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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以後) 신앙 (2017.10.29.)

2017.10.29 14:46

홍목사 조회 수:53

이후(以後) 신앙

 

본문: 신명기 34:1-12; 마태복음 22:34-40

설교: 홍정호 목사 (2017.10.29. 종교개혁주일, 여선교회헌신예배)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1.

 

오늘 뜻깊은 종교개혁 주일 아침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선교회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물질주의, 향락주의, 권위주의, 그리고 패권주의 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의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교회 안팎에서 크게 들립니다. 저도 이런 저런 자리에서 작은 목소리들을 보탰습니다만, 여러 목소리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우리들 중에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마다 강조하는 문제의식의 내용과 결이 다르지만, ‘한국의 개신교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주장에 있어서는 한 목소리를 냅니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인 치고, 개신교가 문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무엇이 우리 개신교의 문제인지 나열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계시는 바로 그 문제가,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당한 1520년에 세 편의 논문을 연달아 출판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자주 인용되는 논문이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입니다. 여기에서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높이 쌓아올린 세 개의 담장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담장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 그 역할이 구분될 뿐, 본질적인 면에서 교리적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서해석의 최종권한이 성직자(교황)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담장입니다. 일반 신도들은 성서를 구경할 기회도 드물었거니와 설사 성서를 읽는다 하더라도 교회의 올바른 규범’(norma rectitudinis)에 따를 것이 요청될 뿐 성서를 해석하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루터는 성서를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읽고 은혜 받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교황에게만 있다고 가르치는 담장입니다. 교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공의회를 교황만 소집할 수 있도록 해서, 부조리한 관행들이 개선되지 않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담장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루터는 자신의 비판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나팔이 되어 타락한 교회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고 선 견고한 장벽이 무너지기를 바랐습니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면죄부 판매라는 타락한 실천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정신과 제도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으로 나아감으로써, 결국 서양의 중세로부터 근대로 향하는 정신사적 전환을 이루어내는 길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500년이 흘렀다는 데 오늘의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나는 동안 개신교가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개신교의 문제는 개신교만 변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개신교는 한국의 근대화의 상징이자, 그 적나라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근대정신에 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이는, 나아가 종교개혁 이후 500년 동안 서양이 형성해 온 정신과 제도에 관한 근원적인 반성과 비판이 없이는, 교회비판을 통한 교회개혁이란 부분적 개선에 불과할 뿐입니다. 근본적인 의식의 틀이 바뀌지 않는 한 또 다른 문제들은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을 말씀드리고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이후(以後) 신앙이 필요합니다. 비판을 생활화하는 데서 나아가는 비판 이후의 신앙, 냉소와 회의에 머물지 않고 진실한 믿음의 생활을 향해 나아가는 이후 신앙이 오늘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3.

 

이후시간적으로 어떤 때를 포함한 그 뒤를 말합니다. “그 일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라고 말할 때처럼, ‘이후는 분기점이 되는 어떤 경험 이후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이후 신앙이란 것이 말은 쉽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수행한다면, 그 일을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려운, 혹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곤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기독교신앙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 기독교인으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질문하는 것을 그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신학박사는 기독교인일 필요가 없고,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신에 관한 근원적 탐색에 걸림돌이 되는, 이런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신앙을 비판하면 신앙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신앙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면서도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능한 경우는 둘 뿐이다. 하나는, 비판이 철저하지 않았거나,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택하기로 결단한 경우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전자에 속합니다. 변죽을 울리는 개신교 현상비판을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한 선에서 비판을 그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철저한 비판을 거치고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기독교인으로 남아있기로 결단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저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티브이에 나와 교회의 분립개척을 주장하고, 기복신앙과 성공주의를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설교들을 유심히 들으면서 매우 흥미롭게 여깁니다. 미국 등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비교적 젊은 세대의 목사들 가운데에는 이런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세습을 반대하고, 십일조를 꼭 내야하느냐고 짐짓 세련되게 말하고, 기복신앙과 성공주의 신앙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물질이 아니라 신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목사들이 티브이에 나와 이렇게 도덕적인설교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나요? 종교시장의 경쟁에서 도덕성이 변수로 작용해 그 교회로 신도들이 몰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비판은, 제도와 실천의 변화로 이끄는 비판이 아니라, 비판의 대상이 되는 토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세습 반대 목소리를 내던 목사가 세습하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적어지고(우리 목사님이 오죽했으면!), 십일조 내지 말라고 하니 재정적으로 깨끗할 것이라는 기대가 더해져 십일조 총액이 늘어나고, 기복주의를 비판하는 양심적이고 도덕적 목사이니 다른 목사의 기도보다 효험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어 그의 기복적 기도의 가치가 높아지는, 이런 웃지 못 할 일들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나치게 냉소적인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듯 신앙에 관한 근본적 회의를 제거한 변죽만 울리는 비판으로는 교회와 성도의 변화를 진실한 이끌어낼 수 없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여기에서 더 나아가는 신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에 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도 합니다. 교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오히려 인간적으로그럴 수도 있다는 관용적 태도나, 판단유보의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 그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아갈 의미를 찾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비판 이후에는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를 떠나고, 종교 자체도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대개가 그렇습니다. 물론 회의와 숙고 끝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보다 인간적인 관계에서 실망하고 틀어져 하느님 핑계를 대면서 떠나는 경우가 현실에서는 더 많습니다만, 아무튼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깊은 물음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후 신앙은 이렇듯, 나름대로의 철저한 회의를 거친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이들의 신앙입니다. 하나마나 한 비판, 남들이 다 하는 비판을 단순히 소비하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위로를 받는 것을 넘어, ‘비판 이후의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신앙을 택하기로 마음먹는 삶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4.

 

오늘 신명기의 말씀은 모세의 죽음에 관한 언급으로 끝납니다.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했다”(34:7)고 전합니다. 마지막까지도 이렇듯 훌륭하게 삶을 마감한 모세였으나, 신명기 기자는 전하기를, “오늘날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34:6)고 말합니다. 애도하거나 기념해야 할 대상은 인간 모세의 위대한 삶이 아니라, 모세가 죽는 날까지 바라보고 나아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부활신앙에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이들은 그분의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고 놀랍니다. 죽음의 자리에 계셔야 할 주님이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선언은, 주님은 애도와 경배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갈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무덤을 찾을 수 없는 모세도, 그리고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갈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하냐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의 내용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계명 전체를 두 가지로 요약하는 답을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 두 가지가 율법의 근본 지향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는 것이고, 인간적인 문화와 역사의 흐름 속에 그 내용이 바뀌고 사라지고 할 것들이지만, 그 지향만큼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지향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들은 갈 길을 알려 주는 하나의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정표 앞에 멈춰 서서 이정표를 경배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이후 신앙의 과제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은 지난 500년의 세계를 이끌어 온 이정표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이정표를 사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정표를 사수하는 게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는 것이 신앙의 목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향한 여정을 지속하는 것이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이유이자 목표입니다. 비판을 넘어서십시오. 냉소를 넘어 진실한 실천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우리 시대 종교개혁은 말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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