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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이신 한 분 안에서 (2017.9.3.)

2017.09.04 07:52

홍목사 조회 수:57

진리이신 한 분 안에서

 

본문: 시편 105:1-6; 로마서 12:9-21

설교: 홍정호 목사 (2017.9.3. 성령강림 후 제13)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 기록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로마서의 전반부인 11장까지는 주로 신학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나 후반부가 시작되는 12장부터는 신학적 주제의 적용,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에 관해 논하고 있습니다. 12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12:1-2)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 목사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러분의 매일의 삶, 일상의 삶자고 먹고 일하고 노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헌물로 드리십시오.” 몸을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우리 일상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 되도록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이 지닌 것의 일부를 드리는 삶이 아니라, 아예 몸 그 자체를 드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자고 먹고 일하고 노는 모든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 되도록 사는 삶이라야 합당한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건 문화에 휩쓸려 동화되지 말라는 뜻이겠습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는 삶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드리고,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의 후반부를 이렇게 도전적인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2.

 

오늘 본문인 9절부터 21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사는 삶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며,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진리에 잇닿아 사는 삶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권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9-10) 사랑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 사랑하는 척, 혹은 사랑을 명분 삼아 결국에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기만적인 말과 행동을 그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13:34-35)

 

여러분,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게 어려울까요? 서로 사랑하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요? 원수 사랑이 일방향이라면 서로 사랑은 양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이것도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누군가를 원수로 규정하고 나면, 그이에게서는 기대할 바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니까 원수 같은 짓을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원수가 원수 같은 짓을 안 하면 원수가 아니겠죠. 좀 잘 봐 주려고 해도 원수 같은 짓을 계속 하니까 원수인 겁니다. 참 편하죠? 그런데, 일단 이렇게 상대를 원수로 규정하고 나면,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측은한 마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오죽하면 저러겠나...’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원수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수도 있는 겁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건 우리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아니라고 차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건 어떨까요? 이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남이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상대를 원수로 규정해 버리고 인생이 불쌍하다!’ 이렇게 생각해 버리면 그만일 수 있는데, 그렇게 원수로 규정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려면, 정말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원수에게서는 기대할 바가 없기 때문에 낙심할 일도 없지만, 서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관계에서는 상처받고 낙심하는 일이 자주 생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낙심을 이기고 끝까지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며 상대에게 다가섰는데 그가 나를 아주 무슨 호구로 여기는 게 눈에 환히 보인다면, 여러분은 그때에도 그를 원수로 규정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사랑한다는 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기적을 체험하고 계신 겁니다.

 

서로 사랑하기의 어려움을 시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120:6-7) 아니, 내가 평화를 말하면 상대방은 평화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존중은 해 줘야 하는 게 아닙니까? 평화를 말하고 있는데 계속 무시하고, 심지어 계속해서 전쟁이나 생각하는 이들과는 어떻게 더불어 평화를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의 탄식이 깊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듯 평화를 말할 때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과 마주하고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거짓 없이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깊이 사랑하는 좋은 친구들이 되십시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십시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는 말은,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주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어디서든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을 기꺼이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면서 나는 기꺼이 조연을 맡겠다는 마음, 그 마음이 서로 사랑하려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라는 말을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이해합니다. “서로에게 다리가 되어 주라.” 강을 건너가려면 다리를 지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다리가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강을 건너 화해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다리입니다. 교회라는 다리를 건너 세상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다리가 된다는 건 밟히는 자리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밟히라고 있는 게 다리입니다. 제아무리 웅장하고 빛나는 겉모습을 한 다리라 하더라도 남들이 밟고 지나갈 수 없는 다리면, 그런 다리는 있으나마나 한 다리입니다. 교인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남들이 밟고 지나갈 수 없는 신자, 남들이 밟고 지나가지 못하는 교회라면 축복의 통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자기를 내어주는 다리라야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 있는 다리지, 겉모습이 화려하다고 쓸모 있는 다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하는 바울의 권면은, 이렇듯 기꺼이 조연이 되어 주라는 뜻이요, 상대방이 밟고 지나가도록 자기를 내어주는 다리가 되어주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3.

 

그러면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울은 열심을 내어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선한 것을 사모하는 우리의 의지가 만날 때 서로 사랑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낱말을 만날 때면 늘 함께 떠오르는 낱말이 있습니다. 바로 투쟁입니다. 사랑은 투쟁입니다. 싸워서 얻어내는 것입니다. 누구와 싸웁니까? 자기와 싸웁니다. 나의 옛 자아와 싸웁니다. 주인공이 되려는 열망과 싸웁니다. 남들에게 밟히지 않고 남들을 밟고 서려는 욕망과 싸웁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랑은 대중가요 가사 속에 등장하는 낭만적인 낱말이라기보다는 언제나 투쟁을 연상시키는 그런 낱말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되는사랑도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건 별 노력 없이도 본성을 따라 되는사랑입니다. 그런데 성서의 사랑 이야기는 가족의 테두리를 언제나 벗어나 타인을 향합니다. 가족이라는 건 결국 자기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건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건 이방인들도 다 하는 일이고, 굳이 교회에서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의 주제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 것, 친구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만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이고, 우리가 매주일 교회라는 영혼의 체육관에 와서 정신을 단련하는 이유입니다.

 

운동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운동하면 몸이 뻐근하지 않습니까.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렇죠. 그런데 온 몸이 뻐근해도 기분은 좋습니다.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여러분, 교회 와서 말씀을 들으면 정신의 뻐근함을 좀 느끼셔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귀 닫고 눈 감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아무 감흥이나 저항감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여러분 정신의 운동이 안 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체육관에 가서 무거운 운동기구를 들면서 근력을 키우는 것처럼, 교회에 와서는 평소 잘 안 쓰던 정신의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일부로라도 좀 더 무겁게 사랑과 평화와 자비의 연습,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이렇듯 우리 영혼의 근육을 늘리는 일종의 트레이닝인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했을 때 삶이 뻐근해지지 않는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여 이를 실천했을 때 우리는 더욱 단단한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중략)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셈이 된다는 말은 원수의 머리 위에 화로를 얹어 복수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머리 위에 밝은 빛을 올려서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회개하도록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은 모두 사랑, 화해, 평화, 인정, 자비, 겸손, 공감, 나눔과 같은 가치들을 지향합니다. 이러 가치들을 실천하려면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도 합당한 이유들이 등장해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우리는 일상의 구심력에 발목을 붙잡히지 말고, 믿음의 실천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4.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한다는 바울의 권면은 인간적인 노력만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이 중심이신 하나님을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커다란 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넓은 원의 테두리마다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이력이 다르고, 관심사도 다른 이들입니다. 원의 테두리에 선 사람들은 반대편 테두리에 선 이들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는 외떨어져 지난 채 고작 자기 옆에 있는 이들, 관심사가 같고 형편이 같고 지향이 같은 이들과만 끼리끼리 지냅니다. 그러나 원의 테두리에 선 이들이 원의 중심을 향해 함께 모여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원의 지름은 중심을 향해 점점 줄어들어 결국 테두리에 있던 이들은 중심에서 만나게 됩니다. 거짓 없이 서로 사랑한다는 건 이렇듯 중심이신 하나님을 향해 함께 발걸음을 내딛을 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가능한 일이지, 인간적인 노력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이신 한 분 안에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자인 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진리이신 한 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의 길에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서로 사랑할 힘과 용기를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상대를 원수로 규정하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그 대신 중심이신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중심을 향해 걸어감으로써 진리이신 한 분 안에서 타자인 이웃과도 가까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바울의 권면을 이 한 주간 우리 삶에 새기며 사랑을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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