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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신실한 종 (2017.11.19.)

2017.11.19 12:40

홍목사 조회 수:46

착하고 신실한 종

 

본문: 시편 123:1-4; 마태복음 25:14-30

설교: 홍정호 목사 (2017.11.19. 성령강림 후 제24)

 

[“또 하늘 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을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그동안 종들을 보면서 판단해 온 바에 따라 그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달란트는 큰 화폐 단위입니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입니다. 한 데나리온을 한 10만원이라고 한다면, 한 달란트는 어림잡아 한 5억 하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이 주인은, 한 40억이 되는 큰돈을 종들에게 맡기고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한 명에게는 25, 다른 한 명에게는 10, 또 다른 한 명에게는 5억을 맡긴 셈입니다. 무슨 여행이었기에 이렇게 큰 돈을 종들에게 맡기고 떠난 것이었을까요?

 

마태복음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전하는 누가복음에는 주인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귀족 출신인 이 주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19:12) 먼 길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본문을 제대로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귀족 출신의 주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길을 떠났다는 이야기의 설정은, 예수님 당시의 청중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의 배경이었습니다. 그들은 헤롯 대왕이 왕으로 인정을 받고자 기원전 40년 로마를 찾아갔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도 왕위를 인정받고자 로마를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이 주인의 여행은, 여가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행보였던 셈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중동 지역에는 오늘날처럼 안정된 정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이 1세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 컸던 시대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누가복음을 보면, 주인이 왕위를 받아 오려고 길을 떠났을 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뒤따라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왕위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 앞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19:14)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은, 자신을 반대하는 무리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충직한 종 세 명에게 재산을 맡기고, 왕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뜻을 남긴 채 먼 길을 떠난 것입니다.

 

2.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습니다. 왕이 되어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떠났다지만, 그 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정치적 변수가 작용해 예상을 뒤엎을지,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종들이 큰돈을 맡아서 좋았을까요? 25, 10, 5억을 맡기고 떠났으니 그야 말로 씨드 머니가 생겨 신났을까요? 아닐 겁니다. 그들은 부담과 위험을 떠안은 것입니다. 자신을 보호해 줄 주인이 없는 가운데에서, 왕위를 얻고자 떠난 이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심복이라는, 그의 측근 중에 최측근이라는 부담과 위험을 떠안은 것입니다. 장차 오실 왕의 충실한 종이 될지, 아니면 혼란의 과도기에 정적들에게 제거될 운명에 처할지는 아무도, 정말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그들은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유럽 북동부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라트비아 루터교회에서는 신입생을 선발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언제 세례 받았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면접을 지켜본 한 사람이, 목사 후보생을 선발하는데 세례 받은 날짜를 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의아해서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면접관의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옛 소련 통치 시절에 세례를 받았다면, 목숨을 걸고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세례를 받은 겁니다. 만일 옛 소련에서 해방된 뒤에 세례를 받았다면, 왜 목사가 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지원자에게 더 많은 것을 물어봐야 합니다.”(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 625)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자기의 옛 사람은 죽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세속화된 서구에서는 세례를 거추장스러운 교회의 의례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구만이 아닙니다. 서구만큼, 어쩌면 서구 이상으로 풍요로워진 한국교회에서도 세례는 그저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아무 것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그대로 다 누리면서 세례만 추가하라고 말하는 꼴입니다. 오히려 세례가 세상에서의 영광과 번영을 약속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대형교회에 해당되는 얘기이겠습니다만, 어느 교회 누구 목사에게 세례 받았다는 것이 신앙의 명예에 머물지 않고, 세속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데 실질적인 보탬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탄압 받는 상황에서 받는 세례는 다릅니다. 신앙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용기와 결단이 없으면, 이런 상황에서 신자가 되기로 결단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해서, 저는 성인이 되어 새롭게 기독교인이 되고 세례 받는 분들이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탄압을 받는 상황은 물론 아닙니다만, 오늘날 개신교는 일종의 사회적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인이 된다는 것은, 적어도 도덕적 의미에서 어떤 영광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개신교인이 되어, 개신교 신앙정신으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신자 한 사람이 신앙의 보배가 아니면 누가 보배이겠습니까?

 

