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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와 응대 (2017.10.15.)

2017.10.15 12:41

홍목사 조회 수:55

초대와 응대

 

본문: 시편 106:1-6; 마태복음 22:1-14

설교: 홍정호 목사 (2017.10.15. 성령강림 후 제19)

 

[예수께서 다시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자기 종들을 보내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서, 이렇게 말하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떠나갔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다. 임금은 노해서,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네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래서 혼인 잔치 자리를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임금은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갔다가, 거기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묻기를,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하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 임금이 종들에게 분부하였다.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친히 자기 종들을 보내 초대받은 이들을 잔치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임금이 초대하는 잔치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임금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 임금은 처음 초대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이들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상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차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초대받은 사람들은, 임금의 초대를 전하는 종들의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뜻을 전하는 종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고, 마태는 전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록한 책입니다. 여기에서 임금은 예수님이고, 혼인잔치는 예수님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임금의 종들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고, 거부하는 이들은 유대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구원의 길로 부르시는 그분의 초대를 계속해서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그들을 구원의 길로 초정하는 제자들을 모욕하며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은 임금을 임금으로 인정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임금의 뜻을 전하는 종들의 말도 들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이렇듯 모든 준비를 마친 임금의 잔치에 참여하길 거부하는 이들, 거부할 뿐만 아니라 초대하는 이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이들은 어리석고 악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군대를 보내 종들을 살해한 이들을 죽이고, 도시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해해서 임금이신 예수님, 혹은 그분의 뜻을 전하는 종들을 말을 새겨듣지 않으면 그분이 심판하신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을 기록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역사 해석입니다. 마태복음은 AD 70년 이후에 기록된 책입니다.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처참히 파괴된 AD 70년의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역사해석인 것입니다. 마태공동체는, AD 70년의 예루살렘의 파괴는 로마가 아닌 하나님이 아신 일, 즉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회개하고 새로워지기를 거부한 타락한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이 자기의 초청을 거부한 이들에게 군대를 보내 도시를 불살라버렸다는 구절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임금의 거듭된 초대에 응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들은 채 만 채 하며 제 갈 길로 갔던 이들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마태는 전합니다.

 

2.

 

그리고 이제 임금은 새로운 이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처음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 불타버린 도시에 살던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혈통에 속해 있다고 믿던 이들이었습니다. 임금의 손에도 그들의 명단이 먼저 들려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초대를 거부했고, 급기야 임금에게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선언되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난 구원의 잔칫상을 받을 자격이 그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파격적인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네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임금이 마련한 혼인잔치에 그야말로 아무나올 수 있게 되는 이런 파격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종들은 분부를 받들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습니다. 임금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잔치에 초대한 것입니다. 혼인잔치 자리는 금방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누가 복음의 초대에 응하는가?’ 하는 질문에 있어 서로 다른 네 개의 복음서는 일관된 대답을 합니다. 바로 그 시대에 아무나로 지칭되는 이들, ‘돌맹이와 같다고 여겨지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늘의 복음에 가장 먼저 응답한 이들입니다. 만약 잔치에 초청받을 어떤 자격을 따진다면, 그들은 초청자 명단에 들지 못하거나 고작해야 일꾼으로 들어올 수 있을 뿐인 그런 사람들입니다. 복음서는 이렇듯 그 시대에 아무나로 지칭된 이들, 그들이 주인이 되어 만들어나가는 하나님나라의 꿈을 담은 책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와 함께 있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끝끝내 그분의 초대를 거절한 교만한 이들의 친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아무나로 명명된 이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초대에 기쁨으로 응답한 이들의 친구가 될 것인지를 늘 결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천에서 가난한 노동자들, 그 가운데에서도 여공(女工)들의 벗이자 어머니로 일생을 사신 감리교 여성목회자 조화순 목사님의 일화를 저는 마음에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을 하자마자 조 목사님을 청와대로 초청했다고 합니다. 비서실에서 전화가 와서 대통령이 초청했으니 오라고 했는데,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할머니들과 속회가 약속되어 있어서. 그랬더니 비서실에서 놀라서 한 번 더 전화가 왔답니다. 대통령이 꼭 만나고 싶어 하니 바쁘시더라도 꼭 오시라고. 이번에도 조 목사님의 대답은 같았습니다. “먼저 할머니들과 속회를 약속해서 그 시간에 갈 수 없습니다.” 팔십대 중반을 넘어 이제 아흔을 바라보시는 조화순 목사님은, 이것을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취임하는 신임 대통령과 시골 마을 속회에 참여하는 할머니 한 분의 초대 가운데에서 누구의 초대에 먼저 응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저는 대통령이 부를 일이 없어서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만, 조 목사님의 일화는 제 삶에서 누구의 부름에 우선적으로 응답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원칙을 정하는 데 모범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25:40) ‘아무나로 칭해지는 이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가운데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보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3.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아무나잔치에 초대받은 것은 좋았습니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가리지 않고 임금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것은, 그분의 한량없는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임금은 손님을 만나러 들어갔다가, 거기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한 명이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그리고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종들에게 명하기를,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했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아니, 누가 오고 싶다고 했나요?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불러 놓고서는 예복을 안 입었다고 손발을 묶어 바깥으로 내던지다니 이 무슨 괴상망측한 일인가요? 더욱이 아무나로 지칭된 그들이 임금의 혼인잔치에 입고 갈 만한 의복이 있었겠습니까? 이런 질문들 때문에 이 구절은 성서주석가들에게도 난제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비유임을 감안할 때 여기서 말하는 혼인 예복은 진짜 옷을 말한다기보다는 어떤 자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자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 오는 이들이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초대받은 자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정성껏 준비하여 잔치에 참여할 때 잔치를 마련한 이나 초대받은 이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다른 구절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7:21) 하나님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 이 땅에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사는 삶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자발적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것입니다. 임금이 아무나 초대한 자리이니, 나도 아무렇게나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손발이 묶여 연회장 바깥으로 던져진 종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곳곳에서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신학자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가 이제 더 이상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의 교리만으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특히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루터의 교리적 재해석이 그동안 개신교 신앙 안에서 숱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면서 믿음을 강조한 것이 세월이 지나는 동안 구원에 있어 의로운 행위를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인들 가운데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이 믿음행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행위로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이미 참 믿음이 아니고,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행위와 하나인 믿음, 행동과 분리될 수 없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해석이지, 행위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한 중세 가톨릭교회의 면죄부보다 더 타락한 면죄부가 될 것입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래도 자기 죄를 반성하면서 면죄부라도 구매하려는 이들을 남겨두었지만, 오용된 오직 믿음의 교리는, 구원을 완전히 공짜로, 최소한의 자기 성찰과 반성, 그리고 변화를 위한 노력 없이도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침으로써, ‘면죄부라는 증서를 받을 필요도 없는 면죄부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만 약속되었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이방인인 저와 여러분에게도 약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잔치에 초대된 것을 기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여할 예복을 준비해야합니다. 자격 없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의 잔치에 초대해 주신 것에 감사한다면, 그리고 연약한 이들로 당신의 잔치의 손님이 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린다면,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에, 나아가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펼치는 일에 매순간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잔치에 입고 갈 예복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부르실 때에 잔치에 참여해 부끄럽지 않을 의의 행실로 나의 예복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우리도 하면서, 주님의 초대에 기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과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