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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종교를 넘어서 (2017.7.9.)

2017.07.09 17:05

홍목사 조회 수:115

문화종교를 넘어서

 

본문: 시편 72:1-17; 마태복음 11:16-19

설교: 홍정호 목사 (2017.7.9. 성령강림 후 제5)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17년의 반환점을 지나, 다시 2018년의 출발을 향한 여정에 들어섰습니다. 선물로 주어진 일상을 감사와 기쁨 속에 보내고 계시는지요. 삶의 시간도 달력에 명기된 시간처럼 언제가 반환점인지,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를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며칠을 살았고 며칠이 남았는지를 알 수 있다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꼭 좋을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1.

 

인간은 삶이 유한하고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때로 새로운 일에 도전합니다. 유한한 삶에서 벗어나고, 우연으로 가득 찬 삶의 시간을 계측 가능한(calculable) 시간으로 통제하고픈 욕망은 인류의 오랜 열망이었습니다. 전체지도를 보면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길을 잃거나 쓸 데 없는 데 시간을 들이기보다 정말로 가치 있고 소중한 일에 좀 더 집중하며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신 대신 우연으로 가득 찬 시간, 역설과 당혹스러움으로 가득 찬 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두가 삶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서양의 근대라고 말하는 지난 500여년의 시간은 인간이 오랫동안 운명이라고 여겨왔던 일들에 도전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매진해 온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의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하라리 2017, 39)이라고 말합니다. 21세기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보다 과체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고,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보다 늙어서 죽는 사람이 더 많고, 전쟁과 폭력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하거나 당뇨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이렇듯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을 극복한 인류의 다음 목표는 인류를 신적인 존재로 업그레이드하는 일, 유전공학과 재생의학, 그리고 나노기술의 발전의 힙 입어 호모 사피엔스호모 데우스(Homo Deus), 즉 신적 인간으로 바꾸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2.

 

최근 학계의 관심도 이른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라는 주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연구 분야에 상관없이 포스트휴먼이라는 키워드가 어떻게든 들어가야 연구비를 타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휴머니즘이란, 말뜻 그대로 인간주의 이후, 즉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인간중심적 사고 이후에 관한 논의입니다. 이런 생각은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여러 형태의 식민전쟁, 그리고 경제성장과 발전의 논리 하에서 억압을 일상적으로 경험해 온 20세기 인류에게는 사실상 금기시 된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의 분위기에서는 인간은 왜 존엄한가?”라는 질문을 하는 대신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명제를 당위적으로 강조해야 할 역사적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21세기에 들어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포스트휴머니즘 이론가들은 말합니다.

 

얼마 전 딸과 대화하다가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인간은 동물실험을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동물이 감정이 없고 생각도 없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이해가 안 된답니다. 왜냐하면 진화의 과정은 계속 진행 중인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 지금의 어떤 동물이 인간보다 더 진화한 생명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당장 인간이 동물보다 힘이 세다고 해서 그렇게 동물실험을 막 하는 건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하필 마트에 돼지고기 사러 가는 차 안에서 그런 질문을 합니다. 아는 지식을 총 동원해서 대답을 하긴 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제 대답이 궁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아이의 질문은 인간중심적 권리의 개념을 넘어 동식물의 권리를 포함한 이른바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나온 질문인데, 제 대답은 여전히 인간중심적 권리의 관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변호하려는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종교이고 신앙입니다. 설교자들 사이에 “19세기 신학을 공부한 20세기 목사가 21세기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아이러니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21세기 기독교신앙의 과제는 지난 세기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어려운 말씀일 수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신의 죽음(death of God)을 전제로 한 문화 속에서 복음적 삶의 가치를 증언하는 더 어려운 일이 기독교신앙의 과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씀을 드려 볼까요.

 

기독교가 유럽에 가서 문화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셨지요? 문화가 되었다는 건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침에 교회 오실 때 옷을 입고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셨습니까? 날도 더운데 옷을 다 벗고 나갈까 말까 고민한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옷을 입는 게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옷을 입고 나갈까 말까가 고민이 아니라,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만 문제가 됩니다. 또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 할까 말까 고민한 분이 계신가요? 이건 좀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문제는 양치질 할까 말까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밥을 먹기 전에 닦을까, 커피를 마신 후에 닦을까, 이런 것만 문제가 되지 양치질은 이미 문화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시면서 교회 갈까 말까 고민한 분은 아직 기독교신앙이 문화로 뿌리내리지 않은 분입니다. 일요일 아침에 눈 떠 보니 몸이 지금 여러분처럼 교회에 있어야 비로소 기독교신앙이 문화가 되었다고 말할 만합니다. 유럽인들은 천년을 눈 뜨면 교회에 앉아있는 생활을 했던 것이죠. 기독교가 유럽에 가서 문화가 되었다는 말을 할 만 합니다.

 

3.