3.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목적은,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던 시대, 눈앞에서 주인이 사라진 침묵의 시대에 세 명의 종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주고, 여기에 따른 주인의 반응을 하느님의 반응으로 유비시키는 데 있습니다. 권력과 재물이 있는 주인이 내 눈 앞에 있을 때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때 충성은 이른바 충성 경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 속 주인은 그런 충성 경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없는 동안에, 그가 없는 장소에서, 그의 사람이라는 부담과 위험을 안고서도 여전히 충직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주인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인 예수님께서 그분의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마침내 주인은 (왕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장사를 했다는 것은, 그 자금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했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의 장사 활동을 통해서, 그가 그 주인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는 의미입니다. 위험과 부담이 따르는 일을 기꺼이 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와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을 칭찬합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주인의 칭찬 내용을 한번 눈여겨보십시오. “잘했다! 능력 있고 성공한 종아하지 않으시고,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했습니다. 주인이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주인은 종이 자신의 돈을 두 배로 불린 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그의 능력과 성공을 칭찬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의 능력과 성공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착함과 신실함을 칭찬했습니다. 무엇을 잘했다는 것인가요? “내가 없는 동안에도 나의 사람으로 남아 맡은 바 소명을 충실히 다했으니, 너는 착하고 신실한 종이다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는 바라보시는 시선입니다. 우리는 큰 열매를 거두어야,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다섯 달란트를 남기는 성공을 이루어야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은, “착하고 신실하게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혹시 일을 그르쳐 가진 것도 다 없애버리지 않을지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착하고 신실하게맡겨 주신 일만 바라보며 사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입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 받는 상은 무엇인가요? 그동안 수고한 데 대한 물질적 보상이 아닙니다. 주인은 종에게 휴가를 보내주거나, 특별 보너스를 주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 받는 보상은 주인의 더 큰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주인의 일을 맡고, 이로써 주인이 누리는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착하고 신실한 종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여러분, 매 예배마다 봉헌예물을 드리며 제가 바치는 기도가 있습니다. 매번 비슷해서 여러분들 익숙하실 겁니다. “적은 예물 주님 앞에 드리오니, 이 예물이 쓰여 지는 곳마다 당신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시고, 그 나라에 참여하는 기쁨을 저희와 가정과 교회가 함께 누리게 하옵소서.” "예물을 이만큼 드리니, 우리를 좀 더 축복해 주십시오.”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 참여하는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해 주시길기도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착하고 신실한 종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한번은 영국의 한 언론인이 테레사 수녀에게 질문을 했답니다. “당신은, 이런 선행을 통해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모든 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그들을 돕는 일을 계속해 올 수 있었습니까?” 테레사 수녀의 대답입니다. “나는 성공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받은 명령은 신실하라는 것이었어요!”(앞의 책, 637.) 테레사 수녀가 한 일은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다섯 달란트를 남긴 일이 아니라, 마이너스 다섯 달란트, 마이너스 오백 달란트가 되는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4.

 

반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주인이 무서워 그 돈을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주인이 무서워 그랬다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주인이 무서워 그랬다기보다는, 주인 없는 상황에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다 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확한 이해일 겁니다. 정치인들이 하는 일종에 간 보기를 하다 그만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이죠. 그 사이 주인이 왕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의 신임을 얻은 종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주인은 그에게 한 달란트라는 노동자 15년 품삯이라는 큰돈을 맡기고 떠나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그 종은 주인의 신뢰에 신실함으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 많이 계산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나머지, 주인이 활동하라고 맡기고 간 돈을 그만 땅에 숨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위기 시에 저 사람과 나는 아무 관련이 없다, 나는 받은 게 없다,” 하면서 퇴로를 마련해 두기로 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주인의 평가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향한 주인의 믿음에 불신으로 응답했으니 악하고, 다른 이에게 맡겼더라면 주인의 이름으로 더 많은 활동을 했을 것을 묻어 두었으니 게으른 종입니다. 그는 내쫓김을 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애매한 사람입니다. 주인의 제일가는 신임을 얻어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아니고, 가장 적은 신임을 받아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두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큰돈이긴 했습니다만,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아마 다른 두 종보다 고뇌가 깊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아예 세 명의 종 신임 받는 종 가운데 들지 않았더라면 고민이 덜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차피 나는 주인의 신뢰를 받는 종이 아니니까, 하는 자의식을 가지면 운신의 폭이 좀 넓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두 달란트 받은 이 애매한 종은, 생각하기에 따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처럼 착하고 신실한종의 길을 갈 수도 있고,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악하고 게으른종의 길을 갈 수도 있는 기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말은 그와 같이 하여라는 구절입니다. 누구와 같이 했다는 말인가요? 다섯 달란트를 남긴 제자와 같이 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모델로 삼지 않고,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흔들리면서 고민은 했지만, 결국 주인이 없는 동안에도 주인의 뜻대로 활동함으로써 주인의 기쁨이 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누구와 같이 하느냐, 누구를 신앙의 모델로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하느님께 다 달란트를 선물로 받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아마 우리 대부분은 다섯 달란트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왕에 주실 거 좀 더 많이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고, 그래도 이 정도면 감사하다 하는 자족하는 마음도 동시에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바라보고 사느냐, 누구와 같이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결과를 맞이합니다. 다섯 달란트 종을 모델로 삼아 그와 같이 할것이냐, 아니면 한 달란트 종을 모델 삼아 그와 같이 할것이냐 하는 선택이 우리를 착하고 신실한 종의 삶으로 이끌기도 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의 삶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삶도 그렇지만,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늘 기도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말씀대로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을 모델로 삼아서 그와 같이하면 어느새 그렇게 닮아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기도해서 뭘 하냐,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모델로 삼아 그와 같이하면, 조금 있던 믿음도 없어지고, 어느새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한 신학적 표현을 활용하자면,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간직한 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믿느냐는, 사실 자유입니다. 그런데 왕이신 그분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의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언젠가 다시 오실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중심으로 한 세속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라는 명령입니다. 받은바 달란트를 활용해서 그리스도인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담이 되고 때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활용해 착하고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잘했다! 능력 있고 성공한 종아하지 않으시고,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칭찬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는 일들의 결과가 즉각 드러나지 않는다고, 혹은 정산해 본 결과 보잘 것 없이 작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다만, “착하고 신실한마음으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때가 이를 때에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더 많은 일, 더 귀한 일들을 여러분 각 사람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맡겨주실 줄 믿습니다. 이 믿음 가지고, 한 주간도 착하고 신실한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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