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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심에서 신심으로 (2017.11.5.)

2017.11.05 16:22

홍목사 조회 수:41

환심(歡心)에서 신심(信心)으로

 

본문: 시편 107:1-7, 33-43; 데살로니가전서 2:9-13

설교: 홍정호 목사 (2017.11.5. 성령강림 후 제22)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 신도 여러분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이 처신하였는지도, 여러분이 증언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증언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우리는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경고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달입니다. 이제 한 해를 돌아보고, 기도하는 가운데 다가오는 한 해의 계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특히 교회적으로는 신앙의 본질에 비추어 올 한 해 우리 신앙생활의 내용들을 점검해 보고, 계속해서 발전하고 성숙해지는 한 해가 되기 위한 준비에 열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이정표 삼아 교회됨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신자로 살아감의 본분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데살로니가전서는 신약성서에 포함된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이 편지는 마가복음보다도 20여 년 앞서 AD 5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서, 신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오늘날 테살로니키(살로니카)로 불리는,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서, 아테네 다음으로 큰 그리스 제2의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와 터키(소아시아)를 잇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hia)라는 도로 중간에 위치해 있고, 또 에게 해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육로와 해로 모두에 있어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었고, 여러 종교와 문화가 공존해 온 도시였습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교 공동체들뿐만 아니라 로마의 신들과 황제들을 숭배하기 위한 여러 신전들과 고대 근동의 신들에게 제사를 바치던 신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9절에 쓴 것처럼, 이 지역 그리스도인의 다수는 다른 신을 섬기다 돌아선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와 그곳의 교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그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그곳에 있는 유대 사람들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한 끝에,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17:4)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이렇듯 바울의 전도활동을 통해 거둔 열매였습니다.

 

바울의 선교가 성공하자 그곳 유대 사람들은 바울일행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일행을 잡으려다 실패하자 유대 사람들은 회심한 그리스도인들 몇몇 사람들을 잡아다 관원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한다”(17:7)는 것이 비난의 이유였습니다. 다행히 끌려간 이들은 보석금을 받고 풀려났습니다만, 신도들은 그날 밤으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피신시켰습니다. 주동자인 바울과 실라가 잡히면 보석금을 풀려나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피신을 가서, 거기에서도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전하기를,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고, 그들 가운데서 믿게 된 사람이 많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지체가 높은 그리스 여자들과 남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을 박해한 유대 사람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 바울과 실라를 잡으려고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남쪽으로, 아테네까지 내려와 같은 일을 계속했습니다. 바울 일행을 잡으려는 유대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징글징글한이들이 아닐 수 없었겠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실라는 계속해서 쫓기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오 메시아이심을 전했습니다.

 

북부 데살로니가에서 남부 아테네까지 피신해 온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의 신생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박해와 환란을 잘 견뎌내고 있는지, 여전히 건재한 채 복음의 길을 쫓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격려하고자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보냈습니다. 그 사이 바울은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건너와 이방인 선교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데살로니가로 보냈던 디모데가 돌아왔습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의 교회와 교인들이 박해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에게 보고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기쁨과 감사에 가득 차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배경입니다.

 

2.

 

데살로니가로 보낸 편지 곳곳에는 그곳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잠시 여러분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여러분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2:17) 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대하고 권면할 때에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2:2)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교 회당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천지라는 집단이 하는 일이 이런 게 아닙니까. 그들은 멀쩡한 교회에 들어와서 열심을 다해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결국에는 교회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켜 자기들의 집단으로 교회와 재산을 귀속시키는 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중심적 관점으로 성서를 읽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바울 일행이 한 일을 두고 선교라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울 일당이 한 일이란, 결국 신천지가 교회(회당)에 침투해 하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신의 일이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하는 것이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물어야만 했고, 사람들에게도 말해야 했습니다.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실로 그 말의 진실성을 입증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29절 이하에서 바울이 한 얘기는, 이렇듯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진실성을 행동으로 입증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하고 전합니다. 비록 회당에 들어가 그들을 돌이켜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지만, 이 일이 사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그가 어떠한 금전적인 보상도 바라지 않고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다”(5)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다”(6)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선교를 위한 모금이 필요할 때 곳곳에 있는 교회 신도들에게 모금에 동참할 것을 당당히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울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선교 사업을 위해 필요한 것임을 신도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교인 한 명 한 명을 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신도들에게 친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간 것은 단순히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12)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의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고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의 권면, 바울의 격려, 그리고 바울의 질책은 모든 초점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라는 하나의 목적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슬아슬한 경계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미혹시키는 교활한 말쟁이냐, 아니면 이방인을 위한 위대한 사도냐를 가르는 경계는, 결국 그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따라 판가름 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전 문제에 있어 바울은, 자신의 선교활동이 사심 없이 하는 복음의 활동임을 재차 밝힌 다음,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두고 또 한 가지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13)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듣기에 따라 바울의 말은 신실한 유대교 신앙을 미혹시키는 악마의 음성으로 들을 수도 있고, 타락한 유대교 신앙에 경종을 울리는 복음의 회복으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심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전하는 복음임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계속해서 환기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무리 노력을 기울이고 자신의 진정성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뭔가 속내가 있겠지’, ‘세상에 그냥 하는 게 어디 있겠어, 뭔가 검은 속내가 있겠지, 저러다 결국 헌금이나 더 내라고 말하겠지.’ 만약 바울을 만난 이들이 계속 이렇게 생각하는 데 머물렀다면,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데살로니가교회에 새로운 복음의 싹이 트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충분히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성령의 역사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진정성을 확증시키기 위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열심히 돌보고, 진실하게 대하고, 또 금전적인 부담도 지우지 않으려고 했다지만, 그렇게 한다 한들, 믿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의 마음을 되돌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한 마디로, 환심을 산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신심,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의심을 거두고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3.

 

오늘날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노력이 지나친 나머지 갈수록 소비자 친화적(customer friendly)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려고 하고, 어려운 얘기는 피해가면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고, 행여 교회에 안 나온다고 엄포를 놓을 새라 전전긍긍하면서 그야말로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목회의 기본으로 여깁니다. 이런 환경에서 좋은 교회, 좋은 목사란 어떤 사람인가요? 진리의 편에 굳게 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해야 할 것은 어렵더라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교회와 목사입니까? 아니면, 그저 밥 잘 먹고, 사람들과 이래저래 둥글둥글 편안하게 잘 어울리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서 환심을 잃지 않는 데 급급한 교회와 목사입니까?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사심 없이 각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되,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일에 있어서는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사도 바울의 선교와 목회의 원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이루는 데 있어 교회에 생계를 의탁하는 것이 부담이 될 때에는 바깥에서 직업 활동을 해 가면서 선교활동을 이어갔고, 또 교회가 생계를 부담할 만하다고 할 때에는 기꺼이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면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2:4) 선교 활동을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그는 선교에도 실패하고 인간관계에서도 상처만 주고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데 초점을 두고 사심 없이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실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선교에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보람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여러분, 교회됨의 본질, 그리고 신자로 살아감의 본분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누구를 기쁘게 할까, 무엇을 위해 살까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스스로에게 던질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최우선 순위가 되셔야 합니다. 국가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는 더더욱 아닙니다. 과격한 말씀입니다만, 이 모든 것들은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고,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고, 주님이 하신 일을 나도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그분의 기쁨이 되는 행동을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에 놓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임한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설교는 사람의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에 머물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변하고, 방향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저와 여러분 삶의 최우선의 목표, 우리의 공동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 품고 한 주간도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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