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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길 (2017.7.16.)

2017.07.17 08:32

이원로 조회 수:22

순례자의 길

본문: 마태 8:18-22; 히브리 11:8-16

신반포감리교회 이계준 목사 (2017.7.16.)

 

1.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에는 어떤 율법학자와 예수의 대담이 실려있습니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것은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면서 매우 문학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으로 응답하십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쉴 곳 즉 집이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었으므로 유할 곳이 없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오늘날 국회 청문회에서 하신 것이라면 재산 숨기기라고 곡해되고 질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뜻의 단초가 밝혀지는 것 같습니다. 한 제자가 주님께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을 요청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비도덕적 언사라고 할 수 있으나 여기에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중심의 생각이나 현실에 안주하거나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의 삶은 낡은 것보다는 새로운 것으로, 자기중심보다는 이웃중심으로 물잘족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2.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이동하는 순례자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존재방식과 삶의 행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순례자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방랑자의 길이라고 해서 좋을 것입니다. 순례자는 궁극적 가치와 목적을 따라 날마다 심사숙고하며 순간마다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고 방랑자는 탕자나 노숙자처럼 그런 가치나 목적 없이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말씀을 듣는 즉시 여러분 가운데는 오라, 성지순례를 다녀와야 하겠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지순례는 순례자의 길이고 일반 관광은 방랑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성지순례를 다녀보니까 성지가 너무나 상업화되고 예수께서 깽판을 치신 예루살렘 성전 뜰처럼 잡상인으로 가득차서 순례자의 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순례자의 길이란 일종의 관광코스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의 고난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 요셉, 모세의 삶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라는 절대 가치와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한 고난의 여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갈 곳을 알지 못하면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실 미래의 도시를 향해 갔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질시를 당하고 애급의 노예로 팔려갔으나 자기의 고난의 길이 동족을 구원할 하느님의 섭리로 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종살이에서 구원하려고 부르실 때 안정된 삶을 버리고 무지목매한 민족을 이끌어 출애급을 이루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은 부르심 받기 전의 절대가치는 날마다 고기 잡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 주저하지 않고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므로 마침내 인류역사의 새로운 무대로 등장할 교회의 기초를 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서의 이야기들은 순례자들의 여정을 그린 일대 파노라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의 조상들이 밟고 가신 여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결단과 실천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삶의 틀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므로 과거와 현재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틀을 벗고 새로운 길로 가려고 하다가도 마치 연어처럼 과거로 돌아가거나 혹은 주변의 눈총과 압력 때문에 주저앉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주변에는 과거나 현실의 탈을 벗지 못하는 군상이 많습니다.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현실을 비관하거나 낡은 도덕으로 젊은이들과 갈등하는 노인들, 70-80년대 이민 가서 선진국에 살지만 옛날 가난과 습성이 몸에 배어 귀국할 때 그때는 귀했지만 지금은 별것 아닌 것을 선물로 가져오는 해외 동포들. 선진국에서 설치하는 케이블카를 무조건 반대하여 관광과 지역경제에 역행하는 환경주의자들. 아마도 현실 안주로 인해 가장 치명타를 입은 집단은 박근혜 정권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지식이나 생활면에서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대세를 볼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생활에 편리한 새로운 도구들을 생산해 내는 것은 미래지향적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제4차 산업이 출발하여 자율운행 자동차 시대가 온다니 저 같은 노인은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자기중심적 및 인간중심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고 얼마 지나면 무용지물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3.