 

지젝(Slavoj Zizek)이라는 철학자는 문화를 보다 특별히, 이렇게 정의합니다. “‘문화는 우리가 실제 믿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행하는 모든 것의 이름이다.”(지젝 2016, 72) 기독교가 유럽에 가서 문화가 되었다는 말은 실제로 그렇게 믿지 않으면서도 그대로 행하는 데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날도 덥고 하니 시원하게 크리스마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은 산타 할아버지가 여러분이 잠잘 때 굴뚝으로 몰래 들어와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간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크리스마스를 행복하게 즐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분들입니다. 산타의 존재를 안 믿으면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없나요? 전혀 아닙니다. 산타가 있든 없든, 오든 말든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는 데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게 낫겠죠. 분위기가 나니까. 안 오는 것보다는 오는 게 좋겠죠. 애들이 좋아하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 이런 일이 산타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믿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행하는 모든 것의 하나로 하느님신앙이 자리매김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계몽(enlightenment)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눈 뜨면 질문 없이 교회에 앉아있던 것이 문화이던 시대로부터 이제 교회 가는 게 특별한 스케줄이 되어야 하는 시대로 점차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럽이 경험한 세속화, 탈종교화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계몽을 경험해서,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서 크리스마스에 산타 따위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자체가 의미 없는 날이 되는 건가요? 어떤 이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산타도 없는 마당에 크리스마스는 무슨 크리스마스라고 저 난리들이냐며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이들에게 냉소를 보낼 수도 있을 겁니다. 나아가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전하는 이들을 사기꾼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을 겁니다. 왜요? 산타가 없으니까.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다 어린아이 같은 행동입니다. 그런 이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크리스마스에는 산타가 와서 선물을 줘야한다는 전제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기쁨은 산타에게 선물을 받는 데 있지 않고, 스스로 산타가 되는 데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어린이들에게 산타가 되고, 나아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몸소 산타가 되어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기쁨임을 아는 사람이 어른이 아닙니까? 이것이 계몽을 경험한 이들이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의미 있게 보내는 방식입니다.

 

기독교가 문화종교가 되는 건 분명 유쾌한 과정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도 이제 100년을 훌쩍 넘기고, 근대화/세속화 과정을 거치면서 좋든 싫든 기독교를 하나의 문화종교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 들어섰습니다. 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주일성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교인의 의무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대하기보다는 나이나 학벌 따위로 평가하는 데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신앙이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산타 할아버지처럼 우리 인생의 크리스마스를 장식하는 등장인물에 불과한 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계시면 좋고, 안 계시면 할 수 없고. 찾아오시면 좋고, 안 오셔도 별 상관이 없는 그런 분으로 밀려나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느님을 전혀 믿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훌륭한 문화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데 있어 산타에 대한 믿음이 부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4.

 

제 설교가 어려우시죠? 일전에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교회 홈페이지에서 제 설교문을 읽으셨는지 내용이 좀 어려운 것 같다며 홍 목사, 너희 교인들은 네 설교 이해하니?”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은혜 받는다는 분들도 더러 있어요.” 그랬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이, “, 나는 부르지 마라그러시더라고요.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르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게 능사는 아닙니다. 불필요하게 어려운 말은 피해야하지만, 불가피하게 어려운 말은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제가 이런 어려운 말씀을 강단에서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세속화 과정에 들어섰습니다. 오해 마십시오. 자랑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목회적 도전이고 고민입니다. 제가 보기에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하느님이 안 계셔도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분으로 보입니다. 이 말씀도 비난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려야 할 삶의 절박함을 가진 이들은 우리 교회를 찾아왔다가 당황하고 때로 크게 실망하고 돌아가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목회자로서 참 가슴이 아픕니다. 저의 목회자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스스로 물음에 부쳐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저를 있게 하신 이 자리야말로 한국교회의 미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도전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도전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갈수록 우리 신반포교회와 비슷한 신앙양태를 띠게 될 것 같습니다. 교인들의 삶에서 신앙은 점차 문화종교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고, 이런 현상은 포스트휴먼 시대에 접어들수록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좀 더 성실하고 솔직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그때와 지금이 너무 닮았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교회가 피리를 불어도 세상은 춤추지 않고, 교회가 곡을 해도 세상은 울지 않습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 알았으니까 너나 잘하라는 식의 냉소에 찬 목소리가 곧장 메아리쳐 돌아오는 시대에 교회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서구교회가 지난 20세기에 맞닥뜨린 도전이고, 오늘 우리가 갈수록 무겁게 맞이하게 될 도전입니다. 계몽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길이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시대의 도전을 피하지 말고, 우리시대의 하느님신앙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할 때입니다.

 

5.

 

오늘 본문의 말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제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말로 증명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교회 나오라고 목사가 설득해서 교인들이 나오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새겨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우리의 한 일로 증거 해야 할 때입니다. 교회 나오라는 설득도 필요하겠지만, 교회를 사람들이 찾아올 만한 장소로 만드는 일이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된 시대입니다. 어떨 때 교회가 찾아오고 싶은 곳이 될까요? 세상과 같은 곳이 될 때일까요? 아닙니다. 세상과 다른 장소가 될 때, 세상의 가치판단의 기준과 다른 하느님나라의 가치가 지배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은 교회에서 삶의 의미와 활력을 얻습니다. 상처 입은 자들을 돌보고, 갈 곳 잃은 이들의 피난처가 되고, 세상에서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입이 되어 그들을 위해 설 때 교회는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다는, 아니 하느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생각에 긴 어둠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참 많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청소년기, 혹은 청년기에 신앙의 뜨거운 체험을 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느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적인 정직함 때문에. 남들처럼 좀 잘 믿어보고 싶은데, 교회의 가르침이 걸림돌이 되어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도 노력하고 낙심한 이들도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실천으로 보이기 위해 힘써야 하고, 낙심한 이들 역시 실망감에 머물지 말고 믿음의 행동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야 합니다. 문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이들이 없는 겁니다.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말을 실천하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 그것이 하느님이 안 계시다는 불평보다 더 큰 우리시대 신앙의 과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커다란 시험에 직면한 이때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신앙의 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문화종교의 덫에 빠져 하느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 없이도 그럭저럭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이때에 우리는 신앙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를 길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그분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만난 이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은총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문화종교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교양기독교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 예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차고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생생한 육성과 만나는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도전의 시대에도 여전히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안 보인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통해 하느님이 드러나셔야 합니다. 한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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