무주의를 대변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 가시적이고 일차원적인 것에 현혹되어 그것을 충족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가치인 사랑의 부재로 삶의 무가치와 목적 상실이란 불랙홀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꿈과 비전 없이 사회란 메카니즘의 한낱 부속품이 되려고 목을 맵니다.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혼밥과 혼영에 만족하고 결혼하고도 자녀 없는 행복추구는 경제문제에 앞서 참 사랑의 결핍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삶-사랑이란 총체적이고 중심적인 비타민의 결핍증으로써 결국 개인과 가정, 사회와 민족을 종말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 징조는 현재진행 중인 점진적 인구감소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6.25발발 67주년입니다.  이 전쟁으로 희생된 국군 사상자가 60만 명이고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참전한 UN군 사상자가 11만 6천명이라고 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들이 가족과 민족을 사랑하고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거룩한 피와 목숨을 바친 결과가 오늘의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루고도 도덕적-정신적 부패 때문에 근 20년 선진국 문턱에 서 있습니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 범법자 집단이기 때문에 관직을 맡길 인사가 없을 뿐더러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변명과 거짓말로 파렴치한 모습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은혜 망각증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는 달리 선진국의 지도층은 특권만큼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합니다.  영국의 귀족학교인 이튼스클의 매해 졸업생이 200명 안 밖인데 제1차, 2차 대전 때 전사자가 2-3천명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에는 재학생이나 졸업생의 전사자 명단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학들에는 그런 것이 없을 뿐더러 우리 사회는 그런 희생과 가치를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주님의 부름 받은 귀족이므로 이웃을 위한 희생으로 자기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저만의 생각이기 바라지만 얼마 전 우리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중년 내외분이 몇 주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가급적이면 우리교회에 정착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예배에 불참하기에 홍 목사께서 가까스로 남자분과 통화했더니 “교회가 다 좋은데 친교에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언행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우리가 자신만의 구원에 몰두하는 동안 구원에 갈급한 영혼은 상처받고 떠나갔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야 할 때 제 발로 찾아온 양을 돌려보낸 것입니다.  실로 부끄럽고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귀한 교훈과 숙제를 남겨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난 6월 10일 일간지에 정대호라는 분의 가족이 미국 이민 간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아들이 중고등학교에서 수석하고 UC 버클리를 졸업한 다음 의대입학시험에 합격하고는 신학대학원에 가서 아내와 함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온누리교회에서 미국서 돌아온 5-600명의 1.5세를 위해 목회하는 정재륜 목사입니다.  그는 자기 목회의 목적에 대해 ‘한국인이 지금 전 세계 250개 나라에 살고 있는데 이들은 물론 큰 빌라에 사는 사람과 단칸방에 사는 사람이 함께 밥 먹고 소통하는데 헌신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자신과 함께 이웃을 구원하려는 인생관은 목사뿐만 아니라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크리스천들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그리고 교우 여러분, 예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실 때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고 담대히 응답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위기와 파멸에 직면한 우리 자신과 함께 우리 민족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날마다 승리의 삶을 이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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