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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이긴다 (2017.9.17.)

2017.09.17 17:30

홍목사 조회 수:42

사랑이 이긴다

 

본문: 출애굽기 15:1-11; 마태복음 18:21-35

설교: 홍정호 목사 (2017.9.17. 성령강림 후 제15)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하고 애원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고 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주게. 내가 갚겠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의 복음은 마태복음 18장부터 시작되는 교회/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마태복음은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에 씌어졌습니다. 유대교 정신과 실천의 상징인, 무엇보다 야훼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는 장소인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는 사실은, 당시의 유대교인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커다란 위기를 맞이한 유대교는, 주후 70년 이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재정비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공동체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자고 말하면서, ‘우리로 귀속되는 이들의 경계를 규정짓는 일입니다. 일종의 정체성 ()형성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앞에서 유대-그리스도파 사람들, 즉 유대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점차 분리되어 나오면서 그리스도교라는 고유의 정체성과 제도를 형성해 나가고 있었던 이들을 박해하고 추방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 유대-그리스도파 사람들은 이단에 불과한 이들로 여겨졌기 때문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그리스도인파의 관점에서 기록된 문서입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은, 유대교와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인식은 당대의 유대교인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종 예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이들로 등장하는데(특히 23), 유대-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른바 정통 유대교 지도자들이 좋게 보일 리 없었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율법과의 연관 속에서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율법을 재해석하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이 기록될 무렵의 공동체의 대략적인 상황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의 복음 역시 이렇듯 유대교의 율법을 그리스도교적 맥락에서 재해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 나오는, 15절부터 시작되는 용서에 관한 가르침의 연속입니다. 15절 이하의 본문은, 잘못을 저지른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러나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비록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상대라 할지라도 관계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지난 번 본문을 통해 말씀드렸지요? 원수사랑 뿐만 아니라, 서로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피해만 입는 바보가 되라는 요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냥 자기 식대로 살도록 놔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최전선입니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은, 그들을 멸절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은 이들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편에서 할 만큼 최선의 노력을 해 봤는데도 안 되면, 그이들은 그냥 그렇게 살게 놓아두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나서면서까지 서로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할 만큼 해도 안 되면, 그냥 원수 사랑으로 방향을 돌려, 아예 관심을 주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또 기회가 오면 서로 사랑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면 될 일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유대-그리스도교파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전통적인 가르침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이 버린 사람은 사람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죽도록 내버려 두어도 무방한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것은 그들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더럽다, 부정하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들의 정신을 구성해 온 율법이 그들에게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그렇게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이를 싸매고 도와주는 것보다,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부정한 피를 만질 수 없다는 율법이 앞섰기 때문에, 그들은 고통당하는 이웃 앞에서도 측은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유대교에서 거룩하다 여김 받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외면한 강도 만난 자에게 다가가 상처에 귀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 돌봐주고, 떠나면서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 요새 돈으로 한 20만원 정도하는 돈까지 지불하고 떠난 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사마리아 사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겨 피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비유 끝에 예수님이 물으시죠.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이것이 예수님이,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유대교의 율법을 재해석하고 나선 유대-그리스교파의 사람들이 율법을 이해한 방식입니다. 그 어떤 종교나 이념이라 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세리 역시 강도 만난 자처럼 하나님이 버린 범주에 속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정복의 대상일 뿐이었고, 세리는 부정한 자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과 화해를 위해 노력한다는 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도전행위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 가운데 세리와 죄인의 친구”(7:34)라는 지적이 포함되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화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셨던 것처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자기에게 해를 입힌 이들이라 할지라도, 화해를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화해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 어느 날 은혜 받고, ‘가 어느 날 화해할 마음이 들었다고 해서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화해는 나의 때와 그의 때가 만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야곱와 에서의 화해를 위해 20년의 무르익음이 필요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감정의 변화나 어떤 필요에 의해 화해를 요청하고, 화해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더욱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벗어버려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화해에 이르기까지, 혼자 만나고, 서넛이 만나고, 교회의 권위를 덧입어 만나는 등 최대한의 노력을, 그러나 지혜로운 방법으로,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도 화해가 어려우면, 상대를 비난하거나 적으로 대하지 말고, 그냥 관심을 꺼 버리고 잠시 각자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것은 그런 의미이지, 적대감을 드러내 상대방을 멸절시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유대교의 가르침이었는지는 몰라도,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유대-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르침은 아니었습니다.

 

3.

 

이런 화해와 용서에 관한 가르침의 연속선상에서 오늘 예수님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자꾸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베드로가 일곱 번이라고 특정한 것은 그것이 당시의 율법으로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관대함을 드러내는 횟수였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만으로도 관대하다고 보아야 하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예외적인 관대함을 뽐내기 위해 일곱 번이라는 횟수를 예수님에게 제시하며 칭찬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당혹스럽습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왕의 자비로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고 새 삶을 선물로 받은 종이, 그 빚을 탕감 받고 나오는 길에 만난 동료에게 백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멱살을 잡고, 그를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다시 불러 만 달란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한 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 잡으면, 백 데나리온이면 1,000만원 정도입니다. 큰돈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입니다. 대충 계산하면 한 달란트는 54천 만원입니다. 왕이 얼마를 탕감해 주었다고 했나요? 만 달란트입니다. 그러면, 계산도 잘 안 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54천만원입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왕이 이런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해 주었다는 건 개인적인 구제의 의미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구제가 아니라, 부채를 통해 지속되는 서민들의 삶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상징적 의미가 담긴 선언이었다고 말합니다. 왕은 이렇게 부채를 통해 파멸에 이르는 삶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일종의 희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곧바로 모욕을 당했습니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이가 왕의 뜻을 거슬러 부채로 삶이 파괴된 다른 이의 삶을 다시금 파멸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것은 왕을 기만한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불러들여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용서를 통해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키려는 왕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미에 교훈을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35)

 

여러분, 이 비유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셨나요? 베드로에게는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용서를 그토록 강조하셨던 예수님께서, 왕은 단 한 번의 용서만을 베푸는 분으로 묘사하는 게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예수님은 왕/하나님과 인간의 기준을 이렇게 달리 제시하고 계십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화해와 용서를 위한 노력이 요청되는 반면, 하나님은 최후 심판을 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왕이 일흔 번을 일곱 번용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무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고, 왕을 기만하는 이들만 세상에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 요구된 윤리, 일흔 번을 일곱 번용서하는 길을 우리의 길로 삼아야 합니다. 누가 왕을 기만한 것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왕/하나님의 몫입니다. 또한 베드로처럼 일곱 번용서했으면 족하다는 타협적 태도도 벗어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사랑이 이긴다는 믿음을 갖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다 힘들고 지치면 상대를 이방인과 세리로 여길지언정 적대시하고 배격하는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4.

 

이렇듯 철저한 예수님의 화해와 용서를 향한 가르침이 교회의 전통 안에 얼마나 살아있는지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평화의 정신을 굳게 붙잡는 대신 세상의 질서를 붙잡고 사는 것은 아닌지, 세상살이에서 터득한 관계의 해법을 성서의 가르침보다 앞세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화해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신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벽을 허물고 넘어, 다리가 되는 삶으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진실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이긴다. 비록 덧거친 세상 한 가운데에서 이 믿음을 붙잡고 살기가 쉽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이 이긴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자이신 예수께서 보여주신 길이요,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길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이깁니다. 용서가 이깁니다. 이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한 주간도 이 믿음 가지고, 사랑의 길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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