예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의 참 뜻은 현상 유지”(status quo)를 부정한 것으로 인간 이성의 활동 특히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기술공학을 발전시키라는 암시가 아닙니다. 이러한 발전은 윤리적- 정신적 차원에서 볼 때 김정은이 적화통일을 위해 핵을 개발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 그리고 돈독한 인간관계와 사회-역사적 책임을 걸머지는 정신적 및 영적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향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산상수훈 8복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 온유하고 의의에 목마른 사람, 자비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고 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3-10)는 등 세속적 가치에 반대되는 역설을 강조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12세기에 위그 드 생-빅토르라는 수도사가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조국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은 향락주의자다. 모든 대지가 조국인 사람은 이미 용기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온 세계가 유배지인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다.” 이 수도사는 이 세상을 유배지로 알고 잠시 길손으로 살다가 영원한 삶으로 돌아갈 거룩한 여정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이나 옛 수도자의 시각에서 지난 대선을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과거나 현상유지에 연연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계층과 종교에 상관없이 좌우로 갈려 전쟁을 불사하는 곤혹을 치르고 한 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그치지 않고 정부와 국회에서, 법원과 직장에서, 가정과 거리에서 현재진행 중이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 막장 드라마가 될 것입니다

 

또한 문 대통령은 트럼프와의 회담에서 북핵문제해결에서 주체성을 확보했다고 장담할 때 기쁨과 의심이 교차하습니다. 그런데 그는 G20 회의에서 돌아와 국무회의 석상에서 북한이 한미가 정한 레드라인을 넘어설 겨우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다.’면서 주체성의 무력함을 실토했습니다. 최고 통치자의 이러한 불확실한 자세는 국민에게 생존의 문제와 함께 국가존망에 대한 우려와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생존할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고질병인 당쟁 곧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탈을 벗어버리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발전시키는데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생존과 주체성의 문제는 원천적으로 낡은 행태의 범주를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 곧 화해, 협력, 타협이라는 처방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더욱이 북한과의 대화는 쌀과 돈을 퍼주는 낡은 방식이 아니라 불행히도 핵 보유란 극히 새로운 방식으로만 가능한 정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 핵은 파괴와 살상이 목적이 아니라 남북의 대화와 통일을 위해 절대 불가결한 수단으로써 두 아들을 살해한 공산주의자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의 말씀처럼 사랑의 원자탄이어야 합니다. 낡은 사고와 행태를 버리고 우리 순례자들은 이 사명을 위해 기도하고 숙고하고 실천하는 동시에 교회는 이것을 훈련하는 거룩한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순례의 길로 부름 받은 우리는 자기집착을 버리고 남다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남달리 사는 차별화란 곧 거룩함을 몸과 마음에 익히는 것입니다. 감리교 교조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대학 학창시절부터 온전한 크리스천 곧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하였는데 거룩함이란 완벽한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거룩함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화하여 완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으로 순례자의 길 곧 거룩한 삶을 산다고 착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비교인들은 집에서 쉬거나 여행을 떠나는데 우리는 그런 속된 것을 마다하고 교회에 오거나 골프장에 가서 전도하는 경우도 있으니 남다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룩함으로 가는 길에 불과하고 그것이 곧 거룩함의 종점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오실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오늘의 예배는 은혜스럽고 나의 고민과 답답한 심정을 달래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아무런 생각 없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합니다. 그러나 모든 관심이 자기중심과 현상유지에 고착된다면 일시적 위로와 만족은 얻을지 몰라도 다음 한 주일 동안 영적 상실증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참 순례자라면 지난 주간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거룩한 길을 가려고 악전고투하였는가? 어떻게 하면 오늘 예배드리면서 하느님과의 소통과 임재의 체험을 통해 삶의 용기를 재충전하고 나의 마음이 하느님의 거룩한 지성소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오늘 나라와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기도할 제목은 무엇일까? 예배 후 만나야 할 고독하고 상한 심령은 없을까? 필요하면 조용히 만나 사랑의 교제를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순례자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항목일 것입니다.


성녀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스러움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몇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는 부연하기를 성스러움은 집에서부터 시작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시작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는는 순례자의 길은 분명히 고달프고 시련의 연속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질적으로 다른 삶의 가치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기에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자신의 순례여정에서 겪은 희비의 체험을 소개하므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사면에서 공격을 받아도 위축되지 않으며, 답답한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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